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선월의 질문에 뭐라 대답할지 몰라 시선을 수현에게 돌렸다.뒷좌석에 앉은 윤아와 선월도 강소영을 본 마당에 운전석에 있는 수현이라고 못 봤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수현이 좋아하는 여자이니 더 신경을 쓸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수현은 곧바로 속도를 늦추고 대문 근처에 차를 세웠다.차가 멈추자 강소영은 들고 온 가방을 손에 쥔 채 운전석 쪽으로 다가와 작은 손을 뻗어 창문을 두드렸다. 수현이 창문을 내리자 소영은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수현 씨. 이제야 돌아왔네. 할머님은 좀 어떠셔? 미안. 걱정하지 말라곤 했는데 그래도 내가 직접 와서 물어보고 싶어서.”말을 마친 소영은 뒷좌석을 힐끗 훑어봤다. 조수석에 사람이 없으니 윤아도 함께 있다면 뒷좌석에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조수석은 자기를 위해 남겨둔 건가 싶어 으쓱해진 소영은 뒷좌석의 두 사람을 보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한 명은 심윤아고 또 다른 한 명은...김선월을 알아본 소영은 순간 표정이 굳었다.‘할머님이 왜 여기에?’뽐내러 온 김에 진씨 가문의 미래 사모님으로서의 주도권 행사를 하려고 했던 소영의 계획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찰나의 순간 소영의 머릿속엔 방금 한 말에 김선월이 오해라도 하면 어떡하나, 행여 그녀와 수현과의 사이에 방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뒤죽박죽이 되었다.소영이 표정 관리를 못 하고 벙쪄있을 때 선월은 그녀를 의아한 눈길로 훑어보았다.윤아는 서둘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하게 말했다.“할머님. 기억 안 나세요? 강소영 씨잖아요. 예전에 수현 씨 구해줬던 수현 씨 생명의 은인이요.”윤아의 말에 선월이 그제야 기억이 되살아난 듯 말했다.“소영 씨였네요. 전에 봤을 땐 아이 같았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못 알아봤어요.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요.”소영을 알아본 선월은 다정다감한 말투로 그녀를 대했다. 소영을 완전히 생명의 은인으로 대하고
수현이 입을 열면 티가 날까 봐 걱정된 윤아는 서둘러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요. 뭘. 타요 어서. 오늘 마침 할머님이 댁으로 돌아가시는 날이니 들어와서 좀 앉아있다 가요. 나중에 기사님 시켜서 댁까지 바래다 드릴게요.”윤아가 먼저 말을 꺼낼 줄 몰랐던 소영은 시선을 돌려 윤아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고마워요. 윤아 씨.”말을 마친 소영은 차 뒷좌석으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모두 마른 체형이라 셋이 함께 앉아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차에 타서부터 윤아는 김선월의 곁에 찰싹 붙어있었던 터라 옆자리는 공간이 많이 비어있었다.차에 탄 소영은 선월을 향해 밝게 인사했다. 윤아는 소영이 조수석에 앉을까 걱정했던 터라 그녀가 뒷좌석에 오르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눈치는 꽤 빠른 모양이다.“소영 씨. 이 노인네 때문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선월은 격식을 갖춰 소영을 대하며 도란도란 대화를 이어나갔다.차는 유유히 별장 대문을 넘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차를 세운 후 수현은 도우미들이 미리 마련해둔 휠체어에 조심스레 선월을 태웠고 휠체어는 밀고 가는 사람은 자연스레 윤아였다. 차에서 내린 소영은 제법 화목한 가족 같은 그 광경에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으나 곧 생각이 바뀐 듯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어르신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범수는 잔뜩 들떠 인기척이 들리자마자 도우미들과 함께 그들을 맞으러 나왔다. 그러나 단란한 모습의 세 사람 옆에 웬 반갑지 않은 손님을 보고 순간 표정이 굳어버렸다. 범수뿐만 아니라 다른 도우미들도 당황한 듯 서로 눈을 맞췄다. 그러나 큰 가문의 사용인들답게 김선월이 다가오자 바로 표정 관리를 하며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환영합니다. 어르신!”그들은 언제 준비한 것인지 환영식 무대까지 선보였다. 선월은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 세계급 국가급 가리지 않고 많은 공연을 보았지만, 요양원에 오래 있으며 무료했던 탓인지 사용인
나름 성대한 환영회가 끝난 후 모두 실내로 돌아왔다.범수는 셰프에게 전달해 선월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라 했다. 물론 메뉴선정과 식자재 선택 모두 엄격한 기준을 통해 엄선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늦은 터라 선월은 두세 숟가락 뜨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애써줘서 고마워요. 모두.”선월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씻을 준비를 했다. 윤아가 얼른 다가가 도우려 했으나 선월이 그녀의 손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됐어. 씻는 거 하나 못할까 봐? 내가 몸을 못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뭘.”윤아가 입을 떼려 했으나 선월은 고개를 돌려 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소영 씨. 시간도 늦었는데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는 거 어때요? 윤아더러 도우미들 시켜서 묵을 방 하나만 더 준비해두라고 할게요.”바로 전에까지 음식을 깨작대던 소영은 선월의 부름에 후다닥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아니에요. 할머님. 제가 여기 있는 건 실례잖아요.”“실례라뇨. 집에 빈방이 많으니 소영 씨가 묵을 곳 하나 마련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게다가 소영 씨는 우리 집의 은인이니 맘 편히 있어요.”선월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소영은 더 거절하기도 민망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사실 그녀도 이 집에 머물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왠지 수현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소영이 입을 열기 전에 윤아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집사님. 강소영 씨가 머물 방 하나만 더 준비해주세요.”윤아의 말에 범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사모님.”수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침묵을 유지했다.잠시 후 선월을 포함한 대부분 사용인이 자리를 뜨고 그나마 남아있던 몇 명 도우미들도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끼고 서둘러 자리를 피한 덕에 윤아와 수현, 그리고 소영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자 소영이 윤아를 힐끗 보더니 시선을 수현에게로 돌리며 낮게 말했다.“수현 씨.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나 그냥... 갈까?”소영은 입으로는 가겠다면서
소영은 잔뜩 불쌍한 척을 하며 수현을 올려다보았다.“수현 씨. 내가 뭘 잘못 말한 거야? 미안해. 윤아 씨가 화낼 줄 몰랐어. 역시 난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말을 마친 소영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휘청거리며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막아 세우는 수현.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괜찮아. 여기 있으라고 했으니까 그냥 있어. 윤아는 신경 쓸 필요 없어.“하지만….”“대표님. 강소영 씨 방도 준비를 마쳤습니다.”언제 왔는지 저 먼발치에 있던 범수가 달려오며 소영의 말을 끊었다.‘뭐? 벌써?’소영이 의아한 눈빛으로 범수를 바라봤다. 간지 몇 분이나 됐다고 벌써 방 정리를 다 했다니. 소영은 그들이 제대로 한 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네.”하지만 수현은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소영에게 말했다.“집사님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 늦었으니 빨리 쉬고.”말을 마친 그는 성큼성큼 윤아가 떠난 방향으로 가버렸다.“수현 씨...”소영의 부름에도 듣지 못했는지 쌀쌀하게 가버리는 수현.소영은 어느새 혼자 그 자리에 우두커니 남겨졌다. 그녀는 윤아가 미웠다. 방금 그녀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바람에 일이 꼬인 것 같았다. 그러나 소영이 생각에 깊이 빠지기 전에 범수의 냉랭하고 기계적인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의 사색을 끊었다.“아가씨. 손님 방으로 모실까요?”소영은 범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부탁드릴게요.”하지만 범수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몸을 휙 돌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소영은 불쾌한 마음이 들끓었지만 애써 누르며 그를 뒤 따라갔다.-한편, 방으로 돌아온 윤아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조금 전 그 말을 내뱉을 때 소영의 황당한 모습과 수현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떠올리며 윤아는 내심 속이 시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고 강소영이 먼저 잔뜩
추운 날씨 탓에 윤아는 두꺼운 외투를 입었음에도 욕실 벽의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깨를 잡은 수현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어떻게 움직여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윤아는 애꿎은 힘만 빼고 결국 지쳐 거친 숨만 내쉬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누르는 수현을 노려보며 냉소를 터뜨렸다.“뭐 하는 짓이야? 괜히 찔리니까 화내는 건가?”수현은 잔뜩 그늘진 얼굴로 윤아를 내려다보았다.윤아의 눈동자는 맑은 호수같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욕실의 불빛까지 더하니 반짝이며 바스러지는 보석같이 아름다웠다. 그뿐만 아니라 오뚝한 콧날과 선홍빛의 입술도 수현을 홀려버릴 듯 반짝거렸다.그러나 윤아는 가시 돋친 장미같이 그 고운 입술로 뾰족한 말들만 내뱉는다. 가시 돋친 말들이 너무 아파 수현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그 작은 입술을 막아버려 다시는 말이 나오지 않게 만들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그는 생각 끝에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어 윤아가 하려던 말을 끊어버렸다.“네...읍.”상체를 숙이는 수현을 보며 윤아도 불안한 예감이 들었으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피하지 못했다. 윤아는 한 글자밖에 뱉지 못하고 덮쳐오는 그의 익숙하고 따뜻한 숨결에 잡아먹혔다.강소영이 돌아오기 전에 윤아는 수현이 키스하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기에.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그를 원했기에. 그 당시 윤아는 좋아하는 남자와의 키스였기에 꽤 수줍어했었다. 게다가 수현은 키스하는 방식도 그의 거침없는 성격과 닮아 예고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덕분에 윤아는 종종 그와의 키스가 끝날 무렵에는 영혼까지 탈탈 털린 기분을 느끼곤 했다.지금도 수현은 화가 난 탓인지 오랫동안 참았던 탓인지 거칠게 윤아에게 입 맞춰왔다. 그녀의 얼굴을 잡은 손에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말랑한 볼살을 짓눌렀다. 그의 숨결은 거칠고 다급했다. 마치 그녀에게 감정을 쏟아내듯 거침이 없었다.윤아는 온 힘을 다해 수현을 밀어내고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오해?”그날 직접 두 눈으로 봤는데 오해라니. 윤아는 수현이 낯짝도 두껍다고 생각했다.수현은 눈앞의 이 여자가 갑자기 이리 화를 내는 이유가 자신과 소영이 함께 밤을 보냈다고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자 왠지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걸 느꼈다. 그러자 방금까지도 흙빛이던 낯빛이 훨씬 나아졌다. 수현은 입술을 앙다물더니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어. 그날 밤은…”수현은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그가 그날 밤 일을 말하려 하자 윤아가 잽싸게 그의 말을 끊었다.“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전혀 궁금하지 않아. 그러니까 굳이 알려줄 필요 없어.”생각하는 그런 일이 없었다니. 윤아는 수현이 그날 자신이 현장에 없었다고 생각해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넘어가려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날 그녀는 현장에 있었고 두 눈으로 직접 소영이 그를 데리고 떠나는 걸 봤다.밤새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도 모자라 이튿날 요양원에까지 늦게 오지 않았던가.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윤아는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일이 언제 이렇게까지 꼬여버렸는지… 윤아는 점점 자신이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수현을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러나 윤아는 사랑에 눈이 먼 미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수현에게 발정 났냐고 하던 자신의 모습은 정말 그녀가 봐도 끔찍했다. 전혀 그녀답지 않았고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을 순간이었다.마음이 진정되자 윤아는 바로 전에까지 그녀를 열 오르게 하던 복잡한 감정들이 차분해지며 점차 종적을 감추는 것을 느꼈다. 수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도 다시 맑고 잔잔하던 모습을 되찾았다.수현도 윤아의 변화를 단번에 눈치챘다. 그녀의 차분함과 막연함 모두 수현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그는 윤아의 이런 모습에 가슴이 갑갑해나며 갉아 먹히는듯한 고통을 느꼈다.한참 후, 수현이 자소 섞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나 이혼 절차도 끝내지 않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는
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윤아를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감돌며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수현에게서 전해지는 압박감에 윤아는 그가 또 뭔갈 하려는 줄 알았으나 예상외로 수현은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윤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문밖에 서 있는 소영은 초조하게 두 손을 꼼지락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소영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조금 전 수현의 목소리에는 분명 짜증이 섞여 있었다. 마치 중요한 일이 그녀 때문에 끊긴것미냥.소영은 현재 몹시 초조했다. 자신이 왔다는 얘기를 듣고도 한참이 지났는데도 수현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그녀는 더욱 불안해졌다.도대체 방 안에서 뭘 하고 있었길래 한참이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단 말인가?그때,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소영의 앞에 문을 열고 나타난 수현.소영은 고개를 발딱 들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방금과 같은 옷에 외투도 벗지 않은 걸 보아 별일은 없었던 듯싶다. 비록 전보다 옷매무새가 많이 흐트러졌지만, 소영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애써 자신을 이해시킨 후 그녀는 시선을 돌려 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그의 입가의 붉은 핏자국. 소영은 순간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핏자국이 옅어 자세히서 관찰하지 않으면 못 알아챌 정도였지만 소영의 눈을 피하진 못했다. 수현은 소영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듯 무뚝뚝하게 물었다.“왜 왔어?”소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머쓱하게 입술을 깨물었다.“나... 나 입을만한 잠옷이 없어서 윤아 씨 옷 좀 빌리려고 했지.”윤아의 옷을 빌린다고?수현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올렸다.“도우미 아줌마가 준비해주지 않았나?”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수현은 소영의 말에 언짢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그 낌새를 눈치챈 소영이 다급하게 말했다.“수현 씨. 화내지 마. 내가 오늘 너무 갑작스레 찾아왔으니 못 준비했을 만도 하지. 윤아 씨 옷 빌리면 돼. 그래도 될진 모르겠지만.”수현은 악에 받쳐 있던 방
커다란 드레스룸에 오직 소영과 윤아 둘만 있다.소영은 옷을 고르는 대신 윤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윤아도 소영의 시선을 느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걸 눈치채고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아니나 다를까 몇 초 후 결국 소영이 참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윤아 씨. 약속을 어겼죠.”윤아가 멈칫하더니 물었다.“제가 언제 약속을 어겼다고 그래요?”소영은 살기 어린 눈으로 그녀의 입술을 노려보며 말했다.“방에 들어가기 전엔 립스틱을 바른 상태였죠.”윤아는 그제야 소영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왜 자신의 립스틱이 지워졌냐고 묻고 있었다. 소영도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숨기려 하지 않았다.“그니까 심윤아 씨는 약속을 어겼죠. 원래 이렇게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이에요?”“아니요.”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약속한 건 지켜요. 할머님을 위한 일이 아니면 전 절대 그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아요.”윤아의 그 말은 소영에게 꽤 큰 충격을 주었다. 소영은 서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윤아 씨 말은 수현 씨가 먼저 당신에게 들이댔다?”윤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장난 그만 해요. 수현 씨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소영은 자신이 이렇게 돌아왔는데 수현이 어떻게 아직도 윤아를 놓지 못할 수 있겠냐 생각했다.소영의 말에 윤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소영 씨. 제가 뱉은 말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소영 씨가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만약 그랬다면 전 그저 할머님께 찾아가 전부 일러바치기만 하면 되니까요.”김선월 얘기에 소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할머님은 왜 갑자기 수술을 안 하신 거죠? 당신이 할머님께 뭐라 한 거 아니에요?”분명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수술을 안 한다고 한단 말인가. 소영은 윤아가 선월에게 뭔가를 슬쩍 알려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소영의 말에 윤아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말했다.“전 그 누구보다 할머님이 괜찮아지시길 바라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