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먼 스웨이는 친구들끼리 얼굴 보는 것보다, 자기 딸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재벌가 아니면 권세가들이었다. 이 사람들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건 심가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일인 셈이니.어휴,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예전 같으면 이런 목적성을 띤 모임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하이먼 스웨이였다.지금은 자신의 딸을 위해 그동안 쌓아온 인맥을, 연줄을 총동원하고 있다.이렇게 생각하니, 배미희는 이서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뒷배 믿고 교만한 심가은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서는 너무 겸손하다. 지난번에 그녀가 친구를 손님으로 초대하지 않았으면 아마 다들 이서라는 인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이씨 집안 손님이라는 권세를 믿고 나대거나 사람을 무시한 적도 없다.지환이 이서를 그렇게 좋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제가 쓴 글을 작가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요.”지난번 하이먼 스웨이의 강연을 듣고, 이서는 재미 삼아 써보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문사가 샘솟듯 솟아 사흘도 안 되어 만여 자를 써냈다.이상하게도 마치 이전에 썼던 것처럼 술술 써졌다.그런데 이서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글 쓰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썼어, 이렇게 빨리?” 배미희는 계속 말을 이었다.“마침 잘됐네, 내가 갖고 가서 보여 줄까?”“좋아요.” 이서는 컴퓨터에 있는 파일을 복사해서 배미희에게 건넸다.배미희의 말에 따르면 이서는 이전에 스웨이 작가와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서의 기억 속에서 하이먼 스웨이를 처음 만난 건 지난번 이씨 가문의 바비큐 파티에서였다.그래서 줄곧 경솔하게 자신의 작품을 들고 가르침을 청하지 못했다.지금 배미희가 다리를 놔주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감사합니다, 엄마.”“아이고...”엄마라는 소리에 배미희는 심신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곧 토요일이 다가왔다. 임하나는 아침 일찍부터 침대에 앉아 캐리어 안의 옷을
아주 예쁜 롱 드레스였다.하나는 드레스를 꺼내 보았다. 빨간색의 롱 드레스는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을 자아냈다. 특히 촤르르 떨어지는 질감은 딱 봐도 일반 소재는 아닌 듯했다. 게다가 모든 디테일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정성껏 디자인한 것이 보였다.단아하면서도 심플한 느낌이지만 곳곳에 숨은 디테일 때문에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연출했다.바로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상언에게서 걸려 온 것이었다.하나는 얼른 받았다.[드레스는 받았어요?]“이 선생님이 보냈어요?” 하나는 무척 마음에 들어 손에서 놓지도 않았다.“네, 받았어요.”[마음에 들어요?]그녀는 눈물을 글썽이었다.“마음에 들어요.”가벼운 한마디에 상언의 마음은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잠시 멈췄다가 이상언은 다시 말을 이었다.[준비해요.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이 순간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었다.“벌써 도착했어요? 그럼 그냥 올라와서 기다릴래요? 저...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서요...”이상언은 크게 기뻐하며 답했다.[네, 지금 올라갈게요.]전화를 끊었지만, 하나의 볼은 여전히 뜨거웠다.두 사람은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으나 해야 할 건 이미 다 한 사이이다. 하지만, 이번에 M국에서는, 이국 타향이어서인지, 낯선 땅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상언에 대한 느낌이 크게 바뀌었다.왠지... 이전보다 조금 더 의존적으로 변한 듯했다.하나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도 상언이 도착했을 것이다.긴장한 마음으로 문 입구까지 걸어가서야 하나는 거울도 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문밖에서 계속 들리는 노크 소리에 당황한 나머지 바로 문을 열었다.문밖에 덩그러니 서 있는 사람은 역시나 상언이었다. 하나는 무의식중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긴장한 손은 치맛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이상언이 아무 말없이 멍하니 서 있자, 임하나는 더욱 긴장했다. 그녀는 고개를
솔직히 말하자면, 케이티도 예쁜 여자 축에 속했다. 수많은 의학계 거물들과 한자리에 있음에도 전혀 기죽지 않는 당당한 존재였다.어린 나이임에도 이런 세미나에 참가하고, 게다가 무대 위에 앉아 있다는 건 학술과 능력 면에서도 인정받고 있다는 걸 설명한다.그녀가 지나치게 증오의 눈빛을 발산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는 그녀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다녀올게요.” 이상언은 외투를 벗어 하나의 몸에 걸쳤다. 늑대들의 호시탐탐 시선도 막을 겸.“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상언은 갑자기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뽀뽀했다.하나는 멍해졌다.그녀는 결코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왜 상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키스하는지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다.상언은 하나에게 키스한 후 황급히 자리를 비웠다.솔직히 하나가 화낼까 봐 좀 걱정이 됐다.어쨌든 그녀는 줄곧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무대 위의 케이티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상언이 H국에서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고 했을 때도 그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상언이 잠시 외롭고 심심해서 만나는 여자라고 생각했으니까.하나의 개인 자료를 확인했을 때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마디로 배경도, 돈도 별로 없는 그런 집안의 자제였으니.그래서 상언이 곧 하나를 질려할 것으로 생각했다. M국으로 돌아오면 틀림없이 자신과의 결혼에 착수할 것이라는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가 M국까지 따라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게다가 상언의 태도를 보니 전혀 심심풀이 땅콩으로 만나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그녀가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상언이 무대에 올라왔다.케이티는 곧 표독스러운 눈빛을 숨기고, 일부러 상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가 다가가기도 전에 상언은 마치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아는 것처럼 슬그머니 피했다. 갑자기 그는 그녀의 경쟁상대에게 악수를 청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상대방도
세미나는 거의 세 시간가량 지속되었다.회의가 끝나는 즉시 이상언은 하나에게로 갔다. 다가오는 케이티를 뒤로 한 채.“리셉션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나가서 산책이나 할까?”상언이 하나에게 말했다.“네, 좋아요.”두 사람은 입구로 걸어갔다.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본 케이티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이때 세마나의 또 다른 발표자 앤드류가 다가왔다. 앤드류는 심혈관 질환 방면의 전문가이다. 비록 이상언과 견줄 수 있는 그런 천재형 인물은 아니지만 젊은 나이에 심혈관 분야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는 건, 그도 충분히 뛰어난 사람인 셈이다.케이티의 눈빛이 상언을 쫓아가는 것을 본 앤드류는 얼굴에 음흉하고 악랄한 기운이 퍼졌다.“케이티.” 앤드류가 신사적으로 케이티에게 인사를 건넸다.애석하게도 케이티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순간 앤드류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하지만 얼굴에는 더욱 진한 웃음을 지었다.“케이티는 저 여자를 질투하나 봐요?”앤드류에게 단번에 정곡을 찔린 케이티는 돌연 안색을 바꾸며 변명을 늘어놨다.“무슨 말씀이에요? 내가 뭐 하러 저런 여자를 질투해요? 난 외교관의 딸인 데다가, 최고의 의대를 졸업한 수재라고요. 그런 내가 왜 저 별볼일 없는 여자를 질투하겠어요?!”앤드류는 빙그레 웃었다.“네, 그렇죠? 저 별볼일 없는 여자를 질투할 리 없겠지만, 저 여자가 사라지면 당신 마음도 후련해지겠죠? 게다가 당신한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일 테니..., 아닌가요?”케이티는 귀신이 홀린 듯 앤드류의 말에 반사적으로 반응했다.“어떻게요?”앤드류의 입가에 웃음기가 더 깊어졌다.“케이티, 그러면...”그는 케이티의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앤드류의 얘기에 케이티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괜히 이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득보다 실이 더 크면 어떡하지?’“그냥 겁만 주는 건데요 뭐, 혹시라도 정말 이 수법이 먹히면, 케이티는 손쉽게 이 선생을 손에 넣는 거구요..
윤이서는 결혼했다.그러나 결혼 상대는 그녀가 8년 넘게 사랑을 했던 약혼자인 하은철이 아닌 만난 지 5분도 안 된, 기본적인 정보만 대충 아는 남자였다.“후회되시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사무소 대기실에서 남자는 조금 귀찮다는 눈빛으로 윤이서를 흘겨보았다.윤이서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머릿속은 하은철의 차갑고 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3일전, 줄곧 윤이서를 피했던 하은철이 직접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고, 전화를 받은 그녀는 순간 지난 8년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정성껏 꾸미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은철뿐만이 아니라 그와 손을 깍지를 낀 채 휠체어에 앉아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윤수정도 함께 있었다.--그녀의 사촌 여동생!그녀가 아직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고 있을 때, 하은철은 갑자기 폭탄발언을 했다.“네 신장을 수정이에게 주면 너와 결혼할게.”윤이서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몸이 굳어지며 믿을 수 없단 듯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맞은편 남자의 눈빛은 시종 차갑고 증오로 가득 찼다. 마치 자신을 8년 동안 정성껏 뒷바라지 한 약혼녀가 아닌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도 보는 것 같았다.그녀는 마치 갈 곳을 잃어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 같았다.하은철과 어릴 때 약혼한 사이였고, 16살 되던 해 귀국한 후, 하은철을 걷잡을 수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이 8년 동안 그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그녀는 빨래와 밥하는 것을 배웠고, 또 그에게 걸맞는 아내가 되기 위해 피아노, 그림 등을 배웠으며 심지어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오직 그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결혼해주기 꿈꾸며.그러나 현실은 그녀에게 매몰찼다. 하은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촌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었다.심지어 그의 애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무슨 문제 있나요?” 하지환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윤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벌리고 있다가 또 하지환이 오해할까 봐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아니요, 가요.”어차피 언젠가 마주해야 할 문제였다.도중에 윤이서는 하은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스크린이 끊임없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윤이서는 마치 지난 8년 동안 비굴했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전에는 모두 그녀가 먼저 하은철에게 전화를 걸며 그의 관심을 끌려했다.그러나 하은철은 단 한 번도 먼저 그녀에게 전화를 지 않았다.설령 그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한다 하더라도 그는 한 마디 관심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윤수정을 위해 그는 몇 번이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정말 컸다.“안 받아요?” 조수석에서 눈을 감고 쉬고 있던 하지환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윤이서는 남자의 완벽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그가 짜증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입을 열기도 전에 맞은편 하은철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이서! 너 당장 병원으로 오지 못해! 지금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너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 수정이는 얼마나 괴로운지 아냐고? 너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어? 나는 이미 너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했는데, 넌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윤이서의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비록 하은철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은철의 마음속에 있는 자신이 그렇게 형편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이왕 이렇게 된 이상…….“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잖아?” 윤이서의 눈빛은 차가워졌다.“난 너의 사랑을 원하는데, 너는 줄 수 있어?”“뻔뻔한 년!”하은철은 그녀를 비꼬았다.“나는 절대로 너 같은 여자 사랑하지 않을 거야! 윤이서, 너 지금 오면 아직 하씨 집안 아
윤이서의 가슴은 놀라움에 줄곧 두근거렸다.마치 바다에서 떠 있다 마침내 부목을 잡은 것 같았다.고개를 들자 그녀는 마침 하지환의 눈빛과 부딪쳤다.그의 눈빛은 더 이상 장난기가 없었고, 오히려 무척 다정했다. 그 순간, 윤이서마저 하마터면 그에게 속아 넘어갈 뻔했다.그녀는 황급히 윤재하와 성지영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놀라서 소파에 주저앉았다.한참 뒤, 윤재하는 먼저 반응하여 고개를 들어 윤이서에게 물었다.“이서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윤이서는 막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하지환은 그녀를 자신의 뒤로 감쌌다.이런 전 없었던,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는 느낌은 그녀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고 이때 귓가에서 하지환의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오늘 금방 혼인 신고를 했는데, 정말 너무 바빠서 두 분께 미처 알리지 못했네요.”윤재하는 화를 참으며 이성을 유지했다.“이서야!”윤이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네, 저 사람 말이 모두 사실이에요. 난 결혼했고, 그 이유는 바로 하은철과 결혼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지영이 달려와 윤이서의 두 어깨를 쥐고 말했다.“이서야, 너 왜 그래? 너 줄곧 은철을 좋아했잖아, 지금 은철이 마침내 너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너 어떻게…….”그녀는 갑자기 경계하며 하지환을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너 솔직히 말해봐, 누가 널 협박한 거 아니야?”성지영이 하지환을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윤이서는 얼른 설명했다.“엄마, 아무도 나를 협박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냥 날 전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그녀는 지쳤다.그리고 더 이상 그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성지영의 손톱은 윤이서의 살에 깊이 파고들었다.“이서야, 너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 네가 은철과 혼약을 맺었을 때부터 우리는 널 그의 미래의 아내로 키웠고, 네가 시집가는 것은 윤씨 가문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지, 그 따위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야!”윤이서는 통증에
하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사람을 조수석에 앉힌 다음 운전석으로 올라왔고 문을 쾅 닫았다.윤이서는 놀라서 몸을 움츠렸고 하지환의 보기 흉한 안색을 슬쩍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화낼 사람은 분명히 그녀인데, 왜 하지환이 그녀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지?다음 순간, 하지환은 갑자기 차에 시동을 걸었고, 차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윤이서는 하마터면 날아갈 뻔했다. 그녀는 안전벨트를 꽉 잡았고, 목소리는 바람에 의해 다르게 변했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하지환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았고, 검은 눈동자는 마치 어두운 밤의 야수처럼 앞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순간, 평범한 아우디 A6는 철장에서 벗어난 맹수처럼 조용한 거리를 거침없이 질주했다.윤이서는 창백한 얼굴로 온 힘을 다해 안전벨트를 잡았고, 큰 소리로 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대한 바람소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그녀의 소리를 삼켰다.그렇게 윤이서는 차츰 발버둥 치는 것을 포기하고 광풍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불도록 내버려 두며 하지환이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3일 전, 그녀는 이미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자살은 너무 아파서 그녀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그리고 그때, 그녀는 부모님이 아무리 자신을 하씨 집안으로 시집가게 만들고 싶어도 하은철의 황당한 요구만 들으면 반드시 자신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이것 또한 그녀가 하지환을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러 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그러나 부모님의 눈에는 윤씨 집안을 다시 정상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의 행복보다 훨씬 중요했다.20여 년의 모든 아름다운 기억은 지금 산산조각이 났다.바람은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향해 불었고, 그녀는 이미 눈물이 다 말랐다.마음은…… 죽었으니까.차 속도는 어느새 느려졌고 윤이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차는 해변에 도착했고, 노을에 물든 모래사장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그들은 마치 작은 검은 점처럼 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