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우도 납치를 당한 적이 있었기에 다소 그녀를 이해하고 있었다.하지만 강하랑은 달랐다.지승우의 납치는 돈이 목적이었기에 납치범은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주기도 했었다.그러나 강하랑은... 납치범의 목적이 그녀의 죽음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사람은 공포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면 특정 누군가를 원망하기 마련이었다.아무리 연유성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알아도 머리는 이미 그와 연관이 있다고 확정 짓고 있었다.무의식적으로 그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인식한 것이다.지승우
예상치 못한 감각에 연유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간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강하랑! 움직이지 마!”연유성은 어두운 눈빛으로 이를 악물었다. 한 손은 강하랑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았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이마를 밀며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를 밀어낸다고 해서 거리가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강하랑의 손은 위험하게 움직이면서 연유성의 정장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벌어진 셔츠 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연유성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제발 움직이지 마, 응?”이성이 진작 가
연유성은 뚜껑 딴 물병을 강하랑의 앞으로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연유성의 손까지 잡은 채로 한참이나 물을 마셨다. 마치 사막에 있던 사람처럼 숨 한 번 쉬지 않고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물을 반이나 비우고 나서야 다시 연유성의 품에 기댔다.“피곤해...”연유성은 물병 뚜껑을 닫으면서 피식 웃었다.“우리 아가씨 물 마시느라 피곤하셨어요? 아니면 잠자느라 피곤하셨어요? 응?”“아가씨 아니야!”강하랑은 고개를 들면서 연유성을 힐끗 노려봤다. 아직 완전히 정신 차리지 못한 듯 깜빡이는 눈은 시선을 돌리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차는 청진 별장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 그리고 심우민은 아직도 연유성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유성은 한참 뒤에야 고민이 끝났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혼 서류는 나한테 줘요. 하랑이 일어난 다음 직접 제출하러 갈게요.”심우민은 머리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회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이 차를 몰고 가요.”연유성은 당연히 심우민을 택시 타고 돌아가게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별장의 차고에는 다른 차가 아주 많았기에 영향받을 리도 없었다. 그에게 차를 내어주면 출근할 때 다시 데리러 오기도
연유성과 강세미는 정략결혼으로 이어진 쇼윈도 부부 같았고, 연유성과 강하랑이야말로 사랑으로 이어진 진짜 부부 같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남 일이었기에 심우민은 묵묵히 운전석이 올라타 빠르게 멀어져 갔다.연유성은 제자리에 멈춰서 한참이나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청진 별장을 향해 걸어갈 때 강하랑이 눈을 뜨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유성, 나 이제 내려줘.”강하랑의 눈동자는 아주 맑았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또박또박 뱉은 말은 그녀가 아직도 취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똑바로 서지도 못할
게스트룸에서 나온 연유성은 2층 난간을 잡고 서 있었다. 표정과 분위기는 원치 않게 잠이 깬 탓에 아주 어두웠다. 하긴 이 시간에 억지로 눈을 뜨게 되었다면 강하랑이었다고 해도 심술을 잔뜩 부렸을 것이다.“미안, 너희 집 전등 스위치를 찾지 못해서 발을 헛디뎠어. 나 때문에 깼지?”강하랑은 어젯밤 술 취한 다음에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왜 청진 별장에 있는지도 당연히 몰랐다. 하지만 어찌 됐든 남의 집에서 민폐가 된 것은 사실이었기에 순순히 사과했다.연유성은 거만한 자세로 강하랑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말을
“내 옷은 네가 갈아입혔어?”강하랑은 연유성의 말속에 숨어 있는 중점을 찾아내고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주방으로 향하려고 했던 발걸음을 멈추더니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어땠을 것 같아... 여보?”연유성은 일부러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특히 ‘여보’라는 말이 가장 의미심장했다.청진 별장에는 두 사람 외의 다른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강하랑에게 잠옷을 갈아입혀 줬을 사람도 당연히 연유성 밖에 없을 것이다.“너...!”연유성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내가 뭐? 넌 내 아내야. 옷 갈
강하랑은 한동안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표정은 금방 진정되었다.‘그냥 몸뚱이일 뿐이야, 괴로워할 것 없어. 더구나 흉터 제거 수술을 받지 않은 사람은 나잖아. 아무것도 보지 못한 연유성을 탓할 건 없지. 진짜 봤다고 해도 괴로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연유성이야. 봤으면서도 그런 말을 한 거면 알아서 천벌 받겠지. 내가 지금 괴로워하는 건 자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강하랑은 단단히 결심했다. 앞으로 또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는 절대 약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설사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