“지금 한 말 잊지 마십시오.”최하준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여름은 쪼르르 달려가 최하준의 침대 옆에 이불을 깔았다.최하준은 처음엔 잠깐 경계했으나 여름에게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 보고는 곧 잠들었다.그러다 얼마나 잤을까,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열어줘요… 제발… 문 좀… 너무 추워… 무서워… 무서워.”최하준은 일어나 앉았다.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와 비추고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누워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름의 모습이 달빛에 어렴풋이 보였다.“일어나요, 꿈입니다.”최하준이 침대에서 내려와 여름의 손을 귀에서 뗐다.그러나 여름은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속 웅얼거렸다. 조그만 얼굴이 핏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창백했다.별수 없이 최하준은 여름을 품에 안고 어깨를 도닥였다.“걱정 말아요. 괜찮아요….”부드럽고 따뜻한 남자의 목소리에 잔뜩 긴장해 있던 여름의 몸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어깨와 뺨에 검은 머리카락을 흐트리고 품에 폭 안긴 작디 작은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몸에선 화려하진 않지만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는 아니었다. 집에서 쓰는 샴푸 향이다.전에는 그 샴푸 향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었다.향기에 취한 채 최하준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원래는 여름이 잠이 들면 내려놓을 생각이었으나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두 사람은 베개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여름은 몸 반쪽을 최하준의 가슴에 기대고 달게 자고 있었다, 평온한 웃음을 띤 채.최하준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마치 달달한 신혼부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잠시 후, 그는 이불을 살살 걷어냈다.그리고 여름의 잠옷 앞 섶이 거의 다 풀려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그때, 여름이 스르르 눈을 떴다.서로 눈이 마주치자 여름의 동공이 확장됐다.자신이 최하준의 품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은 여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쪽으로 피했다.“아니, 왜 남이 침대에 들어와 있어요?”“…….”최하준은 어이가 없어 웃
“됐어요. 나한테 뭐라고 할 순 있지만 여자라서 그런 걸 가지고 뭐라 하면 안 되죠.”“좀 하면 어떻습니까?최하준의 말투에 화가 가득했다.“아 진짜….”여름은 열이 확 뻗쳤다. 갑자기 최하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최하준은 깜짝 놀랐다.‘설마 강제로 키스라도 하려는 거야?’머릿속은 젤리처럼 도톰한 여름의 입술로 가득했다. 그런데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뺨에서 갑자기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이럴 수가… 꼬집었다.최하준은 여름을 힘껏 밀쳐냈다. 꼬집힌 자리를 문질렀다.젠장, 정말 아팠다.“강여름 씨! 내가 당신을 어쩌지 못할 줄 알고 이러시나 본데?”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제정신이 돌아온 여름은 몸이 떨렸다. 어쩌자고 이런 황당한 짓을 저질렀을까?“어… 내 얘기 좀 들어봐요, 그러니까… 내가 너무 쭌을 사랑해서….”여름은 더듬거리며 변명거리를 찾았다.“그런 말도 있잖아요.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고.”최하준이 다가와 이를 꽉 물며 말했다.“누굴 바보로 아는 겁니까?”“그럼 쭌도 한 번 꼬집어요.”여름은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날 사랑하는 만큼 꼬집어요. 사랑하는 만큼 세게 꼬집기!”“…….”최하준은 30년 인생 처음으로 욕이 나오려 했다.‘진짜 이런 식으로 도발해도 내가 어쩌지 못할 줄 아나 본데?’최하준이 왼손으로 여름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여름의 뺨을 꽉 꼬집었다. 핑크빛 뺨은 찹쌀 모찌처럼 부드러웠다. 그대로 놓고 싶지 않았다.아악!최하준은 보드라운 얼굴이 빨갛게 된 걸 확인하고서야 놓아주었다.“이제 잊지 마십시오. 벌입니다.”여름은 아픔을 참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아뇨, 이건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증거죠.”“꿈 깨시죠.”차가운 웃음과 함께 최하준은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얼굴에 벌건 자국이 거울에 비췄다. 당장 나가서 어떻게 해주고 싶었다.망할.평상시라면 마스크를 써도 된다. 하지만 오늘은 재판에 출정해야 한다. 어느 변호
이지훈이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들고 와 최하준과 구민상에게 건네며 달랬다.“여긴 무슨 일이야?”최하준이 무신경하게 말했다.“나 참, 나도 오늘 2호 법정에서 재판 있어. 나한테도 관심 좀 가져주지?”이지훈이 투덜댔다.“그런데 그 마스크는 뭐야? 감기 걸렸어?”“…….”“남한테 전염될까 봐? 그런 세심한 구석이 있었어? 동성 오더니 철 좀 드는구나”10분 후, 법정 심문이 막 시작되려 할 때 최하준은 마스크를 벗었다. 퍼런 멍자국을 보고 이지훈은 커피를 뿜을 뻔했다.“이게 뭐야….”“부딪혔어.”침울하게 한 마디 내뱉고 최하준은 법정으로 서둘러 들어갔다.이지훈은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누굴 바보로 아나, 여자에게 꼬집힌 자국이 분명했다.‘저 재미없는 녀석이 이렇게 망가진 모습이라니, 이따가 몰래 찍어 단톡방에 올려야겠다,’……여름은 집에서 며칠 쉬었다. 얼굴에 멍자국이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일을 찾으러 나섰다.하지만 결과는 모두 좋지 않았다.“죄송합니다. 표절한 디자이너는 채용할 수 없습니다.”“강여름 씨, 이미 이쪽 바닥에 소문이 파다해요. 아무도 뽑지 않을 거예요.”“TH에서 업계에 쭉 통보했거든요. 그런데 누가 겁도 없이 강여름 씨를 뽑겠어요?”“…….”지원했던 회사를 나서며 강여름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했는데 이제 일자리마저 찾을 수 없다니.‘이제 어떻게 한다? 업종을 바꿔야 하나?’“빵빵!”옆에서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는데 여름이 반응이 없자 누군가 소리 질렀다.“여름! 오랜만이다.”여름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던 고급 SUV에서 훈훈하게 생긴 얼굴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선배, 어떻게 여기 계세요?” 놀랍게도 유학 시절 선배 도재하였다. '재하 선배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우리 회사도 이 건물이야. 여기서 나오던데 무슨 일이야?”도재하는 차를 세운 뒤 타라고 손짓했다.여름은 차에 올라, 쑥스럽게 말했다.“입사 지원하러 왔는데
‘뭐가 ‘또’야?’여름은 억울했다.‘내가 요즘 만날 집에서 밥만 했지 한 발자국도 안 나갔다고, 어?’“그냥 전에 같이 유학했던 선배랑 밥 한 끼 먹으려는 거예요.”최하준이 웃었다.“그러니까 이번엔 대학 동문이란 말이죠, 지난번엔 고등학교 동창들한테 당하더니.”“어쨌든, 그런 줄 아세요.”여름은 더 열 받고 싶지 않아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여름이 씩씩거리는 걸 보고 도재하는 궁금해졌다.“새 남친? 아니면 남편?”여름은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그럴 리가요, 제 룸메이트예요.”‘호적상으로 남편이긴 한데 그 사람은 절대 인정 안 하거든요. 유명무실이랄까.’도재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꼭 부부끼리 하는 대화 같아서.”“그, 그런가요?”여름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럴 리가, 최하준과는 늘 이런 식으로 대화했는데 같이 살다 보니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건가 싶었다.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저녁을 9시까지 먹은 후 도재하는 컨피티움 입구까지 바래다줬다. “잊지 마, 내일 아침부터 출근이야. W팰리스 리모델링 건 오더 받은 게 있거든. 내일 가서 실측 좀 해줘.”“네!”여름은 손을 흔들다가 도재하가 탄 차가 떠나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최하준이 계단 위에서 차갑게 쳐다보고 있었다. 품 안에는 졸린 눈의 지오가 늘어져 안겨 있었다.“선배라더니, 남자였습니까?” 최하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나 눈을 구겼는지 파리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오늘 자기 저녁 식사는 형편없었는데 여름이 남자랑 맛있는 거 먹으며 시시덕거렸을 걸 생각하니 왠지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 학교 선배….”최하준이 말을 끊었다.“강여름 씨, 처음에 당신이 결혼하자고 한 겁니다. 경고하는데 아무리 계약 결혼이지만 행동 좀 주의해 주시죠. 와이프 바람 났단 소린 듣고 싶지 않습니다.”웃고 있던 여름의 얼굴이 굳어졌다.“뭘 그렇게 오버해요? 선배랑 밥 한 끼 먹은 거 가지고. 당신 눈에는 내가 그렇게 막돼먹은
아직 꽁해 있던 여름은 거절했다.“죄송한데 난 지오 시터지, 당신 도우미는 아니죠.”‘당신’이란 두 글자에 무척 힘이 들어가 있었다. 최하준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른하게 말했다.“강여름 씨가 말끝마다 말하던 사랑이란 게 이런 겁니까?”“…….”‘사랑은 개뿔. 난 외숙모란 자리를 사랑했던 거라고요, 아시겠어요?’여름은 툴툴거리며 냉장고를 열어 국수 재료를 꺼냈다.열린 미닫이문 틈으로 여름의 모습을 지켜보는 최하준의 마음은 복잡했다.이제 여름이 한 음식이 아니면 입맛이 돋지 않았다. 음식에 마약이라도 넣은 게 아닐까 싶었다.******다음 날 아침 식사 후.최하준은 소매 단추를 잠그며 외출 준비를 하다가 여름도 아이보리색 재킷으로 갈아입은 것을 보았다.안에는 진한 핑크색 셔츠에 아래는 체크무늬 롱스커트에 스타킹을 신었다. 심플하면서 세련된 룩에 볼륨 있는 몸매가 돋보였다.옅은 화장에 귀에 걸린 진주 귀걸이가 너무 아름답고 생기발랄해 보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그러나 곧, 자신은 나갈 것이란 데 생각이 미치자, 자신을 위해 꾸민 것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또 데이트 갑니까?”불쾌감을 꾹꾹 누른 목소리였다.“아뇨, 출근요. 어제 취직했어요. 퇴근한 다음에 밥할게요. 저녁에 지오 산책도 시키고.”최하준이 반박할 틈을 주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여름이 하는 일은 탐탁지 않았다.“또 전단 돌리러 갑니까”“아니요. 이번엔 수석 디자이너예요”여름은 “흥” 하고는 핸드백을 집어 들고 먼저 집을 나섰다.최하준도 곧바로 나서 함께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여름의 실루엣을 보며 물었다.“데려다 줄까요?”왠지 목이 다소 건조한 느낌이었다.“괜찮아요.”여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운전해 가려구요. 가다가 만원 전철에서 눌리고 싶진 않거든요.”“…….”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 주는 게 싫다는 뜻인가?여자를 바래다 줘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최하준은 이쪽으로 눈치가 영 꽝이다.8시 반
회사에서 나와 여름은 W 팰리스로 차를 운전했다.그곳은 동성에서 가장 고급 주택단지였다. 진짜 엄청난 부자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다.단지 입구에서 경비들이 차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기에 걸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서른이 좀 안 돼 보이는 남자가 수영장 가에 서 있었다. 키가 매우 크고 훤칠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검은 색 수트가 매우 품위 있어 보였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혹시나 하며 물어보았다.“양 대표님?”“그렇습니다. 도하에서 보낸 디자이너군요, 굉장히 젊으시네요?”양유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눈앞에 있는 아가씨는 자신이 동성에서 본 여자 중 가장 예쁜 것 같았다. 모르는 상황이라면 도 대표가 자신에게 미인계라도 쓰려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눈은 맑고 총총한 것이 정말 착실하게 일만 할 사람 같았다.“저는 도재하 대표 학교 후배입니다. 오늘 실측 후 디자인 보여드릴게요. 마음에 안 드시면 언제든 디자이너는 교체하셔도 상관없습니다.여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자신감 넘쳤다.“덧붙이자면 나이와 실력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양 대표님께서도 젊으신데요.”양유진이 웃었다.“하하, 이거 뭐, 반박할 수가 없게 만드네요.”여름이 명함을 건넸다.“강여름이라, 들어본 이름 같은데.”여름은 혹시나 자신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들었을까 봐 가슴이 쿵쿵 뛰었다. “계절명이니까요. 괜찮으시면 대표님께서 함께 둘러보시면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잠시 후, 양유진은 여름을 데리고 저택을 한 바퀴 돌았다. 헬스장, 홈시어터룸, 농구장, 실내수영장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여름은 양유진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대강 파악하고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멋진 초안을 내놓았다. 양유진의 입맛에 딱 맞는 흠잡을 데 없는 디자인이었다.“강여름 씨 내공이 제가 해외에서 만난 정상급 디자이너들 못지않은데요. 아주 좋습니다. 특히 이 실내수영장 디자인 무척 흥미롭군요.”“나중에 입체 이미지로 보시면 더 맘에 드실 거예요.“좋습니다.
툭하면 자신이 얻은 건 모두 스스로 노력한 결과라고 말해 온 여름이 아니던가. 이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걸 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여름의 안색이 변하는 걸 보고 한선우는 속으로 통쾌했다.“왜? 후회돼? 네가 예전 같았으면 너한테도 정보를 줬을 텐데 말이지.”여름은 화가 나 토하고 싶을 정도였다.전에는 눈이 어떻게 됐길래 이런 자식을 지적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여름은 최하준을 떠올리고는 불편했던 것 뿐이었다.‘쭌이 정말 여기에 집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 사람 인테리어를 누가 하건 상관없지만 강여경이 맡게 되는 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됐어. 외삼촌 댁 인테리어를 누구에게 맡기건 오빠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외숙모가 계신다면 외숙모 마음대로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오빠가 뭐라고, 흥”‘하하, 내가 집에 가서 네 계획 다 엎어버릴 거다!’ 한선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못 배운 사람처럼 이제 아무 말이나 막 뱉는구나? 우리 외삼촌은 결혼하신 적이 없는데 무슨 외숙모야. 나랑 제일 친해. 말만 하면 들어주실 거라고.”여름이 비웃었다.“그래? 그럼 가서 재산도 달라고 해보지 왜?”“너 제정신이냐?”화가 난 한선우의 얼굴이 벌게졌다.“이 모양이니 아버님 어머님이 널 못 나가게 했지. 다 네 잘못이야.”마지막 말이 여름의 마음속에 꾹꾹 눌러 놓았던 울분을 건드렸다. “한선우! 네가 인간이니? 그게 사람이 할 소리야?”“내가 틀린 말 했어? 언론에 너희 집에서 너를 감금하고 학대했다고 떠들고 다니던데, 내 보기엔 얼굴에 기름이 자르르한 게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네.너 같은 딸 둔 게 천추의 한이실 거다. 그런 식으로 입을 놀려서 너희 집 손해가 얼마나 막심한지 알아? 시총 수천억이 증발했다고!”“너 같은 인간을 좋아한 거야말로 내 천추의 한이야.”여름은 한선우의 뺨을 갈겨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너무 분해 무슨 일이라도 낼까 봐 그냥 자리를 뜨려고 했다.“잠깐.”한선우가 잽싸게 여름의 팔을 붙
“안 돼.”양유진은 손을 내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난 살 집에 대해서만큼은 까다로운 편이라 대충 하고 싶지 않다. 강여경 씨는 만난 적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너무 아는 게 없어서 말이지. 최신 자재나 최첨단 가전제품 등에 너무 무지해. 내 집을 망치게 둘 순 없어.”자신의 약혼녀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좀 난처했다.“하지만 지난번 문화센터 디자인은 잘했잖아요….”“말은 똑바로 하자. 그 입찰 건은 내가 말 넣어줘서 성사된 거지.”그 일을 언급하자 양유진은 기분이 안 좋아졌다.“성 회장하고 너 그거 따냈다고 너무 신난 것 같은데 자중해줬으면 좋겠다. 혹여라도 너랑 나 연루된 거 알려지면 골치 아프니까.” 한선우는 풀이 죽었다.“알았어요, 싫으시면 할 수 없죠. 그런데 손에 그건 설계도예요? 어디에 디자인 맡겼어요? 그냥 궁금해서요.”“도하건축디자인. 전에 홍콩에서 알게 된 친구가 이번에 동성에 지사를 냈거든.”양유진은 도면을 건넸다.“그 회사 디자이너가 설계한 거다. 와서 30분도 안 돼서 천 평짜리 초안을 뚝딱 그려오더구나. 그 짧은 시간에 내가 원하는 걸 완벽히 파악했더라고. 무척 마음에 든다.”“강여름?”한선우는 우측 하단의 서명을 보고 놀라 얼어붙었다. 아까 입구에서 여름을 마주친 게 생각났다. ‘여기 디자인을 하러 온 거였군.’“그래, 맞아.”“걘 안 돼요. “복잡 미묘한 말투였다.“걔가 제가 지난 번 말씀드렸던 TH 딸이에요, 전에 제 여친이었던. 지금 걔 이상해졌어요. 다른 사람더러 자기 작품 표절했다고 우기더니 자기 부모님까지 모함하는 애예요.”양유진은 살짝 놀랐다. 어쩐지 많이 들어본 이름이더라니.방금 만났던 여인은 무척 대범하고 고고했다.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그 사람이 누구 걸 표절하고 그럴 수준은 아니던데? 사업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기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편이다. 재능도 천부적이고 인성에도 전혀 문제없어 보였어. 오히려 네가 그 사람에게 편견이 있는 것 같구나.”“외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