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진 말들은 너무 명확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배인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말하자면 남녀 사이의 그렇고 그런 일이 아닌가?“그래. 그러니까 네가 태어나서 이번 생의 모든 일이 달라졌단 거지? 나와 이우범이 서란이 아니라 너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렇고.”배인호는 내 말을 요약했다. 비록 입 밖으로 내뱉기엔 멋쩍은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나는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 배인호가 내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게 말이다.“맞아요. 그런 셈이죠. 그래서 난 이런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길 원했어요. 하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었죠. 우리의 삶에 겹치는 부분이 워낙 많다 보니 난 아직도 인호 씨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난 더 이상 인호 씨에게 숨기는 게 없어요. 이제야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느낌이 드네요.”배인호는 말을 아꼈다. 그는 운전해서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배인호의 부모님은 여전히 집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손자 손녀를 보지 못한다면 떠나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우리가 돌아온 걸 보자 배인호의 부모님은 곧바로 차에서 내려 우리에게 다가왔다.“인호야, 지영아, 얘기 잘 나눴어?”배인호는 부모님의 초조한 모습을 보더니 명확히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내가 대답했다.“아저씨, 아주머니. 저랑 인호 씨 얘기 잘 나눴어요. 인호 씨는 저랑 아이 양육권을 다투지 않을 거고, 모든 건 지금과 똑같을 거예요. 가끔 아이들 보러 오셔도 돼요. 오시기 전에 미리 저한테 말씀만 해주신다면요. 대신 아이들 앞에서 신분을 밝히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주셔야 해요.”내 말을 들은 배인호의 부모님은 당황했다. 배인호의 엄마는 한참 뒤에야 억지로 웃어 보였다.“지영아, 아이들이 네 성을 따르는 건 우리도 반대하지 않아. 그래도 우리는 아이들이 우리를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부르는 걸 듣고 싶구나. 어떻게 안 되겠니?”그건 배인호 부모님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그들은 예전부터 로아와 승현이를
다행인 건 배인호의 아빠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다른 건 몰라도 배인호 부모님의 인품으로 봤을 때 이제 와 자신의 친손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해도 빈이를 곧장 밀어내진 않을 것이다.그는 빈의 손을 꼭 잡고 인자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빈아, 동생들이랑 같이 놀고 있어.”이 집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 것만 같은 생각에 그제야 빈의 작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는 나름 어른스럽게 로아와 승현이와 함께 놀아주었다. 덕분에 거실의 분위기도 어느새 화기애애해졌다.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즐겁게 논 로아와 승현이는 피곤한 듯 잠이 들었다. 그러나 배인호는 이제야 그들을 나에게 맡기기 아쉬운 모양이다. 아이들도 잠들었으니 이제 그들도 자연스레 떠나야 했다.배인호의 부모님이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기색을 느꼈지만 난 입을 열어 이곳에 더 있으라 얘기하진 않았다.“빈아, 아빠랑 돌아가면 말 잘 들어야 해. 알겠지?”나는 빈이를 배인호에게 맡겨 되돌려보냈다. 곧 그가 민설아를 기소할 날이 다가오기 때문에 빈이는 아무래도 그쪽에 있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빈이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인호를 한 눈 보았다. 그 눈에는 걱정과 불안이 뒤섞여있었다.배인호는 그의 작은 손을 꼭 잡았는데 그의 행동이 나를 안심시켰다.나도 그가 날 안심 시키기 위함이란 걸 알고 있다. 이미 나와 약속을 했으니 당연히 날 위해 빈이의 양육권을 가져와 줄 것이다.--배인호네가 떠난 후 엄마 아빠가 내려왔는데 둘의 표정이 아주 진지했다.다행인 건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끔가다 한숨만 푹 내쉬었다. 부모님이 뭘 걱정하시는지 알지만 지금으로선 배인호를 믿어보는 수밖에.난 배인호와 민설아의 재판이 열리는 날에 일시적으로 구속된 민설아가 경찰 측의 동반하에 출정할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재판 하루 전에 우리 집 초인종이 울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문을 열고 민설아를 보았을 때 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구속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나온 건가?
민설아 같은 이런 인간은 인간성이라는 게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어릴 때부터 그녀를 오냐오냐 키운 어머니 덕에 자신의 언니를 똘마니처럼 삼으면서 큰 탓에 마음의 균형을 잃은 걸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위해 움직이고 그에 대한 보답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까.그녀의 어머니와 언니는 그래도 정상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도 감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민설아는 사랑이라곤 없는 인간 같다. 제 손으로 키운 아이에게 일말의 감정도 생기지 않으니 말이다.이때, 민설아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나를 확 밀어버렸다. 내가 바로 서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허지영.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미친 듯이 나를 탓하기 시작하는 민설아,“내가 아이를 입양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아요? 내가 인호 씨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겠느냐고요.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내가 인호 씨를 잃고 아이를 가질 권리마저 잃은 거라고요!”나는 재빨리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나는 벌렁대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눈앞의 이 미친 여자를 경계했다.“말했죠. 우현 씨와 결혼 했을 때 난 당신의 존재를 몰랐다고요. 제 탓을 한다고 뭐가 달라져요?”“당신만 아니었어도 내가 강물에 뛰어들어 죽은 척했을 리도 없고 죽을 뻔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감염 때문에 자궁을 도려낼 일도 없었을 거라고요. 그랬다면 난 지금쯤 아이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이 불임이라는 얘길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요? 그거야말로 하느님이 날 위해 복수해준 거죠!”민설아의 웃음은 기이하다 못해 정신병자 같았다. 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말을 잇는 민설아,“그런데 인제 와서 다시 임신이 된다고요? 하하하. 내가 당신한테 줬던 게 임신을 못 하게 하는 약이었을 텐데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필 그때 쌍둥이를 낳게 하시고. 그 말은 내가 귀국 한 뒤에도 그쪽은 우현 씨랑 잤다는 거잖아요? 그땐 분명 이혼했을 텐데 왜 잔 거지? 그냥 우현 씨 아이
민설아는 딜런의 얘기만 나오면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하며 어딘가 찔리는듯한 모습이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설마 딜런과 민설아...“됐어요, 인호 씨. 더는 말하지 말아요. 예전에 인호 씨가 이미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으니, 제가 누구랑 함께하는 건 인호 씨가 간섭할 게 아니죠. 근데 내가 와서 인호 씨를 찾은 이유 또한 미련이 남아서도 맞고요, 내가 인호 씨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라고 믿어줘요. 만약 내가 인호 씨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애를 쓸 필요가 있겠어요?”민설아는 딜런에 관해서는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대화 주제를 돌리며, 배인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말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우습기 그지없었다.만약 민설아가 진짜로 배인호를 좋아했다면 어떻게 자기 핏줄로 배인호를 속일 생각을 할 수 있을까?이건 그녀의 사랑이 이미 꼬였고, 변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그래. 너 석방되는 방법이 있는 것 같으니, 내일 법원에서 봐.”배인호도 더는 민설아에게 할 말이 없는지 말투도 엄청 냉담했다. 마치 민설아에게 더는 애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아니면 빈이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란 걸 알았을 때부터 이미 민설아의 진짜 모습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 거기에 해외에서 조사한 그 자료들까지 더하면 충분히 그녀를 혐오하고도 남을 것이다.나는 배인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걸 엄청나게 싫어한다. 심지어 이번 일은 엄청 심각한 것이다!“진짜로 빈이 뺏어가게요? 네?”민설아가 눈시울이 빨개진 채 물었다.“다들 내가 빈이한테 못 해줬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내가 빈이를 직접 키운 거잖아요. 만약 빈이까지 잃으면 난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아이도 낳을 수 없는 거 다 알잖아요? ”조금 전까지 빈이의 실제 신상을 모든 사람한테 알리겠다고 하지 않았나? 자신이 갖지 못하니 배인호와 나도 가질 수 없게 만들더니, 인제 와서 갑자기 빈이를 잃을 수 없다고?
배인호?마지막 의식이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사람은 배인호라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 법정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왜 여기 있는 거지…나는 너무도 힘들어 더는 뭘 생각할 힘조차도 없었고, 마음속의 모든 문제 또한 말을 할 수 없었다.——ICU에서 거의 일주일 동안 있었을 때쯤, 나는 그제야 겨우 회복이 되었다. 그동안 엄마와 아빠는 매일같이 나를 보러 오셨고, 그들은 방호복을 입은 채 돌아가면서 나를 방문해 주셨다. 오히려 배인호가 그날 한 번 본 이후로 더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나는 속으로 민설아의 일을 기소할까 봐 걱정했지만, 그녀는 법정에 서기도 전에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엄마가 알려줬다. 그녀가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 완전한 범죄인지라, 처벌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엄마, 로아와 승현이는요?”나는 일반 병실로 옮긴 뒤 엄마에게 물었다.“집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엄마는 걱정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네 아빠는 네가 병원에 있는 동안 배인호네 집에서 몰래 아이를 어떻게 할까 봐 나랑 같이 병원에 오지도 않으셔. 굳이 혼자 집에서 지키시겠다잖아. 그리고 회사 쪽 일은 요 며칠 신경 쓸 틈도 없었어. 그나마 그 코스메슈티컬이 안정화되고 제일 결정적인 부분도 완성됐으니 다행인 거지.”“인호 씨네 집에서 그렇게 안 할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게다가 나는 배인호네 부모님을 엄청나게 믿고 있다. 그들이 나에게 잘해주는 정도는 우리 엄마와 아빠 못지않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내가 일반 병실로 옮기는 날인데, 이상하게도 배인호네 한 가족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이건 내 착각이 아니라 배인호와 그의 부모님의 나에 관한 관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서 하는 말이다.엄마는 내 이상함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나 또한 엄마 앞에서 배인호네 집안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거니와, 엄마와 아빠는 배인호네 집안사람들을 엄청나게 싫어하신다. 내가 배씨 집안에 대해 신경을 쓰면 엄마와 아빠는 분명히 싫어하실 것이다.엄마는 나에게 오직 로아와
“아니, 민설아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석방될 수 있어요? 이건 말도 안 돼요.”나는 노성민에게 물었다. 이건 모든 절차를 거스르지 않았다면 민설아는 지금 체포된 상태여야 했다.노성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아마도 민설아의 변호사가 뭔가 방법을 생각해 냈을 거예요. 민설아는 오랫동안 해외에서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을 많이 치료해 줬을 테니 아마도 많은 인맥과 수단을 갖고 있을 겁니다.”정아는 눈을 희번덕하게 뜨며 말했다.“이제 보니 배인호와 엮이는 여자들은 모두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 것 같아. 다들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어 아무리 힘들어도 죽질 않네. 서란도 그렇고. 콩깍지 씐 놈들이 또 도와주고 있으니.”정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도 배인호와 얽혀 있어서 그런지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빈이는 지금 어디 있어?”나는 빈이가 어디에 있는지 가장 걱정되었다.“빈이도 외국에 있어. 민설아 그 미친년이 자기가 빈이를 몰래 외국 보육원에서 데려왔다고 인정했어. 딜런은 공범이고. 이제 빈이는 민설아와 배인호 그 누구와도 혈연관계가 아니니까 양육권은 누구도 가질 수 없게 됐어.”나는 마음이 무거워졌고 더 말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배인호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정아와 노성민이 한동안 병실에 머물다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우미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몸이 안 좋아 혼자 있을 수는 없었지만 조금 있다가 엄마가 오기에 걱정하지 않았다.조용해진 병실에서 나는 계속 빈이가 걱정되어 고민 끝에 김미애에게 전화를 걸었다.다행히 김미애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도 내가 독살을 당한 일을 알기에 걱정하며 물었다.“지영아, 괜찮은 거니? 나한테 전화한 걸 보니 일반병실로 이제 옮긴 거야? 어디 아픈 데는 없고?”“아주머니, 저 이제 괜찮아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빈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듣기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범 씨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나는 이우범에게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나에게 이런 큰일이 일어났다는 걸 그도 알고 있을 텐데 한 번도 와서 내게 묻지 않았다. 이건 그의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이우범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대충 둘러댔다.“지금 해외에 할 일이 좀 있어서요.”나는 바로 민설아의 일이 떠올랐다. 설마 그가 아직도 민설아를 위해 일하고 있는 걸까?하긴 두 사람이 한배를 타고 있었으니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 만약 민설아가 또 미친 짓을 버린다면 이우범과 관련된 일도 폭로할 것이고 그에게도 큰 피해가 될 것이다.나의 기분이 나빠졌다. 이우범이 민설아와 손잡은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이우범을 친구로 생각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가 내 편에 서는 걸 선택할 것이라고 믿었다.어쩌면 내 이기심일 수도 있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으면서 당당하게 그 사람의 감정을 이용했고 나를 도와주길 바랐다.나는 마음을 정돈한 뒤 심호흡하며 말했다.“알겠어요. 먼저 일 봐요.”“지영 씨...”이우범은 내게 뭔가를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결국 말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지영 씨 휴식 잘해요. 난 며칠 뒤에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분명 그도 내 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휴식을 잘하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나는 방금 너무한 것 같아 바로 후회했다. 이런 마음 상태로 계속 가면 정말 이우범을 도구로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내가 이용당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이때 의료진이 들어왔다. 의사로 위장한 사람은 잡지 못했다고 했다. 아마도 은밀한 곳에서 옷을 바꿔입은 뒤 병원을 떠났을 것이다.“CCTV에 병원의 모든 출입구로 드나든 사람들을 체크해 주세요.”나는 대답했다. 나는 우지훈이 이 병원에 나타났는지만 확인하면 되었다.이건 아주 심각한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 아주 쉽게 의사로 위장해
“옥패요?”나는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전에 우지훈이 자기가 배씨 가문의 사생아라고 했을 때 옥패가 그 증거라고 했었다. 그의 어머니가 자기에게 남겨준 것이고 배건호가 자기 어머니에게 사랑의 증표로 준 것이라며 밝혔었다.설마 전에 배인호가 해외로 나간 것이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였던 걸까?그때 나도 그와 연락이 닿지 않았었지만 급하게 그에게 연락할 일도 없었다.“응. 이 일은 돌아가서 다시 얘기하자. 민설아의 이쪽에서의 배경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래서 여기에 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넌 로아와 승현이 잘 돌보고 있어. 너희 집 경호할 사람들은 내가 보낼게.”배인호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걱정하는 그의 마음은 알겠지만 그는 지금 해외에 있었고 이쪽 상황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고용해 나와 아이들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었다.나도 그 점은 그가 신경 쓰지 않게 꼭 최선을 다할 것이다. 어느 누구 보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이들의 엄마인 나였다.현재 우리 사이의 대화는 모두 각자가 처리해야 할 일들을 위주로 이어졌다. 분위기도 마치 친구 같았고 어떠한 감정의 얽매임도 없는 이런 느낌이 나는 아주 편했다.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서는 아이들의 일에 대해 그에게 평생 먼저 친아빠라는 걸 밝히지 말라고 한 것이 나는 미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그저 이 모든 것이 그가 나에게 해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전생에 그가 나에게 준 모든 상처를 생각하면 이런 것 들은 모두 당연한 것이었다.전화를 끊었지만 나는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엄마가 언제 돌아왔는지도 몰랐다.방금 나와 배인호의 대화를 엄마는 모두 들은 것 같았다. 안 좋은 표정으로 침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지영아, 너 빈이 그 아이 입양할 거니?”나는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네? 엄마 나...”이런 계획은 있었지만 부모님께 말하지는 않았다. 두 분이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 로아와 승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