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으면 참지 말고 소리 내서 울어.” 그가 강하리를 껴안자 강하리의 몸이 움찔했다. “구승훈 씨!”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구승훈은 오히려 더 꽉 껴안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안고만 있었고 반항하던 강하리도 점차 잠잠해졌다.소리 없는 눈물이 조용히 그의 셔츠를 적셨다. 구승훈은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밀려와 상대를 더 꽉 끌어안았다.이내 마음을 진정시킨 강하리는 눈물을 닦으며 옆에 있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려 최대한 차분한 어투로 물었다.“구승훈 씨, 이 돈의 출처 확인했어요?” 구승훈은 손으로 붉어진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졌다.“알아봤어. 이 돈뿐만 아니라 다른 비정상적인 송금도 다 확인했어. 처음 네가 강찬수가 누군가의 사주를 지시로 널 협박한다고 의심했을 때 이미 다 확인했어. 하지만 상대는 사채업자였고 그 사이 그쪽 사람들은 이미 죽거나 사라졌어.”강하리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그럼 단서가 전혀 없다는 건가요?”구승훈의 눈빛은 차갑고 무거웠다.“알아보면 언젠가 단서는 나오겠지.”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구 대표.” 강하리가 뒤를 돌아보니 식당 앞에 한 손에 음식을 들고 서 있는 장진영이 보였다.“유라가 여기 생선찜이 먹고 싶다고 해서 포장해 가려고. 구 대표도 알다시피 유라가 생선을 제일 좋아하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강하리를 향해 웃었다.“하리도 있었네.” 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얘기 다 끝났으니까 난 먼저 갈게요.” 말을 마친 그녀가 가려는데 구승훈이 서둘러 그녀를 뒤에서 끌어당겼다. “내가 데려다줄게.” 구승훈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장진영이 끼어들었다.“구 대표, 나 할 말이 있는데.” 강하리는 그 말에 구승훈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차 있어요.” “내가 데려다준다고!”강하리는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장진영을 힐끗 쳐다보았다.“노진우 씨가 데려다주는 게 낫겠어
마음이 답답해진 강하리는 눈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손연지가 힐끗 보며 말했다.“그럼 저 개자식이 널 화나게 했구나?”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구승훈 씨, 오늘 일은 고마웠어요. 다른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구승훈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강하리가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입을 열었다.“화났어?”시선을 내린 강아리는 확실히 마음이 불편했다.오늘 장진영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둘 사이에는 여전히 송유라가 있다는걸 알려주었다.그녀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구승훈 씨, 가서 일찍 쉬어요.”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송유라 최대한 빨리 보낼게.”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손연지가 머리를 말리며 문을 열더니 깜짝 놀랐다.“이거 누가 보냈어?”문손잡이에는 아침 식사가 걸려 있었고 안에는 강하리가 좋아하는 빵이 들어 있었다.“세상에, 빵이야! 강하리,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 개자식이 네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아?”강하리는 속눈썹을 파들 떨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그녀가 씻고 나왔을 때는 이미 손연지가 음식을 모두 식탁 위에 올려놓은 뒤였다.손연지는 그녀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개자식이 준 거라도 안 먹으면 아깝잖아.”강하리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명인 병원.송유라는 또다시 병실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장진영이 옆에서 말려봤자 소용이 없었다.구승훈이 그녀의 번호를 차단한 이후 다시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심지어 그녀 지인들의 전화도 받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가장 화나게 한 건, 자신은 이 지경이 됐는데 구승훈은 강하리와 데이트를 한다는 것이다.이 모든 게 다 강하리 때문이다.강하리만 없었다면 구승훈이 그녀를 이렇게 대할 리 없는데!송유라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구승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셨어.”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전화를 끊고 강하리에게 걸어갔다.“화 풀어, 알았지? 강찬수에 대해 계속 알아볼 테니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한편, 강하리 곁으로 가는 구승훈을 바라보던 송유라의 얼굴에는 원망이 가득했다.그녀의 다리와 발에는 깨진 꽃병으로 긁힌 상처가 있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는 듯했다.안현우는 덤덤하게 웃었다.“유라 씨, 이대로 떠나면 정말 가망이 없어.”노민우는 옆에서 인상을 찌푸렸다.“안현우, 그만해. 감정적인 일인데 억지 부린다고 돼?”안현우가 콧방귀를 뀌었다.“이게 뭐가 억지야? 유라 씨랑 승훈이는 원래 알아주는 한 쌍이었어, 몰라?”노민우는 다소 말문이 막혔다.“정말로 짝이 맞다면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겠지. 지금 승훈이 마음은 누가 봐도 강하리에게 있잖아.”그렇게 말한 후 그는 송유라를 바라보았다.“유라 씨, 몇 년 동안 요양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외국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날 지 누가 알아요.”송유라는 눈물을 훔쳤다.“내 남자는 아무도 못 뺏어가요.”노민우는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안현우는 옆에서 피식 웃었다.“노민우, 설마 강하리 그 여자한테 홀린 건 아니지?”노민우는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병동을 빠져나갔다.밖으로 나오는데 마침 누군가와 부딪혔다.사과하려던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던 손연지는 상대가 노민우인 데다가 송유라의 병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눈을 어떻게 뜨고 다니는 거예요?”노민우는 그녀의 말에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아니, 분명 그쪽이 와서 부딪힌 건데요?”손연지의 표정은 경멸로 가득했다.“부딪혀도 싸죠 뭐. 온몸에 비열한 냄새가 진동하네!”말을 마친 그녀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고 노민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이봐요, 말 똑바로 안 해요?”“나쁜 놈 친구랑 할 말 없어요!”
강하리는 손연지가 자신을 부를 때까지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멍하니 뭐 해?”강하리는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흩어져 있던 생각을 정리하고 병동으로 걸어갔다.방금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약간의 두려움이 밀려왔다.찰나의 순간 그녀는 바로 송동혁에게 가서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이성이 그녀를 말렸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오가는 병원에서 다짜고짜 찾아가서 다그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만약 들어갔다가 참지 못하고 소란이라도 피우면 송동혁의 친딸인지 아닌지 여부와 상관없이 정서원의 평판은 완전히 망가질 테니까.그녀는 이제 막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엄마가 평온하게 살길 바랐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봤다.“연지야, 혹시 친자 확인할 수 있는 곳 알아?”손연지는 깜짝 멈칫했다.“친자 확인 검사? 누구를 하려고?”강하리는 잠든 정서원을 힐끗 쳐다보며 손연지에게 방금 들은 말을 속삭였다.손연지는 깜짝 놀라며 미처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가 송동혁의 딸이 아니라고?”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두 사람이 말한 잡것에 자신 말고 또 다른 누군가 있을 리가.“아니, 그럼 송동혁은 왜 그때 네 엄마한테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 거야? 미친 거야, 몇 년 동안 아내와 자식을 버렸다는 소리만 듣고 살았잖아.” 강하리의 눈동자에 냉기가 감돌았다.“만약 우리 엄마가 자신이 품고 있는 아이가 송동혁의 아이가 아닌 걸 알았어도 그 비싼 보석을 다 주었을까?”“젠장!”손연지는 이를 갈았다.“송동혁, 그 개자식!”이내 확 바뀐 어투로 말했다.“오히려 잘됐어. 그 사람들과 바로 선 그어버릴 수 있잖아. 넌 정말 좋은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쓰레기 같은 아버지가 있을 수 있겠어!”강하리는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났다.“그래, 이제 진짜 연을 끊어야지.”“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손연지가 묻자 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지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별생각 없어
“우리 층에 누가 임신했나 봐요!”“어떻게 알았어요?”“화장실 쓰레기통에 글쎄 임신 테스트기가 있더라니까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는 두 명의 인턴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인턴들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곧장 일하러 갔다. 그래서 그녀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핸드폰은 오늘따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이런 가십거리가 가장 환영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강하리는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내가 소홀했어. 적어도 종이에 잘 싸서 버려야 하는 건데. 만약 구승훈 대표님이 알게 된다면...’끔찍한 상상에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때 구승훈의 비서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부장님, 대표님께서 찾으세요.”강하리는 책상 아래에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강 부장님?”“네, 들었어요.”...대표이사실 앞에 멈춰 서서 강하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담 비서 신도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대표이사실에는 우드 향 향초를 태우고 있었다. 점심부터 협력사 임원과 술 한 잔 마신 듯한 구승훈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반듯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방탕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도, 여유롭게 힘 풀린 몸도,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았다.강하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이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끊기지 않지. 어느 여자가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거절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몸매도, 능력도... 적어도 겉으로는 흠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오직 강하리만 그
강하리는 허리가 뻣뻣해져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몸을 돌릴 때는 꽤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맞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구승훈의 눈빛은 아주 어두웠다. 조금 전 열정이 넘치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안팎으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어떡하긴, 병원에 가야지.”강하리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두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구승훈은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강하리, 우리가 정한 룰은 기억하지?”강하리는 몸을 흠칫 떨었다.‘그래... 룰... 우리 사이는 애초에 게임일 뿐이었어. 대표님이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강하리는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반대로 구승훈은 구씨 가문의 장손이자, SH그룹의 후계자이다.강하리가 구승훈과 만나게 된 것은 100% 우연이었다.3년 전, 어머니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강하리는 급하게 돈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친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고 했다.하지만 화려한 별장 밖에 꼬박 하루 무릎 꿇고 있다가 기절까지 했는데도, 땡전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구승훈이 길고양이 줍듯이 그녀를 주운 것이었다.병원에서 눈을 뜬 그녀에게 구승훈은 ‘게임’을 제안했다. 마음 없이 몸만 쓰는 그런 게임 말이다.그때 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보수는 있어요?”구승훈은 그녀의 속물 같은 모습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피식 웃으며 오히려 칭찬했었다.“똑똑하네.”그렇게 두 사람은 게임을 시작했다.강하리는 꽤 일찍 룰을 파괴했다.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는 게임 파트너를 짝사랑했다.가슴 속에서 퍼져가는 아픔을 애써 무시하고 강하리는 미소를 짜냈다.“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구승훈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강 부장은 똑똑해서 참 좋아.”강하리는 꾸벅 인사하고 그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대표이사실을 벗어났다. 부하직원 안예서는 벌써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릇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으면서 여자는 더욱 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힐끗 보기만 하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강하리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기만 할 뿐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동생 구승재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구승훈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강 부장도 술 마시러 왔어요?”“네, 안 대표님과 계약을 성사한 기념으로요.”강하리는 그들 속에 끼어들지 않고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왜 그렇게 멀리 앉았어요? 가까이 와 봐요!”구승재는 겁도 없이 강하리를 부추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구승훈과 그녀의 관계를 알았기 때문이다.구승훈은 누가 봐도 곁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하리가 들어온 후로부터 그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더욱 차가워졌다.강하리는 아주 예쁘게 생겼다. 분명히 청순한 인상이지만 묘하게 매혹적인 것이, 고리타분한 정장에 비즈니스적인 미소만 지어도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역시 우리 형님 안목이란.’강하리와 같은 여자가 연예계에 진출한다면 거물들과 술자리 몇 번 가지는 것으로 톱스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강하리는 구승재의 말을 듣고서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룸 안의 사람들 속에 섞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구승훈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으니, 그녀가 다가갈 필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안현우는 어느샌가 술 한잔 들고 강하리의 곁에 가서 물었다.“강 부장, 한잔할까요?”“아뇨, 저는 몸이 불편해서 물로 대신할게요.”술잔을 받지 않는 강하리에 안현우는 기분이 상했다. 힘들게 만든 자리에서 그녀가 술 한 잔 마셔주지 않으니 말이다.안현우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가 취한 틈을 타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크하게 한 모금도 마셔주지 않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 대표님, 우리 강 부장 참 시크하죠? 이런 자리에서도 술 한 잔 안 마셔주네요.”구승훈은 천
강하리는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승훈의 뜻은 명확했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그는 절대 말리지 않을 것이다.‘이제는 내가 떠나도 상관없구나.’강하리는 안현우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단호한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다. 배 속에 아이도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게임일 뿐이었으니,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승훈은 그녀가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번에 생긴 아이는 병원에 가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기 마련이기에 문제였다.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구승훈은 평소에 꽤 신중하게 피임했다. 번마다 꼭 콘돔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하도 거칠게 한 탓에 콘돔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비록 제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소중한 청춘과 건강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정서원의 병원비라면 이미 꽤 모였다. 구승훈의 냉정함에도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되물었다.“저 진짜 떠나도 돼요?”“그렇게 묻는다는 건 너도 안 대표의 제안에 관심 있다는 건가?”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강하리는 피식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했다.“안 대표님의 조건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쨍그랑!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술잔은 구승훈의 다리에 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룸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휩싸였다.구승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