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청진 별장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 그리고 심우민은 아직도 연유성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유성은 한참 뒤에야 고민이 끝났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혼 서류는 나한테 줘요. 하랑이 일어난 다음 직접 제출하러 갈게요.”심우민은 머리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회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이 차를 몰고 가요.”연유성은 당연히 심우민을 택시 타고 돌아가게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별장의 차고에는 다른 차가 아주 많았기에 영향받을 리도 없었다. 그에게 차를 내어주면 출근할 때 다시 데리러 오기도
연유성과 강세미는 정략결혼으로 이어진 쇼윈도 부부 같았고, 연유성과 강하랑이야말로 사랑으로 이어진 진짜 부부 같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남 일이었기에 심우민은 묵묵히 운전석이 올라타 빠르게 멀어져 갔다.연유성은 제자리에 멈춰서 한참이나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청진 별장을 향해 걸어갈 때 강하랑이 눈을 뜨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유성, 나 이제 내려줘.”강하랑의 눈동자는 아주 맑았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또박또박 뱉은 말은 그녀가 아직도 취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똑바로 서지도 못할
게스트룸에서 나온 연유성은 2층 난간을 잡고 서 있었다. 표정과 분위기는 원치 않게 잠이 깬 탓에 아주 어두웠다. 하긴 이 시간에 억지로 눈을 뜨게 되었다면 강하랑이었다고 해도 심술을 잔뜩 부렸을 것이다.“미안, 너희 집 전등 스위치를 찾지 못해서 발을 헛디뎠어. 나 때문에 깼지?”강하랑은 어젯밤 술 취한 다음에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왜 청진 별장에 있는지도 당연히 몰랐다. 하지만 어찌 됐든 남의 집에서 민폐가 된 것은 사실이었기에 순순히 사과했다.연유성은 거만한 자세로 강하랑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말을
“내 옷은 네가 갈아입혔어?”강하랑은 연유성의 말속에 숨어 있는 중점을 찾아내고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주방으로 향하려고 했던 발걸음을 멈추더니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어땠을 것 같아... 여보?”연유성은 일부러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특히 ‘여보’라는 말이 가장 의미심장했다.청진 별장에는 두 사람 외의 다른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강하랑에게 잠옷을 갈아입혀 줬을 사람도 당연히 연유성 밖에 없을 것이다.“너...!”연유성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내가 뭐? 넌 내 아내야. 옷 갈
강하랑은 한동안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표정은 금방 진정되었다.‘그냥 몸뚱이일 뿐이야, 괴로워할 것 없어. 더구나 흉터 제거 수술을 받지 않은 사람은 나잖아. 아무것도 보지 못한 연유성을 탓할 건 없지. 진짜 봤다고 해도 괴로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연유성이야. 봤으면서도 그런 말을 한 거면 알아서 천벌 받겠지. 내가 지금 괴로워하는 건 자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강하랑은 단단히 결심했다. 앞으로 또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는 절대 약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설사 미래
단씨 형제는 강하랑이 밖에서 술 마시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번 안서동 9번지에 갔을 때도 우유만 주문해 줄 정도로 말이다. 이게 바로 그녀가 지승우에게 연락한 이유이기도 했다.만두를 꿀꺽 삼키고 난 강하랑은 일부러 대답을 안 해주고 있는 연유성을 힐끗 보면서 다시 물었다.“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내가 뭐 실수하지는 않았지?”연유성은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맞춰봐.”“흥, 말 안 할 거면 됐어.”“만약 실수했으면 네가 책임질래? 아내로서?”“말 안 할 거면 됐다니까.”강하랑은 연
“당연히 이...”연유성의 안색이 하도 어두웠는지라 강하랑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여전했다.‘할아버지 때문에 마지못해 허락한 결혼을 끝낼 수 있게 됐는데, 연유성이 제일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갑자기 정색하고 지랄이야?’아쉽게도 강하랑은 깊이 생각할 새가 없었다. 그릇이 깨지면서 튕긴 파편에 연유성이 손을 벴기 때문이다.수돗물이 연유성의 상처를 따라 흘러내리면서 싱크대는 어느덧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강하랑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넌 가서 밴드나 붙여.
강하랑은 부랴부랴 단톡방에 생존 신고를 했다. 그리고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단오혁이 벌써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잘못을 저지른 쪽은 강하랑이었기에 그녀는 최대한 낮은 자세와 달콤한 목소리로 선제공격했다.“오빠~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강하랑은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식사했으니 시간은 어느덧 아침 다섯 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단오혁은 강하랑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연유성이랑 같이 있지?”불쾌함이 잔뜩 묻어 있는 말투에 강하랑은 순간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