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아니면 사실 소영 씨도 수현 씨를 못 믿는 건가요?”윤아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저도 걱정을 안 하는데 소영 씨는 뭐가 그렇게 걱정인 거죠?”소영이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를 않자 윤아가 말을 이었다.“걱정 마요. 며칠 뒤면 할머님 수술도 끝나니까 조금만 참으면 소영 씨 뜻대로 될 거예요. 할머님 수술만 잘 되면 전 이곳을 떠나 5년 동안은 안 돌아올 거니까.”윤아의 말에 소영은 그제야 점차 이성을 찾았다.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이야 어떻든 며칠 후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것이다. 윤아와 수현의 말 같지도 않은 이 사이도. 그때가 되면 소영은 더는 지금처럼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될 것이다.“그래요. 일단은 윤아 씨를 믿어볼게요. 그때 가서도 한 말은 지켜요.”소영이 떠나자 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윤아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아랫배를 가볍게 쓸었다.“아가야. 다 잘되길 기도해줘. 그때가 되면 엄마가 우리 아가 데리고 할아버지가 계시는 해외로 가서 살 거야. 할아버지도 분명 널 아주 좋아하실 거야.”아버지 얘기에 윤아는 얼마 전 그와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소영과 카페에서 만났던 그 날 이후에 심인철은 윤아에게 다시 전화했었다. 하지만 일이 바쁜 탓인지 통화 중에도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윤아는 아버지가 정신없이 바빠 보여 그 사실을 먼저 알리지 않았다. 결국 그저 짧은 몇 마디를 끝으로 통화를 끝났다._김선월의 수술 전날은 마침 주말이라 윤아는 수현과 함께 온종일 요양원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윤아는 행여나 할머님이 수술 때문에 긴장하실까 봐 일부러 재밌어 보이는 장난감도 이것저것 사다 드리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진상 고객들을 만났던 일들을 해주며 긴장을 풀어드렸다. 선월은 윤아의 이야기에 어느새 함박웃음을 터뜨렸다.수현은 그저 옆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월과 윤아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무표정이던 그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옮아 은은한 미소로 번졌다. 모든 것이 순조
"알겠어."윤아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아입을 옷을 챙기러 가려 할 때 잠시 고민하더니 머리를 돌려 물었다."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이미 외투를 벗은 채 넥타이를 풀려고 하던 수현이 이 말을 듣자,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말해봐.""내일 이혼 신고는 언제 하러 가? 할머님께서 수술하시기 전에? 아니면 수술 끝마치신 다음에?"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아는 수현 주위의 공기가 순간 차가워진 것을 느꼈다. 이어서 수현은 사나운 눈길로 윤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이 눈빛...윤아는 수현의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절대 적절하지 않음을 느꼈다.할머님께서 내일이면 곧 수술하실 텐데, 수현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생각을 정리한 윤아는 수현에게 사과했다."미안해. 내가 지금 이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닌데. 생각이 짧았어. 할머님께서 수술 끝마치신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수현 씨도 얼른 가서 쉬어."이렇게 말한 윤아는 몸을 돌려 옷을 챙기러 가려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수현이 갑자기 성큼성큼 걷더니 윤아의 앞길을 막고는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일 그렇게 이혼하고 싶어?""아니, 난 그게 아니라...""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수현의 이 말을 들은 윤아는 멈칫하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수현의 목소리와 눈빛은 눈서리가 몰아치는 시커먼 밤보다 더 차가웠고 더 추워 보였다."내일 구청이 문을 열자마자 가는 거야."말을 마치고 수현은 더는 그녀와 대치하지 않고 몸을 돌려 욕실에 들어갔다."..."'나더러 먼저 씻으라고 했으면서!'펑!욕실 문이 사정없이 닫기면서 큰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윤아는 눈을 내리깔며 제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서랍에서 혼인 관계 증명서와 이혼 신고서를 꺼냈다. 그녀는 이 두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머리를 들었다. 시선이 마침 벽에 걸려있는 결혼사진에 닿았다. 액자는 등불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평소 떠올리지 않으니 때로는 맑은 정신으로, 또 때로는 흐릿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순간들을 머리 속에 재현할수록 그 무심코 한 스킨십이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사정없이 베고 있었다.윤아는 온몸에 힘을 잃은 듯 벽에 스르륵 기대어 앉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조금,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이토록 절망스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윤아가 마음을 정리하고 서류를 서랍에 다시 넣으려던 순간, 샤워를 마친 수현이 굳은 얼굴로 욕실에서 나왔다. 수현은 그녀의 곁을 지날 때 마침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두 장의 서류를 발견했다. 눈썰미가 좋은 그는 첫눈에 알아챘다. 혼인 관계 증명서와 이혼 신고서란 것을.수현의 표정은 더 굳어졌다. 그는 우뚝 멈춰선 채 싸늘한 시선으로 윤아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그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정말 급하네, 심윤아.”윤아는 멈칫했다. 얇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뭐라도 말하려고 했으나 결국엔 손에 들고 있던 두 장의 서류를 꼭 쥔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뭘 말해야 할까.할 말이 없었고 더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이혼 얘기는 그가 꺼낸 것이고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도 그의 생명의 은인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의 생명의 은인에게 진 신세를 갚는 중이었다.그냥 이대로 내버려둬야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더는 미련도 없었다. 이미 이년 동안이나 그와 함께 생활하며 그를 품었으니까. 그러니 앞으로의 삶을 살아 나가면서 이 이년이란 시간을 평생을 두고 떠올리고 회상하며 아끼리라. “내일이면 할머니께서 수술 마치셔. 그니까 더는 연기할 필요 없어. 난 오늘 서재에서 잘게.”결국 수현은 이 한마디를 남긴 뒤, 베개를 가지고 방을 나갔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윤아도 서류를 서랍에 도로 넣고 갈아입을 옷을 챙긴 뒤 욕실로 들어갔다.-이튿날.윤아는 핸드폰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그녀는 눈을 비비며 알람을 끄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어젯밤,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고 할 수
집사: “...”사실 그는 수현과 윤아 사이의 이상한 낌새를 살짝 눈치챘다. 그리고 어젯밤, 수현이 서재에서 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서재 불이 켜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들어가 보니 수현이 안에 앉아있었다.그의 눈 밑은 퀭했고 얼굴색도 여간 나쁜 게 아니었다. 수현은 잠긴 목소리로 집사에게 물었다.“뭐합니까?”집사는 순간 수현의 모습에 놀라 아무 말도 못 했다.결국 수현은 아침도 먹지 않고 굳은 얼굴로 주차장에 갔다. 그리고 지금 밖에 나가려는 윤아를 보며 집사는 속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시간이 아직 일렀기 때문에 바깥 기온은 제법 낮았고 주차장은 더 추웠다.그런데 이렇게 추운 곳에 있으면서 수현은 그저 얇은 셔츠 한 장만 달랑 입고 있으면서 담배를 손에 들고는 차에 기대어 서있었다.가까이하고 보니 수현과 그녀의 상태는 정반대였다.두 사람 다 잠을 설치긴 했지만 이미 화장한 윤아와 비교했을 때 수현은 더 초췌해 보였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수현은 머리를 들었다. 그는 윤아의 좋은 상태를 보자 얼굴색이 더 어두워졌다.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어젯밤 잘 잤어?”수현이 입을 열자마자 윤아는 그의 목소리가 많이 쉬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응, 잘 잤어. 수현 씨는?”수현은 담뱃불을 끄고는 시커먼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나도 잘 잤어.”“그럼 됐네.”윤아는 수현의 눈에 가득한 핏발과 눈 주위의 다크서클을 보며 생각했다. 모양새가 초라하다고. 화장하고 안경까지 쓰기를 잘했다고.두 사람 사이에는 또 침묵이 흘렀다.수현은 차에 기대어 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운전할 생각도 없는 듯, 그저 굳은 얼굴로 윤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날카로운지라 윤아는 조금 불편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이제 갈까?”수현은 되물었다.“그렇게 급해?”“그저 그래. 수현 씨가 급해할까 봐.”수현은 이
구청에 사람은 너무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중에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어젯밤 잠을 설친 바람에 몸이 힘든 윤아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수현도 그녀의 뒤를 따라 흙빛이 된 얼굴로 윤아의 옆자리에 서 있었는데 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구청에 들어오긴 했지만, 윤아의 마음은 꽤 평온했다.그녀는 머리를 돌려 수현을 한눈 보고는 입을 열었다.“수현 씨는 안 앉아?”“난 됐어.”수현은 차갑다 못해 조금의 온도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답하고는 윤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윤아는 금세 알아챘다. 수현이 자신을 상대하기 귀찮아한다는 것을.하긴, 곧 이혼하고 소영과 일생을 기약할 텐데 자신과 상대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다행이었다. 애초부터 이혼한 다음 친구로 지내기를 바라지 않아서 말이다.처음에는 괜찮았지만 두 사람이 붙어있은 시간이 오랄 수록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많아졌다.“이 분위기... 설마 이혼하러 왔나?”“이혼? 에이, 아닐 거야. 이 둘이 이혼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훈남 훈녀가 따로 없는데, 뭔 이혼이야.”“이해할 수가 없어. 저렇게 생기면 원래 배우자보다 더 훤칠하고 더 예쁜 사람 만나기 어려울 텐데. 아쉽게 이혼을 왜 해.”사람들은 늘 남 일에 관심이 많다. 특히 눈에 띄는 남이라면 더 그렇다.마치 수현과 윤아처럼 외모가 출중하고 또 서로 잘 어울리는 남녀라면 가십거리로 되기 더 쉽다.말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 윤아의 귀에 들어간다. 그녀 옆에 선 수현도 당연히 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방을 순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갑고 도도한 모습으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있잖아, 저기 두 사람 되게 젊어 보이는데 아이는 있을까?”아이라는 두 글자에 윤아는 가슴이 덜컹했다.조금 어이가 없었다. 화제가 어떻게 아이로 갔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저렇게 좋은 유전자에 아이 많이 낳지 않으면 얼마나 아쉬워.”여기까지 들은 윤아는 수현을 힐끔 훔쳐보았다.역시, 그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그날의
이 말을 마친 윤아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 수현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를 생각했다.분명 전엔 얼굴이 굳어있었는데 저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은 뒤 표정이 그나마 나아졌다. 심지어 그녀가 배가 고픈지 안 고픈지를 걱정하신다.왜?진짜 유산한 줄 알고 미안해서 그러는 건가...“아침 안 먹었잖아.”수현이 또 말을 걸어왔다.윤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 근데 배고프지 않아.”실은 입맛이 없었다.“지금은 배고프지 않지. 근데 나중에는? 조금 있다가 요양원에 갈 때면 아침 먹을 시간 없어.”여기까지 듣자, 윤아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 그러면 우리 먼저 아침 먹으러 갈래?”“내가 편의점 가서 사 올게. 여기서 기다려.”말을 끝낸 수현이 구청을 나갔다.밖에 나간 뒤, 그는 바로 편의점으로 가는 대신 벽에 기대어 담배 한 대를 피웠다. 찬 바람 속에 조금 있으니 정신이 들었다.그는 벽에 기대어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그의 눈을 가리면서 요동치는 감정도 함께 숨겨주었다.분명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는데, 그녀의 목을 조르면서 왜 이렇게 무심한지 따지고 싶었는데, 말을 내뱉고 나니 아침 먹겠냐고 물었더라. 헛웃음이 나왔다. 왜 그녀 앞에선 항상 마음이 약해지는지...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허공에 대고 물어본다.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저 하염없이 앞을 바라보며 찬바람이라도 그의 진심을 알려주길 기다린다.-윤아도 이런 경우를 예상해 보지 못했다. 수현이 자리를 뜨자마자 아까 토론하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그녀의 앞에 그리고 옆에 자연스레 앉았다.“저기요, 예쁜 아가씨. 궁금한 게 있는데, 아까 나간 분 아가씨 남자친구예요 아니면 남편이에요?”“혼인 신고하러 왔어요? 헉, 설마 이혼 신고하러 왔어요?”“아이는 있어요?”윤아: “...”이 사람들, 묻고 있는 문제가 모순적이라는 생각은 안 드나...그리고 가십거리 주인공 앞에서 이런 걸 막 물어봐도 되나
봉지를 받은 뒤, 윤아는 수현이 인스턴트 음식을 사 왔다는 것을 발견했다. 입맛이 없어 그저 열어 보기만 하고 다시 치웠다.수현은 거기에 서서 윤아의 행동을 다 눈에 담았다.“다 싫어?”이 말을 듣자, 윤아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아니,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래.”수현은 더는 말하지 않고 윤아의 곁에 앉았다.너무 적게 입어서인지 아니면 금방 밖에서 들어와서 그런지 수현이 옆에 앉는 순간, 윤아는 자신의 주위 온도도 함께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수현이 아직도 셔츠 한 장만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입을 열었다 닫으면서 뭐라도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침묵만 유지했다.둘을 이렇게 조용히 앉아있었다.비록 가까운 거리였지만 하늘 저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윤아는 자리에 앉아 아까 얘기를 나눴던 여자들을 보았다. 한명 한명씩 남자 친구와 함께 들어갔고 나올 땐 다정하게 팔짱을 끼거나 껴안으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이 장면을 보니 수현과 혼인신고 하러 구청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추억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현실은 얼마나 참혹했다. 참 많이도 변했구나...윤아가 이렇게 멍때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와 수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정신을 차린 뒤, 그녀는 제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달싹이며 수현에게 말했다.“우리 차례야.”수현은 무슨 생각하는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안에서 누군가가 다시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윤아는 깊은숨을 들이쉬면서 몸을 일으키고는 수현을 향해 말했다.“가자.”말을 마치고 윤아는 먼저 발걸음을 뗐다.“잠깐만.”수현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윤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면서 고개를 돌리려는 충동을 간신히 삼켰다.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찌릿한 아픔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더 또렷하게 했다.그녀는 자신이 낮은 목소리로 묻는 것을 들었다.“왜 그래?”고개도 돌아보지 않고
요양원에 가는 길에서 윤아는 너무 급한 나머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고 손가락을 아무렇게나 꼬아서 부여잡았다. 심장은 벌렁벌렁 뛰었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잘못했다.구청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아침에 깨자마자 요양원으로 갔어야 했다.아니, 어젯밤에 돌아오는 게 아니라 요양원에서 할머님을 잘 보살펴드려야 했다.오늘 수술 하신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할머님이 거절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오다니. 어쩜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는가.윤아는 한없는 자책에 빠졌다. 그녀는 몸을 좌석에 기댄 채 눈을 질끈 감았다.기억 속 흐릿하지만, 또 또렷한 장면이 이리저리 엉킨 채 머릿속에 펼쳐졌다.빨리 운전하여 요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교통 규칙은 지켜야 하므로 수현은 할 수 없이 신호등 길목에서 천천히 멈추어 섰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그의 짙은 눈썹은 계속 찌푸리고 있었다.차를 세운 후, 수현은 점차 윤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윤아의 입술 사이에 붉은 피가 맺혀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너 왜 그래?”아무 응답도 없었다.윤아는 지금 이맛살을 찌푸린 채 얼굴은 창백했고 눈썹은 파르르 떨렸으며 입술은 꼭 깨물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이런 윤아의 모습을 본 수현은 안색이 확 변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붙잡고는 꼭 깨물고 있는 입술을 열게 하려고 했다.여러 번 시도했지만, 윤아가 너무 세게 깨물고 있는 바람에 몸부림칠 때 옅은 피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심윤아, 뭐 하는 거야. 입술 놓으라고!”수현은 힘을 주고 싶었지만, 윤아가 다칠까 봐 말로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윤아는 마치 악몽에 빠진 사람처럼 어떻게 불러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순간, 수현은 뭔가가 떠올랐다.윤아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곁에서 자라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아버지가 윤아를 무한한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에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완벽했고 뭐든 그녀를 힘들게 하는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