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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자존심과 체면이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이었다.

조민혜는 서둘러 자기를 창피하게 한 이곳을 떠났고 옆에서 보고 있던 민화영도 서둘러 민혜와 함께 떠나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임유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백화점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차를 부수는 장면을 본 것도 모자라 그 차가 민혜의 차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지? 쟤가 누구한테 원한 산 적 있어서 보복당하는 건가?”

“그러게. 그건 모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진을 보며 강지혁의 눈은 반짝거렸다.

“뭐 어찌 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말을 마친 유진은 지혁을 끌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때, 지혁의 발이 순간 멈춰 섰다. 고개를 돌려 봤을 때 지혁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뭔가에 충격을 받은 듯 버스 정류장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 아니야.”

걱정스러운 유진의 말에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하지만…….

‘방금…… 내가 잘못 봤나?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을 그 여자로 보다니. 남편과 자식을 버린 그 여자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

--

“혁아, 넌 절대 나처럼 되지 마.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네 모든 걸 바치면서까지 좋아하지는 마.”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같잖은 거야. 상대가 너한테 마음이 떠나면 네가 무릎을 꿇어도 붙잡을 수 없어.”

“혁아, 너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세상에 누군가가 너의 감정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고 너의 생사까지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그런 감정은 영원히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구야? 누가 자꾸 말하는 거야? 그만 말해. 여기서 떠나! 추워…… 너무 추워…… 여기 있지 마…… 더 있으면…… 얼어 죽을 거야!’

“혁아, 나 갈게. 네 아빠가 말로만 날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해, 네 아빠와 함께라면 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어! 나도 이미 할 도리 다 했어!”

‘이건 또 누구야? 누가 자꾸만 말하는 거야?’

“가지…… 마세요…….”

‘이건 또 누구지? 아, 나잖아. 내가 그 여자한테 빌고 있었던 거야. 저 여자가 가면 아버지는…….’

“가지 마! 가지 마!”

지혁은 상대를 잡으려고 두 손을 허우적댔지만,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는 온통 컴컴했고 물에 빠진 듯 호흡마저 곤란했다.

마치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것 처럼 손을 마구 허우적댔다.

그러던 그때, 손에 갑자기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지더니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혁아, 나 어디도 안가. 무서워하지 마!”

‘이건…… 누나? 유진이 누나? ’

지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지혁의 눈에는 청초하고 예쁘장한 얼굴이 들어왔다. 초조함 가득한 예쁜 두 눈, 뻐금거리는 빨간 입술, 마치 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 이 여자가 나한테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구나!’

한편, 지혁이 깨어난 걸 본 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혁아, 정신이 들어? 악몽이라도 꿨어?”

지혁은 탁한 숨을 내뱉었다. 이런 꿈을 꾼 것도 참 오랜만이다. 가차 없이 아버지와 지혁을 버리고 가던 그 여자의 모습, 상대가 떠나가는 걸 알면서도 떠나지 말라 붙잡지 않는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에는 우는 것보다도 슬퍼 보이는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응, 악몽 꿨어.”

곧이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지혁의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그리고 지혁은 그제야 자기가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상대의 손을 꽉 잡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꿈에 있을 때, 마치 곧 익사할 것 같다는 생각에 지푸라기를 잡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게 이 여자 손이었어?’

지금껏 지혁이 누군가를 지푸라기처럼, 생명줄처럼 여겼던 적이 있었던가?

순간 드는 생각에 지혁은 갑자기 손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손에 전해지던 온기가 사라지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허리를 숙여 배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한시름 놓았던 마음이 다시 철렁했다.

“어디 아파?”

“아니야.”

지혁은 뭔가 참고 있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위경련이 온 것 같아. 조금만 지나면 돼.”

‘악몽 때문인가?’

솔직히 어릴 때 지혁은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위경련을 자주 겪었다. 하지만 근 몇 년 동안은 괜찮았었는데.

유진은 창백하게 질린 지혁의 얼굴을 보더니 이마를 덮고 있는 앞머리를 헤집어 확인했다. 이미 송골송골 맺힌 땀은 머리 한 층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이에 유진은 따뜻한 물을 컵에 따라 가져 오더니 지혁을 부축해 앉게 했다.

지혁은 억지로 따뜻한 물 몇 모금을 마시더니 입을 꾹 다물었지만, 잇새 사이로 이따금 까득까득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혼신을 다해서 고통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기다려!”

유진은 걱정되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나서기 전 이불로 지혁을 꽁꽁 감싸줬다. 추위라도 타면 배가 더 아플까 걱정돼서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점점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지혁 혼자만 남게 된 방은 그 시각 유독 조용했다.

지혁은 여전히 눈을 감고 몸을 괴롭히는 고통이 언젠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혼자인 건 늘 익숙했잖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본가에 오게 됐을 때, 집에는 물론 할아버지도 수많은 고용인들도 있었지만, 그는 늘 혼자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문소리가 들려오더니 익숙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와 가쁜 숨소리가 작은 방을 메웠다.

“혁아, 내가 약 사왔으니까 얼른 먹어. 약 먹고 조금 쉬면 안 아플 거야.”

눈을 떠보니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달려왔는지 헝클어진 머리를 한 익숙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유진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예쁘장한 얼굴, 작고 정교한 코, 붉은 입술, 분명 유진보다 더 예쁘고 외모가 출중한 여자는 수도 없이 봐왔지만, 그 순간만큼 왠지 모르게 유진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치 혼자만 있던 자기의 세상에서 처음 다른 누군가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

유진은 따뜻한 물을 들고 오더니 설명서에서 쓰여 있는 대로 약 두 알을 꺼내 조심스럽게 지혁에게 먹였다. 그러고는 이내 수건을 가져와 땀으로 흥건해진 지혁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아직도 아프면 눈 좀 붙여. 오늘은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침대는 네가 써.”

유진은 말하면서 지혁을 침대에 눕히고 돌아섰다. 하지만 유진이 떠나려고 하는 순간 지혁의 손이 갑자기 유진을 붙잡았다.

“왜 그래? 아직도 많이 아파?”

고개를 돌린 유진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약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지혁은 그제야 자기가 상대의 손을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솔직히 그 동작은 무의식적으로 나온 거였다. 그렇게 잡지 않으면 상대가 자기 곁을 떠날까 봐.

그리고 한참 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가…… 내 곁에 있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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