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균은 긴장한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릴리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참았다.그러다 마지막에는 말리는 걸 포기하고 진지하게 관전했다.보면 볼수록 놀라웠다.릴리는 겉보기엔 귀여웠지만 싸우는 모습은 아주 과격하고 무자비했다.게다가 대부분이 치명적인 공격이었다.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란 그녀가, 애지중지 길러진 그녀가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한 격투 기술을 알고 있는 걸까?마치 자주 싸움을 해본 듯 말이다.양수혁 역시 신하균만큼이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한 손으로 목을 잡고 다른 한 손은 힘없이 축 늘어뜨렸다. 릴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경악이 가득했다.가녀리고 약해 보이는 릴리에게 이렇게 폭발적인 힘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캐번디시 일가의 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그 경호원의 상처와 똑같은지 한 번 확인해 보실래요? 참, 그 사람 오른팔도 제가 부러뜨린 거예요. 오른팔을 부러뜨린 뒤에는 경찰들이 오기 전에 저한테 반격할까 두려워 왼팔까지 부러뜨렸어요.”말을 마친 뒤 릴리는 앞으로 걸어갔다.양수혁은 저도 모르게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겁먹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만하세요. 이젠 믿어요.”“믿는다니 다행이군. 우리 딸은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받았어. 지력도 체력도 모두 또래보다 훨씬 더 뛰어나지. 릴리는 아주 훌륭한 아이야. 물론 강한 만큼 책임도 뒤따르지만 말이지. 일반인들은 릴리의 똑똑하고 대범한 모습만 알아. 오직 릴리와 싸워본 사람만이 릴리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지. 축하해, 양 형사.”바론은 낮은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는 갈색 눈동자로 양수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경고의 의미가 다분했다.릴리를 얕봤던 양수혁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크게 좌절했다.그저 대놓고 얘기하지 않았을 뿐, 바론은 일찌감치 그의 의도를 눈치챘을 것이다.강미영은 꽤 심각한 상황에서도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얘기는 그만하시죠. 조사도 끝났으니 얼른 양 형사님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혹시
“고우신은 공범이에요. 그가 속은 건 사실이죠. 고씨 일가에서는 그를 지키기 위해, 그가 심한 처벌을 받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할 거예요.”신하균이 갑자기 말했다.릴리는 미간을 구겼다. 사실 그녀는 그 문제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기에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절 불러낸 이유는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인가요?”신하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릴리의 오른손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상처에 물 닿으면 안 돼요.”릴리는 작은 손을 펼쳐 보였다.“샤워는 해야죠. 안 묻을 수가 없어요.”“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해요.”“...”시선을 내리뜨린 릴리는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들어 신하균을 바라보았다.릴리는 사실 농담을 던지려고 했는데 신하균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눈빛에서 약간의 기대를 보았다.결국 릴리는 어쩔 수 없이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그녀는 의아했다. 신하균은 뭘 기대하는 걸까?빠르게 머리를 굴린 릴리는 몇 초간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뭐,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릴리는 고도로 집중한 상태로 밤을 새운 데다가 기분이 오락가락해서 지금은 조금 피곤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몸을 곧추세우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또 뭐 할 말 있어요?”신하균은 기대와는 다른 그녀의 차가운 반응에 은근히 실망했다. 하지만 확실히 볼일이 있었다.“어젯밤에는 릴리 씨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어요.”릴리는 자기보다 목소리가 더 애교스럽고, 더 끈질기게 달라붙던 김솔을 떠올렸다. 그녀가 물었다.“그래서요?”“그런데 릴리 씨는 화장실로 간 뒤로 돌아오지 않더군요. 그러다 종업원이 와서 릴리 씨가 떠났다고 알려줬어요.”그가 살짝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릴리는 그의 원망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결과가 궁금했다.“그 뒤에는요?”“...”신하균은 당황했다.“그래서 저도 돌아갔어요.”릴리는 의아했다.“김솔 씨를 집까지
해가 떠올랐고 은하타운은 여전히 고요했다.점심 때쯤 되어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은 강학도였다.그는 잠을 적게 잤고 낮잠을 자는 것에 익숙지 않았기에 점심시간이 되자 바로 깨어났다. 그가 도우미에게 점심 식사를 준비하라고 분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별장에 생기가 감돌았다.시간은 조금씩 흘렀고, 고성 그룹의 새로운 집권자 납치 사건의 배후가 고씨 일가라는 기사가 뉴스 헤드라인에 걸리며 인터넷이 뜨겁게 달궈졌다.강학도는 돋보기안경을 쓴 뒤 태블릿을 들고 기사와 댓글을 열심히 읽었다.기사는 제대로 보도된 듯했다. 게다가 사람들이 이 소식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소방관들이 화재를 거의 다 진화한 상태였다. 물론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사람들이 구체적인 상황을 알게 된 이유는 고한빈 부자가 체포되었다는 공문 때문이었다.곧 그 빌라의 구매 정보와 또 다른 큰 지출들이 줄줄이 발각되었다.끝없이 업로드되는 기사들을 보며 네티즌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세상에, 재벌들은 다 이런가? 재산 분배가 고르지 않아서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재산 분배가 고르지 않다니, 이건 아예 주지 않은 거지.][난 기자회견이 절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데, 정말 열릴 줄은 몰랐어. 사람들이 재벌가 상속권에 이렇게까지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긴 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런데 또 예상 밖이기도 해. 정말 무시무시하네.][내가 기억하기로 저 사람 실력도 있고 수완도 좋은데 명예와 이익 같은 거엔 관심이 없었거든? 고씨 일가 가주가 저 사람에게 제발 상속자가 돼 달라고 애원할지도 몰라.][재벌가 중에 명예와 이익에 관심 없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어제 기자회견 진짜 살벌했지. 고정철은 릴리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비아냥댔는데 릴리가 바로 그래서 재산을 빼돌렸냐고 반박했었잖아.][맞아, 맞아. 나도 그 영상 봤어. 진짜 웃긴 건 고씨 일가가 아직도 여론 조작을 하고 있다는 거야.
“그러면 책임자를 찾아가시든가요! 고승원 씨를 찾아가든, 전 회장님이신 고정남 씨를 찾아가든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저의 손녀딸은 이 일에 대해 책임이 없으니까요.”“어르신, 저희 이사회에서 전에 잘못한 부분은 인정합니다. 아가씨께도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말씀 좀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 급해서요.”“...”눈을 부릅뜬 강철우는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손녀딸이 고성 그룹을 받고 싶어 했기 때문에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지금은 전화 받을 수 없어요. 다쳐서 그러는데 이따 말씀하시죠!”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아예 핸드폰을 꺼버렸다.상대방이 개인 전화번호를 찾아낼 수 있을 정도면 정말 대단했다.핸드폰을 꺼버리자마자 2층에서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강유리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2층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유리야, 이렇게 일찍 깼어?”“네. 고성 그룹 사람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깼어요. 할아버지한테 전화오셨어요?”“정말 급했나 봐. 괜찮아.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지 뭐.”“방금 릴리가 다쳐서 전화 받기 어려워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신 거 맞아요?”강유리가 잠깐 생각하더니 물었다.강철우가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바로 거절할 수는 없잖아. 어차피 릴리도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데.”강유리도 동의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급해 할 필요 없겠네요.”강철우는 이 말에 의문이 가득했다.10분 뒤, 고성 그룹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관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는 병원에서 아가씨께서 무사히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병원 사진까지 첨부되어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했다.사람들은 일제히 신임 집권자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처음부터 릴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도 정정당당하게 프로세스를 따라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남의 재물을 탐내어 목숨까지 해치려고 했던 고한빈은 결국 작전에 실패하고 말았다.아직도 그의 편을 들고 있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게시판에 글이 올라오자 이사회 주주
“우리 헤어지자. 넌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23살 생일날, 케이크 앞에서 올해 천강이랑 결혼하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고난 지 5분도 지나지 않은 강유리가 받은 문자메시지 내용이다.휴대폰을 바라보던 강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3년 동안 롱디라서 많이 섭섭했나? 그게 미안해서 금전적으로 어떻게든 뒷바라지 해줬던 건데. 그리고 그 동안 한 번도 이런 말 한 적 없었잖아.’일방적인 이별 통보였지만 그녀는 그저 오랜 롱디에 지친 남자친구의 귀여운 투정 정도라고 생각했기에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귀국했다.당일 밤 11시.‘내가 자길 위해서 특별히 귀국했다는 걸 알면 아마 깜짝 놀라겠지?’서프라이즈를 제대로 해주기 위해 강유리는 기나긴 채팅기록을 뒤져 언젠가 그가 알려주었던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아냈다.“삑삑, 삐리릭.”문이 열리고...트렁크를 살며시 내려둔 채 살금살금 2층으로 올라가던 강유리는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남자는 첫사랑 절대 못 잊는다던데. 이렇게 쉽게 헤어지는 거야?”“뭐래. 내 첫사랑은 너야. 강유리 걔는... 어디까지나 돈 때문에 좋아하는 척 하는 거였다고. 우리가 애도 아니고. 플라토닉 연애라니. 하여간 더럽게 비싸게 굴어요.”“뭐야. 그럼 스킨십하려고 나랑 만난다는 거야?”“자기도 즐겨놓고 왜 이래. 응?”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점점 야릇하게 변하고...밖에서 이 모든 걸 듣고 있던 강유리는 주먹을 꽉 쥔 채 천천히 방으로 다가갔다.역시나 살짝 열린 문틈으로 서로 뒤엉킨 남녀의 모습이 보이고... 강유리는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냈다.“찰칵.”휴대폰 카메라의 셔터소리에 방금 전까지 서로에게만 빠져있던 임천강, 성신영이 화들짝 놀란다.방 앞에 서 있는 강유리를 발견한 임천강이 일단 급한대로 이불로 비루한 몸뚱어리를 가려본다.“강유리? 네... 네가 어떻게 여길...”떨리는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났다.“그냥... 네가 원하는 게
화풀이를 끝낸 강유리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둘 다 뭘 잘했다고 이렇게 뻔뻔해? 무릎 꿇고 애원하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지금 나만 이 상황 이해 안 가는 거야?”“너...!”“임천강, 나 늙어죽는 한이 있어도 너 같은 애랑 결혼 안 해. 네가 누굴 좋아하든 상관없는데 그럼 적어도 나랑 끝내고 만났어야지. 추잡하게 이게 뭐 하는 거야? 어쨌든... 오늘 이 치욕... 절대 이대로 못 넘어가. 어떻게든 복수할 거니까 두고 봐.”말을 마친 강유리가 자리를 뜨고 분노에 찬 임천강의 절규가 오피스텔을 가득 채웠다.“강유리, 너야말로 두고 봐! 내가 멍청이처럼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한편, 오피스텔을 나서며 분노로 인해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던 강유리가 우뚝 멈춰 섰다.‘아니지. 여긴 내 집이잖아. 왜 내가 나가야 해?’휴대폰을 꺼낸 강유리는 바로 아파트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아, 502호 주인인데요. 3년 동안 집을 비웠더니 모르는 사람들이 무단침입해서 살고 있네요. 경찰에 신고를 하든 뭘 하든 어서 처리해 주세요.”늦은 밤, 강유리의 전화에 벌떡 일어난 관리인은 바로 경비원들과 함께 502호로 달려가기 시작한다...마지막 미션까지 마친 강유리는 트렁크를 끌며 새벽의 거리를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연인의 배신, 슬프다기 보다 짜증이 밀려왔다.그녀와 임천강은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고 수많은 남자들 중 임천강은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한때 열렬하게 그녀를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그런데... 오늘 밤 그녀가 목격했던 추잡한 장면은 지난 3년이란 시간을 그저 웃음거리로 만들었다.‘애초에 날 좋아한 적도 없었잖아. 그냥 내 돈 보고 접근한 거였어?’“나쁜 자식들!”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짜증이 밀려들어 발에 닿는 조약돌을 퍽 차는 강유리다.하지만 다음 순간, 묘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조약돌이 길가에 주차된 차량에 부딪히며 캉 하고 맑은 소리를 낸다.“헉!”가까이 가보니 롤스로이스 한정판.방금 전
한편, 육시준 역시 갑자기 나타나 계약 결혼이네 한달에 천만 원이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강유리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가 손을 내민 곳은 뒤쪽이었다.“자료 좀 주실래요?”어젯밤 차에 남긴 정보에 따라 비서가 이미 강유리의 뒷조사를 완벽히 끝낸 상태.무표정으로 태블릿 PC를 넘기던 육시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1000만원은 너무 적지 않나? 적어도 0 하나는 더 붙여야지. 그래야 육씨 집안 사모님이란 타이틀에 걸맞을 테니까.”목소리에서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강유리는 0 하나는 더 붙여야 한다는 말에 꽂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하이고? 요즘 호스트는 가격 흥정을 이렇게 하나? 하긴, 저 얼굴에 저 분위기에... 부잣집 사모님 한 명 제대로 잡으면 월에 억은 쉽게 받겠어. 하지만...’“5000만원, 이 정도에서 끝내지. 적당히 해.”해외에서 매달 임천강에게 용돈 명목을 부쳐준 돈이 겨우 2000만원 남짓, 강유리가 부자인 건 사실이지만 이런 일로 호구 잡힐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이때, 뭔가 이상함을 느낀 육시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런데... 5000만이든 1억이든 누가 누구한테 주는 거지?”“내가 그쪽을 고용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주는 거지.”이에 육시준은 다시 강유리의 얼굴을 훑어보기 시작했다.얼핏 얼핏 보이는 요염함이 매력적인 정교한 얼굴, 지금까지 그의 돈에 빠져 어떻게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던 여자들과는 달리 자신만만함을 넘어 어딘가 고고하기까지 한 눈빛...‘연기하는 것 같진 않은데...’“좋아.”잠시 후 얘기를 마친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선다.하지만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강유리는 우뚝 멈춰서더니 익숙한 롤스로이스에 시선이 꽂힌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강유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내가 저 차 주인한테 빚을 좀 진 게 있거든.”강유리를 보는 육시준의 눈이 또 묘하게 변하고...비서 역시 상황이 묘하게 변하고 있다 싶지만 육시준의
충격으로 일렁이는 육경서의 눈동자는 제발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고 말해 달라고 호소하는 듯했지만 육시준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비서에게 분부했다.“강유리, 그리고 그 집안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줘요.”3년 동안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다가 귀국하자마자 결혼이라니.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강행하는 걸 보면... 뭐에 쫓기는 듯한데.육시준은 그 답이 그녀의 집안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알겠습니다. 해외 유학생활에 대해서도 알아볼까요?”어제 비서가 급하게 구한 자료에선 그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3년 간 도피 유학을 떠났다는 정보가 전부, 그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적혀있지 않았다.“아니요.”‘그건 그 여자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하지만 육경서는 여전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다.여기 오면서 비서에게 대충 들은 바로는 어제 일부러 육시준 차에 스크래치를 내놓고 오늘 못 알아보는 척 결혼 제안을 한 여자라던데...‘아무리 생각해도 꽃뱀 같단 말이야. 뭔가 냄새가 나... 구린 냄새가...’“형, 그 여자 진짜 형 얼굴 모르는 거 맞아?”서울시에서 한정판 롤스로이스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육시준 한 사람뿐.그의 차가 곧 그의 얼굴이자 이름 같은 존재인데 아무리 갓 귀국했다지만 그걸 못 알아봤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동생의 질문에 잠깐 고민하던 육시준 역시 고개를 저었다.“글쎄..”“그런데 왜...”“내가 알아서 해.”동생의 말을 잘라버린 육시준이 말을 이어갔다.“아, 아주머니한테 내 짐 좀 정리해 달라고 부탁해 줘. 오늘부터 와이프랑 같이 살아야 하니까.”한편, 강유리는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들른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마침 저녁 시간, 문 앞에 차를 댄 강유리는 검은색 철문 옆에 적힌 글씨를 보고 미간을 찌푸린다.“성홍주”강민영이 세상을 뜬 뒤로 성홍주는 강유리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재산을 전부 빼앗은 것도 모자라 첫사랑과 낳은 사생아까지 집안에 들였다.빨리 어른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