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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그렇게 싫어?

오후에 그들 일행은 계획대로 등산하기로 했지만 엘리사는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린 여자애가 힘들기만 한 등산에 흥미를 느낄 리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엘리사, 기분 풀어. 은찬이 좀 봐봐, 얼마나 말 잘 듣는지. 너도 은찬이처럼 말 들으면 얼마나 좋아?”

다이애나도 몸을 웅크리고 앉아 엘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살 달랬지만 앨리사는 여전히 입을 삐죽 내민 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은찬이가 갑자기 엘리사 앞으로 다가와 자기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자신 있는 말투로 말했다.

“앨리사, 무서워하지 마. 네가 힘들면 내가 너 업고 산에 오를게!”

남자다운 그의 모습에 앨리사는 끝내 피식 웃으며 그제야 산에 오르는 것에 동의했다.

곧이어 그들을 두 무리로 나뉘어져, 어른들이 앞장서고 은찬이와 앨리사가 뒤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게 되었다. 두 아이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자 강윤아의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해외에서 매일 일에 치여 살다 보니 많이 데리고 나다니지 못해 또래 애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오늘 보니 내가 괜히 걱정했네.’

자기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강윤아는 미처 앞에 돌이 있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게다가 권재민이 앞으로 기우는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려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습…….”

이윽고 발목에 전해지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엄마, 괜찮아요? 어른이면서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요?”

때마침 달려온 은찬은 곧바로 그녀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말투는 딱딱했지만 표정을 보면 그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에 강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나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발목도 다 부었는데.”

권재민도 눈살을 찌푸리며 엄숙한 말투로 다그쳤다.

옆에 있던 스미스 가족도 갑자기 벌어진 사고에 놀란 듯 다급히 말했다.

“얼른 돌아가요. 윤아 씨가 이렇게 다쳤는데 등산은 더 이상 안 될 것 같아요.”

자기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자 강윤아는 죄책감을 감추지 못했다.

“죄송해요…….”

“얼른 돌아가요.”

권재민의 언짢은 듯 싸늘하게 말하면서도 그녀를 부축할 때는 한없이 다정했다.

하지만 강윤아는 그런 다정한 손길이 어색했는지 무의식적으로 도망가려고 몸을 버둥댔다. 그때 곧이어 권재민의 꾸중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있어요.”

권재민이 강윤아를 부축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스미스 부부는 눈빛을 교환하며 싱긋 웃었다.

“재민은 정말 여전한 것 같아.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속은 깊다니까. 츤데레야.”

스미스의 말에 다이애나는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두 사람 금실은 좋나 봐요. 보기 얼마나 좋아요.”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은 바람에 그들의 대화는 강윤아와 권재민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갔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윤아의 얼굴을 빨갛게 달아올랐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금실이 좋은 것 같다니? 내 연기력이 그렇게 좋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난 오히려 재민 씨가 빨리 나를 놔줬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그녀와 달리 권재민은 오히려 놀란 듯했다.

‘설마 내가 정말 윤아 씨를 관심한다는 게 티가 났나? 아닐 텐데. 이거 그저 연기일 뿐이잖아. 스미스 부부를 속이는 게 내가 원했던 거잖아.’

호텔에 도착한 권재민은 직원을 불러 강윤아의 치료를 맡기고는 스미스와 또다시 공적인 대화를 나누러 떠났다.

“윤아 씨, 그러면 저 먼저 가볼게요. 윤아 씨도 다쳤으니 얼른 들어가 휴식해요.”

문 앞에서 얘기를 나누던 다이애나가 떠나가자 강윤아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쯤 아마 두 아이는 진작에 방에 돌아가 핸드폰 게임에 빠졌을 거기 때문에 걱정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눈앞에 놓인 킹사이즈 침대를 본 순간 강윤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잠시 뒤 권재민과 이 침대에 함께 누워야 한다는 걸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이런 터무니 없는 요구에 승낙했다는 게 조금 후회되기도 했다.

그녀는 침대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 침대를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 킹사이즈라 세 사람도 거뜬히 누울 수 있어 끝에서 잔다면 서로 접촉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던 그때, 한참 동안 바라보던 강윤아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호텔 로비에 전화를 걸어 이불 두 개를 요구했다. 그리고 직원이 이불을 가져오기 바쁘게 그 중 하나를 돌돌 말아 침대 가운데 막아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권재민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강윤아는 오히려 여유롭게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약 밤 11시가 되었을 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스미스와 권재민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강윤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핸드폰을 다급하게 베개 밑에 숨겨놓고 눈을 감았다.

권재민은 스미스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술까지 마셔 지금은 약간 취한 상태였다.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침대 가운데 세로 놓인 이불을 보자 일순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내가 자기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그러나? 다른 여자들은 나한테 안겨 오지 못해 애를 쓰는데 저 여자는 어쩌면 나한테서 도망치지 못해서 안달이지?’

이윽고 그는 술기운을 빌려 침대 쪽으로 걸어가더니 가운데 놓인 이불을 홱 걷어내 옆에 던져버렸다.

인기척을 들은 강윤아는 순간 겁을 먹었다. 심지어 공기 속의 지독한 술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무…… 무슨 상황이지? 설마 술에 취해 나한테 덮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야.’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이불 아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때, 권재민이 갑자기 돌려 그녀를 자기 아래에 가두며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강윤아는 처음으로 자는 척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권재민의 잇새에서 갑자기 싸늘한 말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왜? 내가 그렇게 싫어?”

강윤아는 순간 권재민이 자기가 깨어있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가슴은 눈치 없이 쿵쾅거리며 요동치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굴었다.

남자의 숨결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게 느껴지자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결국은 계속 자는 척하는 걸 선택했다.

‘안 들려. 안 들려. 설마 자는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하겠어?’

그녀는 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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