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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나 계속 곁에 있어. 침대랑 바닥도 솔직히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으니까, 고개만 돌리면 나 볼 수 있어.”

“같이 있어 줘. 응?”

강지혁은 낮은 소리로 또다시 중얼거렸다. 심지어 그마저도 이 순간 자기의 눈에 갈망이 담겨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윽고 나지막한 말과 함께 베개와 이불을 들고 지혁의 옆에 누웠다.

그렇게 일련의 행동을 끝내고 난 유진은 그제야 자기가 남자랑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자각했다. 정말 뭐에 홀린 게 틀림없다. 하기야, 방금 당장이라도 깨질 수 있는 도자기 인형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자기가 지혁을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침대에 누운 유진은 손을 뻗어 불을 껐다. 그 시각, 유진의 오른손은 이불 아래에서 남자의 손에 꼭 잡혀 있었다.

“만약 또 아프면 나 꼭 불러.”

“응.”

지혁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약 때문인지 지혁은 죽도록 자기를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지금껏 아프기 시작하면 이렇게 빨리 나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눈앞의 여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손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나는 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지?”

“당연하지. 우리 서로 힘이 되어주기로 했잖아. 네가 앞으로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도 계속 같이 있어 줄게.”

아마 그때까지 유진은 계속 누나의 신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이미 혁이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지혁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유진의 목소리는 지혁을 안심시켜 줬고 아픔도 점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결혼이라…… 진애령이 죽은 뒤 결혼은 생각도 한 적 없는데.’

“그 약속 꼭 지킬 거지?”

“응.”

여자의 대답을 다시 한번 듣고 나서야 지혁은 한시름 놓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지혁의 곁에 누워있던 유진도 조심스럽게 지혁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유진이 깨어났을 때 지혁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손을 뻗어 지혁의 이마와 얼굴에 갖다 대보니 땀도 없었고 잠자는 얼굴도 평온한 걸 봐서는 아픔이 가신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진이 손을 떼려고 하는 순간 지혁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물기 촉촉한 예쁜 눈으로 유진을 바라봤다.

“누나…….”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아직 이른 아침이니까 좀 더 자 .”

이것저것 당부하면서 옷을 갈아입고 씻기까지 한 유진은 화장실에서 나와서도 여전히 말을 이어갔다.

“죽 해뒀으니까 일어나서 데워 먹어. 어제 위 때문에 고생했으니, 오늘은 심심하게 먹어야 해. 죽이 위에 좋다니까 꼭 먹고. 참, 위약도 잊지 말고 꼭 챙겨 먹어. 하루 세 번이야. 나갈 때도 잊지 말고 챙겨.”

모든 당부를 끝낸 유진은 그제야 헐레벌떡 집을 나섰다.

작은 방에는 또다시 지혁 혼자만 남게 되었다.

지혁은 상 위에 차려진 죽을 힐끗 보고는 어제 유진이 누웠던 자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진이 누웠던 자리와 이불에는 아직도 유진만의 냄새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왠지 모르게 지혁은 점점 이러한 느낌을 탐하고 싶어졌다…….

--

고이준은 지혁이 저렴한 구형 핸드폰을 꺼내든 걸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무리 봐도 대표님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하필이면 지혁은 이준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며 놀라운 말을 꺼냈다.

“유심카드 하나 만들어. 사용할 거니까.”

그 말에 놀라기도 잠시, 상사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신속하게 유심카드를 만들어 온 이준은 그 유심카드를 강지혁에게 건넸다.

그리고 핸드폰에 유심카드를 끼워 넣은 지혁이 어디론가 문자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서 알람음이 울리는 순간 입가에 미소를 짓는 걸 그는 보고야 말았다. 얼음장 같던 이준의 상사가 글쎄 핸드폰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을 하다니!

이준은 놀란 나머지 눈만 깜빡였다. 이준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대표님이…… 지금 웃은 건가? 방금 받은 문자 때문에?’

핸드폰을 힐끗 훔쳐본 이준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액정에 뜬 상대방의 이름이 글쎄 누나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그 누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머리를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나 마나 유진이겠지.

‘대표님이 임유진 씨랑 문자를 주고받으며 웃고 있는 건가?’

이 사실에 이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대표님 마음속에 유진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

그리고 그날은 이준에게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오후 GH 그룹 임원진 회의에서 모두가 한 직원의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하고 있을 때 지혁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그런데 지혁은 글쎄 아주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싸구려 핸드폰을 꺼내 수신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받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 알았어. 꼭 먹을게. 안 잊었어.”

회의 시간에 전화를 받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이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방과 얘기한다는 사실에 옆에서 지켜보던 임원진들마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지혁은 통화가 끝났는지 핸드폰을 끄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다들 회의 계속해요.”

이 한마디와 함께 그는 서로 멍하니 바라보는 임원진들을 뒤로한 채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지혁의 그림자가 사라진 순간 임원진들의 눈빛은 모두 고이준한테 쏠렸다.

“고 비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강 대표가 아까 받은 전화는 대체…….”

이준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아까 대표님이 전화를 받을 때 이준은 가까이에 앉은지라 대충 핸드폰 너머로 “약 먹어”라고 말하는 소리를 엿들었다.

그 말과 오늘 아침 사무실에서 본 위약을 연계시켜 보면 대표님이 뭐 하러 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많은 임원진 앞에서 “대표님이 전화 받고 약 드시러 갔어요”라는 소리는 차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유진의 전화 한 통에 약을 먹으러 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껏 아프면 아팠지 약은 입에도 대지 않던 사람이었으니까.

“이건 대표님의 사적인 일이니, 의문은 접어두고 다들 회의 계속합시다.”

결국 이준은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유지한 채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

한편, 유진은 핸드폰을 호주머니 안에 넣고는 다시 서미옥과 함께 길가를 빗자루질했다.

그때 마침 미옥이 앞으로 다가오면서 넌지시 물었다.

“아까 누구한테 전화한 거야?”

“제 남동생이요.”

“유진 씨한테 남동생도 있었어? 예전에 그런 말 못 들었는데?”

미옥의 놀란 듯한 모습에 유진은 빙그레 웃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바닥을 쓸고 난 유진과 미옥은 도구를 반납하러 갔다가 소민준과 진세령의 약혼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의 얘기를 엿듣게 되었다. 두 사람의 약혼은 S 시에서 가장 핫한 뉴스거리다.

“혹시 그거 들었어? 소민준이 진세령한테 6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선물했대. 그것도 핑크 다이아몬드를. 듣기로는 몇십억이 넘는대.”

“와, 진세령 정말 부럽네. 자기도 엄친딸인데 남편까지 잘생긴 부자잖아.”

“내 남자친구가 나한테 1캐럿짜리 다이아만 선물했어도 난 바로 결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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