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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드디어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는 심유진은 그날 밤 오래간만에 달콤한 잠을 이뤘다.

아침 회의를 마치고 총지배인은 그녀를 따로 불렀다.

지금 당장 짐을 싸라고 할 줄 알았으나 총지배인의 입에서는 완전히 예상 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유진 씨, 그냥 출근해도 돼요.”

“네?”

심유진은 그 결과가 마냥 기쁘지 않았고 갑자기 계속 출근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조건웅과 우정아가 절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우원정 대표가 총지배인에게 설득당했을 리가 없다.

“허 대표님한테 말씀드렸더니 상관하지 말고 유진 씨 그냥 출근시키라고 했어.”

“허 대표님? 허태준?”

총지배인의 입에서 예상외의 인물이 나왔다.

그는 서둘러 서유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앞에서 허 대표님 이름 함부로 불러도 되는데 밖에 나가서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만약 허 대표님 귀에 들어가면 당장 짐을 싸고 나가야 할지도 몰라요! 그땐 나도 유진 씨 편 못 들어요!”

심유진은 속으로 YT 그룹의 인물관계도를 그렸다.

‘그러니까 허태준이 우원정 대표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다는 말이네?’

‘허태준은 CY 그룹의 대표이자 YT 그룹의 고위 임원이란 말이겠지? 사람이 어떻게 두 회사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지? 쉬는 시간은 따로 있을까?’

심유진은 불현듯 이런 고민을 하는 자신을 비웃고 싶었다.

‘나랑 뭔 상관이지? 바쁘든 말든,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잖아.’

“아니요, 허 대표님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총지배인님 밑에서 이렇게 잘 배웠는데 설마 일자리 하나 못 찾겠어요?”

“하지만 계속 호텔 매니저 일을 하고 싶다면 로열 호텔보다 더 좋은 호텔은 다시 찾지 못할 거야.”

총지배인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조금 흔들었다.

그의 말이 맞다. 우리나라에 있는 7성급 호텔 두 곳은 모두 로열 호텔이기 때문이다.

근무 환경이나, 급여 및 복리후생, 미래의 발전 가능성도 모두 로열 호텔보다 더 좋은 호텔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을 나가면 더 좋은 직장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미 허 대표님한테 말 끝냈어요.”

총지배인은 눈을 부릅 떴다.

“유진 씨가 계속 퇴사를 하겠다면 저와 허 대표님의 호의를 무시하는 걸로 밖에 안 보여요. 그러면 제가 얼마나 입장이 난처하게 되는지 생각해 봤어요?”

심유진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계속 이곳에 남게 되면 우원정 대표가 가만히 있을까요? 일이 생겼을 때마다 허 대표님한테 신세 질 수 없어요.”

허태준은 그저 이번 한 번만 그녀를 도와줬을 뿐이다. 만약 우원정 대표의 화가 수그러들지 않고 자신이 이곳에서 계속 근무를 하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총지배인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 급하게 퇴사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

심유진은 총지배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동료들한테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오늘 저녁은 심유진이 당직을 서는 날이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9시쯤, 조건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심유진은 그제야 오늘은 조건이와 그의 여자친구가 함께 대구로 오는 날인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 조건이는 다른 신분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로열 호텔의 손님이자 그녀의 ‘왕’.

심유진은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누른 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조건웅에 대한 미움을 조건이한테 쏟아붓지 않기 위해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 지금 로비에서 체크인하고 있어. 빨리 내려와. 알았지? 지금 당장 내려오란 말이야.”

조건이의 말투는 형수를 부르는 말투가 아니라 아랫사람을 심부름 시키는 명령조였다.

심유진은 잠시 멈칫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녀의 물음에 무미건조했던 조건이의 말투가 짜증 섞인 말투로 변했다.

“일이 있으니까 내려오라고 하겠지. 내가 일이 없는데 왜 전화를 걸었겠어?”

심유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마음속으로 참을 인자를 새겼다.

‘그래, 손님이야. 하늘 같은 내 손님. 심유진 참아야 돼.”

“그래. 지금 내려갈게.”

그녀는 바로 1층 로비로 내려왔다.

테스크에서 체크인을 하는 손님은 네 다섯 명이 되어 줄을 서고 있었다. 제일 앞에 키가 크고 깡마른 남자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바로 조건이였다.

그는 데스크에 기대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고 있었고, 맞은편에 있는 직원은 조건이를 살펴보며 입술을 깨물고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조건이.”

심유진은 조건이의 어깨를 톡톡 쳤다.

심유진을 발견한 그의 얼굴 표정이 순식간에 찡그러졌다.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와!”

심유진은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조건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얼굴을 들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방을 미리 예약해 달라고 했잖아?”

“예약했어.”

심유진은 로비 데스크에 있는 직원을 쳐다보았다.

소미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가 물었다.

“시스템에 예약된 방이 보이지 않나요?”

“찾았습니다.”

직원은 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돈을 내지 않으시겠다고....”

직원은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니저님의 시동생이라고 매니저님 이름으로 외상하신다고 하셨으나 저희 호텔은 그런 규정이 없어서....”

그리하여 두 사람은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다른 손님들한테도 영향이 미쳤다.

“7성급 호텔 직원 서비스가 뭐 이래? 융통성은 밥 말아먹었냐?”

조건이는 데스크 직원을 흘겨보며 말했다.

“아가씨, 내일 잘릴 준비나 해.”

겁에 질린 직원은 심유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조건이의 거만한 태도가 심유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데스크 직원을 위로했다.

“잘했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돼요.”

직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싱긋 웃어 보였다.

“네, 매니저님.”

그녀의 말을 들은 조건이는 바로 심유진을 노려보았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심유진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손님, 저희 호텔은 외상이 안됩니다. 누구도 이 규칙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목소리, 정중한 태도가 일반 사람들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조건이도 ‘일반 사람’에 속해있었다.

심유진의 기세에 눌린 조건이는 데스크 직원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전보다 많이 수그러진 목소리였다.

“우리 형수인 거 확인됐지? 그러니까 빨리 방 키 내놔.”

데스크 직원은 조건이와 심유진 두 사람이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인 것 같아 얼른 방 키를 찾아 건넸다.

“잠깐.”

심유진은 직원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녀가 턱으로 조건이를 가리키며 쌀쌀맞은 말투로 말했다.

“아직 돈을 내지 않았어.”

그녀의 말에 데스크 직원과 조건이는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매니저님께서 대신 내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데스크 직원은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다.

“당연히 아니죠.”

심유진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고 조건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호텔은 입주하기 전에 돈을 지불하고 퇴실할 때 별도의 추가 비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손. 님.”

조건이는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심유진을 쳐다보고 점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신을 차린 그의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

“형수, 너무 한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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