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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이런 것도 충분히 좋아!”

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을 끊고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핸드폰을 골랐다.

하지만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유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구야? 유진이 아니야?”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민화영과 웬 여자 하나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 역시 쇼핑하러 온 듯했다.

하지만 그 둘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유진은 그제야 다른 한 사람도 유진의 고등학교 동창 조민혜라는 걸 발견했다.

“여기에서 널 다 만나다니, 우리도 참 인연이네. 이 사람이 혹시 네 남자친구야?”

화영은 유진 옆에 서 있는 지혁을 위아래로 집요하게 훑어보았다.

하지만 유진이 대답도 하기 전에 민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얘, 화영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유진이 남자친구는 어느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들었는데 이 꼬라지가 어딜 봐서 부잣집 도련님이야? 다 시장바닥에서 산 옷들이고만!”

말하면서 눈썹을 치켜뜨는 민혜의 얼굴에는 비아냥과 경멸의 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참, 미안해. 네 남자친구가 새 여친 사귀었다는 거 깜빡했네. 이제 곧 약혼도 한다지? 요 며칠 소씨 가문 도련님과 진씨 가문 아가씨가 약혼하는 뉴스로 사이트가 도배됐더라고! 하긴, 역시 어울리는 건 그 두 사람이긴 하지. 그건 그렇고, 네 새 남자친구는 네가 길바닥에서 청소하는 거 알아?”

“민혜야, 뭐 하러 그런 말을 해?”

“내가 뭐 틀린 말한 것도 아니고. 네가 말했잖아. 얘 환경위생과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한다고!”

자기를 막는듯한 화영의 말투에 민혜는 오히려 더 거만한 태도로 받아쳤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유진에게 인기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대학에 가서도 유진이 민준의 여자친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민혜는 유진을 향한 질투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왜 모든 행운이 유진한테만 가는지도 민혜로서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민준은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고 유진은 길바닥에서 청소나 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모른다.

눈앞의 두 사람이 일부러 자기를 모욕하려 한다는 걸 알아챈 유진은 아예 두 사람을 무시했다. 그러지 않으면 두 사람은 더 날뛸 게 뻔했다.

“혁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

“이게 괜찮아 보이네.”

지혁이 여러 모델 중 하나를 고르자 유진은 점원에게 구매 의사를 밝히고 돈을 지불했다.

“내일 핸드폰 번호도 만들어야 해. 그래야 쓸 수 있거든.”

“그래. 내일 내가 직접 통신사에 가서 번호 하나 만들게.”

두 사람은 화영과 민혜를 아예 공기 취급하며 자신들만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화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민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분명 자기가 유진을 모욕하고 있는데 오히려 자기가 모욕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민혜는 유진이 핸드폰을 골라 계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뭐야? 핸드폰 하나 사는 것도 네가 계산해야 하는 거야? 뭐 스폰서라도 하는 거야? 길바닥이나 청소하는 주제에 욕심은. 그런데 핸드폰은 뭐 이런 싸구려를 사는 거야? 아참, 환경미화원이라서 돈이 없겠네.”

하지만 민혜의 눈빛은 말하는 내내 계속 지혁을 힐끔거렸다.

민혜가 볼 때도 지혁은 참 잘생긴 얼굴이었다. 물론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는 있지만 이목구비가 정교하고 언뜻언뜻 보이는 눈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이에 민혜는 참지 못하고 지혁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쟤가 뭐가 좋다고 사귀어요? 차라리 헤어지는 게 어때요? 여기에서 지금 당장 얘랑 헤어지시면 제가 비싼 핸드폰 선물할게요. 여기 있는 모델 중 아무거나 골라도 돼요.”

민혜의 집은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명문가나 재벌가처럼 부자는 아니지만 일반 가정보다는 훨씬 잘 사는 축에 속한다.

하지만 민혜의 말에 지혁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민혜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지혁의 모습에 민혜는 자기의 설득이 상대를 흔들어 놓았다고 자신하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어때요? 쟤랑 헤어지고 저랑 친구 하면 제가 새로 뽑은 BMW로 드라이브도 시켜줄게요. 원한다면 연예계 친구들도 소개해 줄 수 있고요. 이렇게 좋은 조건을 가졌으면서 연예인 하지 않는 게 아까워서 그래요.”

말하면 말할수록 민혜는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웬걸?

“저 연예인에 관심 없어요. 그리고 BMW는 그쪽 혼자서 잘 타요.”

잇따라 들려오는 지혁의 거절은 민혜의 자존을 완전히 바닥으로 내던져 버렸다.

“나 누군지 알아요? 내가 그쪽…….”

“그쪽이 뭐? 날 어쩔 건데?”

말을 뱉으며 싸늘하게 본인을 훑는 지혁의 눈빛에 민혜는 순간 머리가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혁은 민혜를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유진이 계산을 마친 걸 확인하더니 새로 구매한 핸드폰을 들고 함께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렇게 그들이 떠나간 뒤, 화영은 넋이 나간 민혜를 가볍게 당겼다.

“민혜야, 너 괜찮아?”

“괜찮아!”

이를 악물며 대답한 민혜는 애써 화를 삭였다. 무엇보다 남자의 눈빛을 보는 순간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를 나락으로 처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먹었다는 게 자존심 상하고 분했다.

겉모습으로만 보면 그저 허름한 옷을 입은 백수일 뿐인데 말이다.

화영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민혜를 끌고 계속 쇼핑을 즐기다 대충 음식을 먹고는 백화점의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민혜의 핸드폰에 갑자기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그리고 그 시각,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하나가 민혜 앞으로 다가와 부드러운 태도로 말을 건넸다.

“조민혜 씨 되시죠? 방금 1억 3천만 원을 송금해 드렸는데 한번 확인해 보시죠. 중고차의 가격입니다.”

남자의 뜬금없는 말에 조민혜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때마침 핸드폰 알람음이 울리더니 그녀의 1억3천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문자가 들어왔고, 그걸 확인되자 남자는 돌아서서 손을 들어 부하들에게 뭔가 알 수 없는 사인을 보냈다.

남자가 손을 들기 무섭게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손에 망치를 들고 민혜의 BMW를 세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수간 민혜와 화영은 아연실색했다. 심지어 민혜는 급한 마음에 크게 비명을 지르기까지 했다.

“당신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나 당신들 신고할 거야!”

“조민혜 씨, 방금 돈도 받았으니 이 차는 이제 조민혜 씨의 차가 아닙니다. 그러니 저희가 부숴버리든 팔아치우든 다 저희 마음입니다.”

“아니야! 나는 차 판 적 없어! 그러니 당신들이 내 차 마음대로 부수면 안 돼!”

민혜는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그들은 민혜의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자신들이 하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뒤, 번쩍거리던 차는 폐차 직전의 차처 허름한 모습으로 변했다.

“당신들…… 당신들…….”

화가 나서 손을 부들부들 떠는 바람에 민혜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경찰에 신고하고 싶으면 하셔도 좋습니다. 저희는 이미 거래 내역을 확보했으니까요. 저희 대표님께서 조민혜의 차가 눈에 거슬린다고 하니 별수 있겠습니까? 번거롭겠지만 저희 대표님 눈에 거슬리지 않는 차로 다시 장만하십시오. 또 같은 꼴 당하기 싫으면.”

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부하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시각, 주위에는 어느새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었다.

게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유진과 혁이라는 남자가 보고 있는 걸 발견한 민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방금 자기의 새 차를 자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눈 깜짝하는 순간 새 차가 쓰레기로 되어버리는 걸 눈앞에서 보여줬으니 체면이 남아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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