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인은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났다. 수현이 윤아를 데리고 나가서 먹겠다는 게 진짜 나가서 뭘 먹으려는 게 아니라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두 사람의 호사를 그르칠 뻔했다는 생각에 이명인은 얼른 난감한 표정으로 만회할 길을 찾았다.“사실 내가 나가서 먹는 걸 반대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 전에 우연히 그 가게를 지나치는데 그 장씨 할아버지가 먹다 남은 찌꺼기를 정리하더니 자기 손주 엉덩이를 닦아주러 가는 거야. 와서는 손도 잘 안 씻고 밥하는 걸 본 적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밥상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아 그냥 가지 말라고만 했지. 산책... 하고 싶은 거면 갔다 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너희 할아버지한테 말하면 돼. 그럼 산책 갔다 오면 바로 먹을 수 있지 않겠어?”이명인이 자기 때문에 딱딱해진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노력을 다들 보았다. 윤아도 눈치 빠르게 얼른 맞장구를 쳤다.“좋아요. 할머님이 말씀해 줘서 다행이에요. 아니면 먹고 배탈 나서 고생할 뻔했네요.”이렇게 말하며 윤아는 테이블 아래로 수현의 옷깃을 다시 한번 힘껏 당겼다.수현은 그제야 이명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윤아 말이 맞아요. 고마워요 할머니.”“그럼 우린 나가서 좀 걸을게요. 저녁이라 공기도 꽤 좋을 것 같은데.”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윤도 따라서 일어나려는데 옆에 있던 이명인이 이를 막았다.“조금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일손 거들어야지?”두 녀석은 눈을 끔뻑거리더니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수현과 윤아는 겨우 정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조금 지체하는 사이 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집마다 불을 켜고 있었다. 윤아는 약간은 난감한 표정으로 수현에게 물었다.“너 아까 태도가 왜 그래?”“태도가 왜?”수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되물었다. 마치 자기 태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태도가 안 좋았어. 할머님 그래도 어른인데 그렇게 입 꾹 다물고 있으면 안 되지.”이에 수현이 가볍게 웃었다.“입 꾹
이렇게 말하면 결국 윤아를 위한 것이다.“그럼 내가 좋아서 좋은 줄 몰랐던 건가?”“아니야.”아직 눈치가 남아있는 수현이 얼른 부정했다.“나도 네 생각, 너도 내 생각, 우리가 서로서로를 생각해 주는데, 내가 그것도 몰라줄까 봐?”윤아가 고개를 저었다.“나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어. 난 그냥 네가 할머님한테 안 좋은 인상을 남기거나 노인네 화나게 하면 어쩌나 했지. 나이도 많으신데.”“그래, 네 말에도 일리 있어. 다음부터 주의할게.”바로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와 그녀의 화를 풀어주는 모습에 조금 언짢았던 윤아의 마음도 바로 사그라들었다.“알면 됐어.”수현이 낮은 소리로 웃으며 그녀를 데리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우리 전에도 이렇게 산책한 적 있어?”윤아의 질문에 수현이 고민에 잠겼다. 수현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윤아가 수현을 바라봤다.“우리 만난 지 꽤 되는데 이렇게 나와서 산책한 적이 없다고?”윤아는 일반적인 부부라면 산책은 제일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했었지.”수현이 입을 열었다.“근데 아마 되게 오래전일걸. 우리 어릴 때.”그때 윤아는 낮이든 밤이든 막론하고 수현의 뒤를 따라다녔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도 일종의 산책이다.“어릴 때?”윤아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은 욕구가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수현이 과거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응.”“우리 어릴 때 또 무슨 일들이 있었어? 혹시 얘기해줄 수 있어?”수현이 윤아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당연하지.”그렇게 두 사람은 조용한 시골길을 걸었다. 수현이 옛날얘기를 해주는 걸 윤아는 조용히 들으면서 가끔 몇 마디 질문하곤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수현이 걸음이 우뚝 멈췄다. 윤아는 수현이 그 자리에 멈춰서자 이렇게 물었다.“왜 그래?”수현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아니야.”수현의 목소리는 마치 뭔가 참고 있는 듯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윤아가 원인을 추측하고 있다가 이내 여기로 온 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수현이 미간을 찌푸렸다.“네 걱정은 안 해?”이 말에 윤아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난 그것보다 네가 더 걱정돼.”이 말에 수현이 멈칫했다.“뭐라고?”“미안해.”윤아가 죄책감에 찬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여기 오고 나서 네가 다쳤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아이들만 신경 쓰느라 수현은 아예 뒷전이었다.만약 윤아가 수현이었다면 많이 서운했을지도 모른다.윤아가 이 일로 사과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수현이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고작 이걸로? 난 무슨 큰일인 줄 알았네.”이 말에 윤아의 미간도 따라서 찌푸려졌다.“많이 다쳤는데 큰일이 아니라니. 이제 돌아가자. 상처 처치 다시 해야지.”이렇게 말한 윤아는 문득 뭐가 생각난 듯 이렇게 물었다.“아참, 상처에 바를 약은 가져왔어?”걱정에 찬 윤아의 표정에 수현도 더는 그녀를 걱정시키기 싫어 이렇게 대답했다.“가져왔지. 트렁크에 있어. 내가 이따가 직접 하면 돼.”“잘할 수 있겠어?”윤아는 수현에게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지금 바로 돌아가자. 내가 처치해 줄게.”수현이 입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아는 수현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난감한 수현의 표정을 보고 윤아가 이렇게 말했다.“어차피 네가 있는데 뭐. 혹시나 내 입에 안 맞는 음식 올라오면 다 너 주면 되지. 안 그래?”수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윤아는 하는 수 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됐어. 사실 나도 뭐 좀 먹고 싶어서 그래. 이렇게 말랐으니 나도 많이 먹어야 할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양 조절 알아서 잘할게. 더는 못 먹겠다 싶으면 억지로 먹지는 않을 거야.”윤아는 수현이 지금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는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그녀가 어른들 앞에서 억지로 먹고 싶지 않은 것들을 먹을까 봐 걱정해서였다.아니나 다를까 윤아가 부드럽게 타이르자 수현도 조금 동한 것 같았다.하지만 수현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선 채 뭔가 내키지
돌아가는 길에도 수현은 윤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아직 윤아의 걸음은 살짝 붕 뜬 상태였다.분명 조금 전까지 분위기가 끈적했고 윤아에게 그런 이상한 말을 하던 수현이었는데 말이다.하여 윤아는 정말 뭔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수현은 그저 그녀의 이마에 뽀뽀만 하고는 그녀를 데리고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윤아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비록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허전했다.윤아는 가슴 쪽을 문지르며 그런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왜 그래?”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슴 쪽이 아파?”이에 정신을 차린 윤아가 켕기는 게 있는 듯한 표정으로 수현의 걱정에 찬 눈빛을 피하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니.”분명 뭔가 피하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윤아가 말하지 않으니 수현도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보기에 별문제 없어 보이고 정신도 멀쩡해 보이니 수현은 더 묻지 않았다.집에 들어왔을 땐 마침 8시 좌우였다.차문섭은 돌아온 두 사람을 보고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산책 잘하고 왔어? 어때? 시골은 처음이라 아직 낯설지?”“아니요, 시골이라 공기도 좋고 좋았어요.”차문섭이 껄껄 웃었다.“다행이네. 잘 때 모기장은 절대 열어두면 안 돼. 그러다 모기 들어온다.”“네, 알겠습니다.”“아참, 너희 할머니가 그러는데 오늘은 너무 늦어서 남은 식자재는 내일 요리할 거란다. 너무 늦게 먹으면 소화에도 안 좋고 잠도 잘 안 오잖니.”윤아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정리하고 자. 내일 아침에 시장에 나갈 건데 같이 나가서 구경하면 좋을 것 같은데.”윤아와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방에 돌아온 윤아가 이렇게 말했다.“미리 들어오자고 한 거 정말 잘한 일인 거 같아.”“그러게.”수현은 윤아가 기뻐하자 자기도 모르게 윤아의 뽀얀 얼굴을 꼬집었다. 하지만 손에서 전해지는 촉감에 약간 마음이 아팠다. 전에 윤아의 얼굴을 꼬집어보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때는 그래도 말캉한 촉감이었
하지만 커다란 키에 다리까지 긴 수현이 있으니 혼자 누워도 거의 침대 하나를 점할 판인데 아이들이 누울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그러니 아이들을 데려와 같이 잔다는 꿈은 깨진 거나 마찬가지였다.“됐어. 일단은 생각하지 말아야지.”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상처부터 확인하자. 약 어디 넣어놨어?”윤아는 이렇게 말하더니 수현의 트렁크를 뒤지려 했다.“내가 할게.”수현은 트렁크를 내리더니 안에서 약과 붕대를 꺼냈다.이를 본 윤아가 얼른 그것들을 받아오더니 침대로 걸어가며 말했다.“여기서 바꿀 거지?”수현은 옆에 놓인 소파를 힐끔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침대로 가서 앉았다.입고 있던 코트는 이미 벗었고 지금은 회색의 니트에 안에 하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일단 니트 먼저 벗을래? 할 수 있겠어?”“응.”수현은 대수롭지 않게 니트를 벗어던졌다. 깔끔한 동작이 마치 다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회색 니트를 벗어던지자 보이는 하얀 셔츠에 피가 새어 나오지만 않았으면 윤아는 수현이 다치지 않은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윤아는 새어 나온 피를 보며 오는 내내 아무렇지 않은 듯한 수현의 모습이 사실은 그가 억지로 버티고 있어서 그런 것임을 깨달았다.피를 봐서 그런지 윤아가 수현을 바라봤을 땐 얼굴이 어딘가 창백해 보였다.윤아는 꼼꼼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생각났다면 더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빨리 치료하고 쉬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윤아의 행동도 다소 과격해졌다. 허리를 숙이자마자 수현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열심히 단추를 푸는 윤아는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단추를 풀 때 수현이 어떤 표정인지도 확인하지 못했다.재빨리 단추를 풀어낸 윤아는 얼른 수현의 셔츠를 벗겼다.셔츠를 벗겨낸 후에 보이는 붕대에 윤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윤아가 단추를 풀 때 부드럽고 섬세한 손길에 살짝 타올랐던 수현의 욕망이 걱정에 찬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윤아를 보자마자 말끔하게 사라졌다.“
윤아는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말 좀 그만하면 안 돼?”울먹거리는 윤아의 말투에 수현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윤아의 눈시울은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순간 수현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왜 그래? 혹시 내가 말 잘못 했어?”“화내지 마.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할게. 응?”하지만 이 말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윤아의 눈물은 마치 줄 끊어진 구슬처럼 주르륵 아래로 흘러내렸다.수현은 윤아의 눈물에 허둥지둥 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윤아야...”그러다 결국 윤아를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았다.하지만 윤아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수현을 바라봤다.“너 지금 몸에 상처가 두 개나 있어. 하나는 예전에 난 상처, 다른 하나는 새로 난 상처. 새로 난 상처가 이렇게 심한데 넌 어떻게 아프단 소리 하나 없어. 그리고 지금은...”지금도 오히려 그녀를 위로하는 수현이었다. 마치 다친 사람이 윤아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이 말에 수현은 왜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지 알게 되었다. 혹시나 자기가 말을 잘못해서 윤아가 상처라도 받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를 걱정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윤아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주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친 건 분명 수현인데 눈물은 왜 자기가 흘리고 있지?윤아가 울면 수현은 당황할 테고 그렇게 그녀를 위로하다 보면 상처를 처리할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바로 눈물을 닦아내더니 수현을 침대에 눌러 앉히고는 상처에 바를 약을 가져왔다.윤아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생각하던 수현은 조금 전까지 눈물을 펑펑 흘리던 윤아가 갑자기 그의 어깨를 눌러 침대에 앉히고는 약을 가지러 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그를 등지고 있는 윤아는 아직도 눈물을 훔쳤다. 그래도 얼른 눈물을 말끔히 닦아내고 필요한 약들을 챙겨 다시 수현에게로 돌아왔다.그땐 이미 눈물을 말끔하게 닦아낸 뒤였다. 표정도 다시 차분해졌고 아까 울면서 보여줬던 무력감과 억울
이렇게 생각한 수현이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너 왜 그래?”윤아는 수현을 상대할 겨를이 없어 그저 고개만 저으며 수현의 상처를 계속 치료해줬다.손이 빠른 윤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로 상처를 감싸주었다.치료하면서 수현은 윤아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저 윤아가 손을 들라고 하면 들고 내리라면 내리고 붕대의 한쪽을 잡으라고 하면 고분고분 다 들어줬다. 회사를 관리할 땐 피도 눈물도 없던 그가 지금은 길든 사자처럼 머리는 고귀하게 들고 있어도 눈빛은 부드럽게 윤아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다.윤아가 상처 치료를 끝내고 다 됐다고 말하고는 몸을 돌려 물건을 정리했다.수현은 윤아가 허리를 숙이고 정리하는 모습에 입술을 앙다물더니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일단 그렇게 놓아둬. 너도 가서 샤워해야지.”윤아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수현은 어쩔 수 없이 자세를 숙이고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윤아야!”수현의 말과 행동에 힘이 들어갔다. 뿌리치다가 실패한 윤아는 그저 기나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알았어. 일단 이거 놔. 지금 가서 씻을게.”“조금 전까지 괜찮았잖아. 지금은 왜 이래?”아까 상처를 치료해 줄 때까지만 해도 수현을 걱정하던 윤아가 지금은 오히려 수현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했다.“아무것도 아니야.”윤아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자. 난 이만 샤워하러.”윤아는 이렇게 말하더니 옷가지를 챙겨 욕실로 향했다.문을 닫으려는데 수현이 따라왔다.윤아는 멈칫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문을 닫으며 수현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데 수현의 손이 욕실 문을 막았다.“너…”이런 광경에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나 샤워할 거야. 무슨 할 말 있어?”“너 이상해. 그건 얘기해줘야지.”“아니야.”윤아가 일단 부정했다.“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조금 전까지 울던 애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상처 치료해 주고, 그 감정들은 다 어디 갔어?”만약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봤다. 혹시나 그녀에게 말하지 않아서 화난 건 아닐지 하는 생각 말이다.또 혹시나 말을 잘못해서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진 건 아닌지도 말이다.하지만 윤아가 자책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다시금 붉어지는 윤아의 눈가와 억지로 눈물을 참는 듯한 모습에 수현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수현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얼른 그녀를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바보야, 왜 자책하고 그래.”윤아는 수현의 품에 기댄 채 가볍게 눈을 깜빡거렸다.“이제 얘기도 했으니 혼자 있게 좀 내버려둘래?”수현이 잠깐 망설였다.놓아주기 싫은 건 맞지만 윤아는 지금 절박하게 혼자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수현이 계속 남아있겠다고 한다면 윤아가 불편해할 수도 있다.샤워하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다시 얘기해도 좋을 것 같았다.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윤아를 풀어줬다.“그래, 일단 샤워해. 침대에서 기다릴게.”“…”진지한 분위기에 윤아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수현이 갑자기 침대에서 기다린다고 말했다.별 뜻 없이 한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윤아의 생각은 자꾸만 다른 데로 샜다.윤아는 수현을 밀쳐내더니 얼른 나가라고 했다.수현은 당연히 윤아가 다른 뜻으로 이해한 줄 몰랐으니 자기가 한 말에 문제가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고분고분 윤아의 말에 따라 욕실에서 나왔다.수현이 가고 나서야 윤아는 욕실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윤아는 문에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드디어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었다.기억을 잃고 수현의 곁으로 돌아오기까지 모든 게 낯설긴 했지만 그래도 윤아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현의 곁에 있는 게 좋았지만 같이 지내려면 다른 스킬이 필요한 것 같았다.스킬이 아예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냥 요즘 이런저런 일이 너무 많아서 윤아의 마음이 착잡해져서 그런 걸 수도 있다.…윤아가 샤워하고 나왔을 땐 이미 반 시간쯤 뒤였다.그 반 시간 동안 수현은 쭉 침대에서 그녀를 기다렸다.처음엔 얌전하게 앉아서 기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