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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세상은 참 좁다

말을 마치고 나는 술기운에 그대로 잠들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잠을 자는 게 주사였다. 나는 배인호가 차에 그냥 나를 두고 내릴 줄 알았는데 이튿날 깨어보니 내 방 침대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로 잠든 나를 안아서 방으로 옮겨 준 것이다.

나는 머리가 아팠다. 겨우 일어나서 샤워하고 옷을 바꿔 입으니 좀 살 것 같았지만, 배가 고팠다.

나는 배인호가 집에 없을 줄 알고 속옷도 입지 않은 채 실크 잠옷만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먹을 것을 준비하려 했다.

아래층으로 절반쯤 내려왔을 때 소파에 두세 명이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배인호도 있었다. 손에 포카 카드를 들고 나를 보더니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

“헉,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노성민은 옆에 있는 남자의 고개를 손으로 누르며 같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급하게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으며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배인호가 요즘 뭘 잘 못 먹은 건가? 왜 매일 집에 들어오는 거지?’

나는 옷을 바꿔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세 사람은 카드 게임을 그만두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배인호에겐 몇 안 되는 친한 친구들이 있었다. 나도 다 아는 사이었지만 친하진 않았다. 노성민, 이우범, 박준. 모두가 알아주는 재벌 집 자제들이었다. 하지만 이우범은 조금 달랐다. 그는 가업을 이어받지 않고 의사를 선택했다.

이들은 모두 배인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나를 배인호의 와이프로 생각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이우범을 제외한 그의 친구들은 그가 서란을 꼬시는 걸 도와주었다.

세 사람은 내가 내려와 주방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도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계란국을 끓였다.

“가자.”

배인호는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했다.

노성민과 박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인호와 함께 떠났다. 밖에서 들리는 차 엔진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밥을 먹었다.

아침을 먹고 나는 간단하게 화장하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오늘은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이다. 갔던 김에 기선우도 보고 와야겠다.

병원에 도착해서 나는 순서대로 검사받았다. 유방 검사에서는 다행히 아무 문제도 없다고 했다. 나는 검사가 끝나고 기선우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이 선생님, 퇴근하고 같이 저녁 드실래요?”

기선우의 병실로 가는 길에 간호사 분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 이우범이 흰 가운을 입고 서있었다. 훤칠한 키에 단정하게 생긴 얼굴, 배인호 친구 중에서 보기 드문 모범생이었다.

같이 노는 부잣집 도련님들은 모두 한량이었다. 이우범 혼자 의학에 종사하고 평소에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게임만 할 뿐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걸 본 적 없었다. 하지만 훗날 서란에게 반해 죽기 살기로 쫓아다녔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기선우의 병실로 향했다. 서란도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라니야, 나 다리만 조금 다친 거야. 손을 다친 게 아니라. 내가 먹을 수 있어.”

기선우는 서란과 아주 꿀이 뚝뚝 떨어졌다. 기선우는 서란이 먹여주는 사과를 먹으며 말했다.

서란이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

“왜? 내가 너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게 싫어?”

“좋아, 좋아, 너무 좋아. 난 우리 라니가 제일 좋아.”

기선우는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웃었다. 눈엔 침대 옆에 앉은 아름다운 그녀로 가득했다.

나는 마른 기침을 하며 그 둘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했다. 기선우는 깜짝 놀랐다.

“누나, 또 오셨어요?”

서란을 서둘러 의자를 나에게 내주었다.

“언니 앉으세요.”

서란의 티 없이 맑고 하얀 얼굴은 요즘 더 예뻐진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좀 전의 이우범이 생각나 서란의 손을 잡고 그녀를 끌고 병실을 나왔다.

“언니, 왜 그러세요?”

서란은 깜짝 놀라며 나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이우범은 왜 이렇게 빨리 사라졌지?’

나는 조금 실망했다. 전생에서 배인호가 서란을 만나고 이우범은 배인호를 통해 서란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우범이 먼저 서란을 만난다면 달라질까? 그도 배인호처럼 서란에게 첫눈에 반할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서란을 보고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아는 의사 선생님 한 분을 소개해 주려고 했어. 실력이 좋으셔서 선우 실밥 제거할 때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네.”

“언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선우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에요.”

서란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걔도 어른인데 이 정도 상처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농구하다가 하도 많이 다쳐서 익숙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 다음번에 기회를 봐서 서란과 이우범을 만나게 해줘야겠다.

여자친구가 있으니 기선우와 더 오래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나는 몇 분 정도 더 머물다가 병실을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한의원에 들러 한약을 다시 지었다.

“이 기사님, 가사도우미분들은 구하셨어요?”

나는 차로 돌아와 이 기사님에게 전화했다.

“사모님, 제가 지금 댁으로 데려가는 중입니다.”

“네, 알겠어요.”

반 시간 후 나는 청담동에 도착했다. 이 기사와 가사도우미분들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한창 바쁘게 일을 나눠 주고 있었다. 이 기사가 정리해 주니 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이 기사는 가사도우미분들을 소개했다. 모두 예의를 갖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약을 제일 단정한 분에게 맡겼다.

“한약 좀 달여 주실래요?”

나는 말을 마치고 들어가서 쉬었다.

잠시 후, 가사도우미분이 한약을 달여 내게 가져다주며 공손하게 말했다.

“사모님, 한약 달여 왔습니다.”

나는 테이블 위의 까만 한약을 보다 가사 도우미분의 얼굴을 보고 친절하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사모님 제 이름은 윤선입니다.”

“알겠습니다. 편하게 윤 집사님이라고 부를게요. 잘 부탁드려요.”

나는 나이스하게 미소를 지으며 악수했다.

“일 보세요.”

윤 집사님은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그녀의 미모와 몸매가 서란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세상에 곧 무너질 듯한 도미노처럼 이런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남자 한 번 꼬셔 보려다가 서란의 남자친구를 만나고 가사도우미분을 구하니 서란의 엄마? 나는 이 기사님에게 문자를 보내 가사도우미분들의 이력서를 보내 달라고 했다. 그중에서 윤 집사님의 자료를 찾아보았다. 긴급 연락처에는 보통 부부의 이름을 적을 것이다.

나는 긴급 연락처에 적힌 이름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윤선, 서중석. 두 이름이 익숙했다. 전생에서 서란을 조사했을 때 별로 큰 수확은 없었지만, 그녀의 부모님 이름은 알아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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