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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정말 운명인가

“아이고, 너 대체 무슨 일이야? 인호가 서운하게 했어? 내일 내가 인호 찾아가서 우리 딸 괴롭히지 말라고 따끔하게 혼내야겠네......”

엄마가 깜짝 놀라시면서 달려와 나를 안아 주셨다.

“엄마, 인... 인호 씨가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가 잘해주니깐 내가 너무 감동 받아서...”

나는 엄마의 허리를 끌어안고 울먹이며 말했다.

배인호가 괴롭힌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은 나의 미련한 희망 때문이었다. 그는 잔인한 악당이었고 나는 어리석게 그를 사랑하는 여자였다.

엄마는 나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나뿐인 딸인 나를 엄마는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배인호 때문이라는 걸 엄마가 모를 수 있을까?

나는 울보가 아니다. 억울한 일만 없으면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삼계탕 먹을 거야?”

“먹을래요. 너무 먹고 싶었어요...”

나는 눈물을 닦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엄마의 팔짱을 끼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빠는 이미 주무시는 것 같았다. 식탁에서 엄마와 둘이 앉아 오붓하게 얘기하며 맛있게 삼계탕을 먹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반 마리를 해치웠다. 요 몇 년 사이 너무 적게 먹었는데 갑자기 많이 먹으니 체해서 토할뻔했다.

엄마는 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왜 그렇게 많이 먹어. 그러다 불편해서 잠 안 올 수도 있어.”

“너무 배고파서요.”

나는 바보처럼 웃었다. 이렇게 맛있게 먹은 적이 정아 그리고 다른 애들과 함께한 졸업 파티에서였다. 졸업한 뒤 배인호와 결혼했고 그 뒤로는 원망만 가득한 여자의 삶을 살았다.

“배고파도 천천히 먹어. 적당히 먹는 게 제일 좋아.”

엄마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팔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엄마, 오늘 나랑 같이 자요. 건강 상식도 가르쳐주고!”

엄마가 그러자고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음날 일어나니 전례 없이 개운했다. 잘 먹고 잘 잘잤고 집에서 아침밥까지 먹고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기선우는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다리는 뼈까지 다친 건 아니지만 피부 손상이 심해 꿰매고 붕대가 두껍게 감겨져 있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누나, 어떻게 오셨어요?”

기선우가 나를 보고 놀라면서도 조금 미안해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렇게 자주 찾아오지 않아도 되고요.”

그럴 순 없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이 기사에게 부탁했다.

“이 기사님, 갖고 들어와 주세요.”

이 기사는 영양제가 잔뜩 담긴 쇼핑백을 기선우의 침대에 올려 두었다. 기선우는 이렇게 많이 사 올 줄은 몰랐는지 놀라면서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보였다.

“누나, 저 가벼운 타박상이에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인데, 타박상도 다친 거죠.”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싱긋 웃었다.

“맞다, 근데 저 아직도 누나 이름을 모르더라고요. 이름이 뭐예요?”

기선우가 갑자기 물었다.

“나는 허지영이라고 해. 지영누나라고 불러도 돼.”

나는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누나라는 단어가 전혀 늙어보이지 않았다. 내가 기선우 보다 6살이나 많으니 당연히 그렇게 부르는게 맞았다.

기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지영누나.”

나는 병실에서 기선우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눴다. 대학생이라 아직 생각이 단순하고 순진했다. 기선우는 건축학과 3학년이었고 지금은 방학이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보태는 모범생이었다. 그는 귀엽고 예쁜 여자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꿈은 졸업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결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얼른 멈췄다.

기선우는 이상했는지 나에게 물었다.

“지영누나, 왜 웃어요?”

나는 콧끝을 가볍게 문지르며 봄바럼처럼 나긋하게 말했다.

“ 아니, 그냥... 널 보니까 나 대학 다닐 때가 생각나서. 그때가 참 아름웠지 하는 생각이 드네.”

“누나는 어느 대학 나왔어요?”

기선우는 궁금한지 물었다.

나는 그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서울대.”

아마도 나와 배인호는 서란과 기선우의 선배일 것이다.

기선우는 내 예상대로 기뻐하며 말했다.

“누나 우리 같은 학교네요. 누나가 제 선배예요.!”

나도 기쁜 척 말했다.

“그래? 인연이다 그렇지?”

서울시에 대학이 많았지만 서울대는 전국 3위 안에 드는 학교였다. 서울대에 합격한 학생은 집안 배경이 대단하든가 머리가 엄청 좋다든가 그 중 하나는 되어야 들어올 수 있었다. 졸업하고 나면 전도유망했고 큰 부자가 못 되어도 중상위층 정도의 생활은 할 수 있었다.

만약 서란이 배인호를 만나지 않았다면 기선우의 꿈은 거의 실현 가능했을 것이다.

그와 서울대 이야기를 한창 재밌게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명랑한 목소리로 외치며 들어왔다.

“선우야! 나왔어!”

그 말을 듣자, 귓가에 전생에 배인호가 쓰던 특유의 익숙한 벨소리가 다시 울리는 것 같았다. 똑같은 목소리에 똑같은 말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서란은 흰색 쉬폰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까만 머리는 자연스러운 컬을 넣은 채로 풀고 있었다. 청순함에 여성미를 더해 한층 더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겉모습이 질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20살이라는 어여쁜 청춘에서 흘러 넘치는 생기발랄함을 보니 마음이 쓰려왔다.

나는 20살 때 이미 배인호를 3년 동안 짝사랑 했고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몹쓸 짝사랑으로 흘려보냈다.

왜 똑같은 나이에 서란은 배인호를 만나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나는 고작 숨어서 일기장에 집착을 담아 끄적였던 것일까?

“란아!”

서란을 본 기선우의 얼굴이 행복함으로 차올랐다. 하지만 금세 미안해했다.

“휴, 너 올 줄 알았으면 알려주지 않는 건데. 괜히 너 걱정하게 했네.”

서란은 과일을 들고 마치 한 마리의 백조처럼 사뿐사뿐 걸어왔다.

“바보야? 다쳤는데 왜 얘기를 안 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서란에게 양보했다.

나는 평온했다. 곧 있으면 의자가 아닌 배인호도 그에게 내어줘야 하는데 고작 의자가 뭐 그리 중요할까?

“언니! 언니였어요?”

서란은 나를 알아보고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여기 있어요?”

'내가 너의 사랑스러운 남자친구를 다치게 했어.'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 내가 접촉 사고를 내서 선우가 다쳤어. 오늘 괜찮나 보러 온 거야.”

서란은 나를 보다 또 기선우를 보며 누구도 탓하지 않고 웃었다.

“인연이네요. 선우야, 이분 요즘 우리 카페에 자주 오는 손님이야. 좋으신 분인데, 어쩔 수 없이 사고가 났나 봐.”

그녀의 선량함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우연한 사고가 맞겠지만 나는 일부러 사고를 낸 것이다.

“나도 알아. 지영누나가 일부러 사고 낸 거 아닌 거. 나한테 과하게 보상해 주셨어. 오히려 내가 미안할 정도로.”

기선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안되지. 보상받을 만큼만 받아야지.”

서란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언니, 죄송하지만 계좌번호 알려주세요. 제가 돈 돌려 드릴게요.”

아마도 이렇게 바르고 큰 욕심 없고 돈을 돌 보듯 하는 성격이 배인호를 사로잡은 것일까? 돈에 찌들지 않은 여자애의 눈이 맑게 빛났다.

내가 졌다. 매일 입고 걸치는 명품들은 서란앞에만 서면 초라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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