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환청 같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다시 누우려고 할 때 다시금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가로 살금살금 다가가 문에 귀를 대고 밖의 소리를 들으려 했지만 밖이 고요했으므로, 나는 긴장한 채로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세요?”밖에서 벅찬 소리가 들렸다. “저예요!”나는 귀를 의심했다. 졸음이 순간 싹 가셨다.내가 벙찐 채로 대답하지 않자 그가 다시 한번 반복했다. “저예요, 지아 씨. 문 열어요!”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이 목소리 왠지...’나는 맨발로 침대에서 뛰어내려 비틀거리며 달려갔다.문가로 가서 작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더니 문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서 있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새도 없이 빠르게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한껏 지쳐 보이는 배현우가 내 앞에 서서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다. 이것이 꿈일까 봐 조금 두려워져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어떻게 왔어요...?”사실 어떻게 왔는지는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저 그의 따뜻한 품에 안겨 그립던 그의 심장박동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감성보다 이성이 앞섰기에 나는 할 수 없었다.그가 나를 보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지아 씨가 있는 곳엔 제가 당연히 있어야죠. 왜요. 싫어요?”그는 내 당혹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크게 벌려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빨리 들어가요.”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가 들어갈 수 있도록 비켜주었다. 밖의 찬 공기가 그와 함께 따라 들어왔다. 그가 맨 발인 나를 보고는 눈썹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땅이 이렇게 찬데 슬리퍼라도 신어요, 어서.”부드러운 눈빛에 내가 듣고 싶었던 따뜻한 말.피곤함이 섞인 낮은 목소리에 가슴이 또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나는 얼른 슬리퍼를 찾아 신었지만 당황하여 로봇처럼 삐걱삐걱하였다.그가 자연스럽게 외투를 벗자 나는 얼른
다음날.정오가 되어서야 우리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진사원의 연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나를 꼭 껴안고 놔주지 않았다.나는 그에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고 저녁에는 반드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그제야 그는 껴안았던 팔의 힘을 빼고 함께 일어났다.함께 점심을 먹자는 그의 말에 나는 또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와의 이런 관계가 도대체 어떤 관계이며,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는 관계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우리 사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망설임이 없지만, 그는 나에게 확실한 약속을 한 적도 사랑의 맹세를 한 적도 없었다. 정상적인 교제 관계로 정의 내리기는 더욱이 이상했다. 그럼 나는 도대체 그에게 어떤 존재인가?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에 빠지는 물음이다.그러나 매번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마치 N극과 S극의 자석이 자연스레 끌리게 되듯 나는 싫은 내색 한번 없이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모두 받아주게 되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낀다.그는 나에게 원하는지도 묻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할 뿐이다. 본인의 마음 가는 대로.그래서 나는 감히 그에게 관계에 대한 정의를 내려달라 말할 수도 없다. 내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까 봐.서울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는데 나는 피곤한 나머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속상한 얼굴로 나를 보며 안타깝게 고개를 저으셨다. “지아야, 이렇게까지 희생하면서 일하는 이유가 무엇이니? 아니면 우리 가족 모두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 인생도 짧은데 안일하고 즐겁게 보내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어?”안일하고 즐겁게 보내는 것은 모두가 바라는 행복한 삶일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고.그러나 나는 서울에 너무 많은 아쉬움과 애정이 남아있다.이미 활이 시위에 당겨져 있는데 어찌 활을 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잃은 10년의 청춘은 나 스스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전체 프로젝트의 계
그들은 동시에 일어섰다. 그 여자는 배현우와 대화를 하며 손을 뻗어 팔짱을 끼려 했다. 그녀는 오만한 시선으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화려하게 이쁜 건 아니었지만 수수하면서도 뿜기는 기운이 남달랐다.배현우는 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예민한 그 여자는 배현우의 눈길을 따라 내 쪽을 보았고 그녀는 마치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표정이 매우 안 좋았다. 나는 잘못 본 게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녀의 표정은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내가 어리벙벙해 있을 때 배현우는 덤덤하게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갈 때쯤 그 여자는 다시 한번 나를 째려보았다.이미연은 내가 배현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눈치챘는지 소리 높여 말했다. “가자! 내가 보니까 너 술 몇 잔 마셔야 할 거 같은데, 빨리 가자!”나는 곧바로 찬성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술이라도 좀 마셔서 머리를 맑게 하고 싶었다.이미연은 차에 나를 태우고는 다크바로 갔다. 솔직히 말하면 좀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위스키 두 잔을 시켰고 위스키에 대해선 잘 몰랐던 나는 그녀가 주는 대로 받아서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바텐더에게 한 잔을 더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야! 천천히 마셔! 취하고 싶은 거야?” 이미연은 소리치며 나를 말렸다. “천천히 음미해 봐. 취해가는 과정을 느껴야지. 지금 넌 빨라도 너무 빨라!”나는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를 뀌었다. 과정? 나한테 지금 남은 건 과정밖에 없는데!“아 맞다, 장영식에 대해 알려준다는 걸 깜박했네!” 이미연은 반쯤 엎드린 채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사해 보니까 이력서에 쓴 거랑 별 차이는 없었어. 이제 귀국한 지 한 달도 안 됐던데?”옆에서 들려오는 음악의 소리가 아주 시끄러워 나는 문제 없다는 한마디밖에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술 두 잔을 들이켜자 배가 뜨거워지면서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뒤끝이 이렇게 심할 줄 예상하지 못했다.나는 아직 정신이 남
’쌔앵’ 소리가 내 뒤통수 뒤로 들려왔다. 나는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과는 다르게 그저 ‘쨍그랑’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술이 반쯤 깬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남자는 책상 위에 습격당한 사람처럼 드러누워 있었고 그 옆에는 사나운 표정을 한 배현우가 서 있었다.그 남자는 화를 내며 다시 일어나 배현우를 향해 돌진하려 했다. 그러자 배현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 남자는 아파하면서 소리를 질렀다.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몰렸다. 배현우는 다짜고짜 내 손을 잡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이미연도 허겁지겁 우리의 가방을 챙기고는 뒤따라 나왔다.“한지아 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런 곳에 다 오고. 심지어 술까지 마셔요?” 그는 사나운 얼굴로 말했다.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금 일 때문에 놀라서 몸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는데 그의 사나운 표정을 보니 진정이 됐다. ‘하! 아까 식당에서는 방긋방긋 잘도 웃더니 여기 나한테 오니까 얼굴색이 싹 변하네.’“지아야, 너 괜찮아?” 이미연은 한바탕 내 몸을 훑어보고는 배현우를 향해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여기에 오자고 했어요.”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다 마신 마당에 누가 제안했는지 알 게 뭐야.’ 나는 이미연을 보면서 명령하는 식으로 말했다. “괜찮아, 우리 집에나 가자!”이미연은 살짝 민망한지 나와 사나운 표정을 한 배현우를 이리저리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면... 그 현우 씨가 지아 좀 데려다줄래요? 우리가 다 술 마시는 바람에 차를 몰수가 없어요.” 배현우는 차갑게 그저 “네.” 한마디만 뱉을 뿐이었다.이미연은 무슨 명령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나는 이미연을 향해 크게 욕을 했다. “...야! 이미연, 우리 사이가 이렇게 밖에 안됐냐? 저기...”나는 이미연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배현우는 긴 팔을 뻗어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눈앞이 어지러워져 비틀거리다 배현우의 가슴팍에 부딪혔다.나는
나랑 함께? 혹시 어장관리 같은 걸 하는 건가? 오늘같이 있었던 그 사람이랑은 무슨 사이일까?생각하다 보니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픽 웃음이 나왔다. 내가 뭐라고 그가 누구랑 뭘 했는지 간섭하는 건지... “왜 웃어요?”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물었다.“배 실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실장님이랑 함께 술을 마시겠어요? 그럴 담까진 없어요!”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나는 확실히 배현우와 술을 마시면 안 됐다. 내가 뭐라고. 방금 이혼하고 남한테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나와 배현우 씨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 보니 정말 아늑했다. 내가 너무 가슴 아플 정도로 하찮았다.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오늘도 그렇고...‘나 감정 기복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이제 감정 정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누굴 좋아하는 거야? 하...’“왜 갑자기 말이 없죠?” 내가 조용해지자 배현우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현우 씨 생각엔 지금 어떤 말을 하면 좋을 거 같나요?” 나는 그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물어볼 거 있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껏 물어봐요!”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어볼 거 없어요.”나는 마음속으로 이게 맞다 생각했다. 나는 그런 걸 물을 자격이 없었으니까.“쳇. 왜 안 물어봐요? 아까 그놈, 제 사촌 동생이에요!” 그는 내 이미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말해요. 저 안 물어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누가 현우 씨랑 같이 있든 그건 현우 씨 자유지, 제가 간섭할 자격은 없죠!” 나는 일부러 센 척 했지만 속으로는 너무 안심되고 후련해졌다. 문득 아까 그 여자의 눈빛이 생각났다. 왜 그런 눈빛으로 봤을까? 우리가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그녀는 몇 년 못 본 사람을 봤다거나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봤을 때 나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었다.“어떻게 해야 지아 씨가 자격이 생기죠?” 그는
사촌 동생이랑은 이제 나랑 상관이 없고 다신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른 시일 안에 그녀와 또 마주치게 되었다...월요일, 장영식은 정식으로 일을 시작했고 그는 우리에게 매우 큰 힘이 되었다. 나와 일을 나눠 가짐으로써 내 어깨 우의 부담도 절반 줄어든거 같았다.절대 사람을 의심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장영식에게 신흥건재의 모든 발전사부터 시작해서 현재 위기까지 모두 상세히 알려주었다. 장영식은 신흥을 아예 다시 하나 만드는 게 빠를 거 같다며 나를 비꼬았다.화요일에는 천우 그룹에 가서 회의를 진행했다. 거기서 배현우는 보지 못했지만 배현우의 사촌 동생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깔끔하고 정교한 정장을 입고 우아한 아우라를 뿜기며 회의에 참여했다.나는 회의하는 동안 그녀의 시선 때문에 매우 불편했다. 그녀는 쭉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회의를 끝마치고 나는 이해월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가려 했고 이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러세웠다. “한 대표님!”잠시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니 배현우 사촌 동생이 웃으며 걸어오는 것이었다. “한 대표님 맞으시죠?”“네! 한지아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여긴 천우 그룹 안이고 기본적인 예절은 꼭 지켜야 했으니까.“이세림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더니 계속 놓지 않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그녀는 매우 열정적으로 손을 꼭 잡으면서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살짝 미소를 띠고 물었다. “제가 한 대표란 거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저를 아세요?”“... 아뇨. 그냥 제 촉이 그쪽이 한 대표님이라고 말하는 거 같았어요. 한 대표님 정말 이쁘세요! 어딘가 익숙하기도 하고요!” 왠지 무언가를 감추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솔직히 생각 못 했어요. 천우그룹의 이렇게 큰 프로젝트 합작 파트너가 여자일 줄은. 그만큼 한 대표님이 우수하다는 거겠죠! 저도 대표님을 따라 배우고 싶어요!”그녀는 아부하는 거 같았고 나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운이 좋았죠!” “그 연락처를
계획을 꾸리던 중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서두르지 말자... 지금은 비록 남이지만 그래도 전엔 부부 생활을 함께하던 사람이었는데... 모든건 언젠가 자기의 위치를 찾아서 제대로 돌아갈 테니 굳이 이렇게까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나서기엔 좀 서두르는 감이 있었다.그동안 나는 많은 생각을 했고 마음을 정리했다. 특히 지금은 장영식이 내 부담을 확 줄여 주어 내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고 그래서인지 전에 그렇게 원망스러웠던 마음도 많이 사그라져 신호연에게 감성팔이를 할 바엔 차라리 내 사업이나 더 발전시키자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신호연은 우리 콩이의 아빠니까. 개가 나를 문다고 해서 나도 개를 물면 안 된다고 나도 그냥 신호연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리고 신호연이 우리 쪽에서 딱히 이득을 본 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이런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넓게 보는 게 맞는거라 생각하며 자기 위안을 했다.내가 이렇게 그냥 자기 위안을 하고 있을 때 신호연은 나를 궁지에 몰고 있을 줄 생각도 못 했다.그 후 연이어서 이러한 일들이 발생했고 우리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공급상이 없어 아무것도 진행할 수 없었다. 그 후 장영식이 신흥 쪽에서 또 큰 공급상들과 계약을 했다는 소식까지 들고 오면서 이런 국면을 바로 잡는 게 더욱 힘들다는 게 느껴졌다.내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됐다. 나는 직접 공급상들을 찾아다니면서 상담을 했고 회사는 장영식에게 맡겨두고 필사적으로 공급상을 구하러 다녔다. 장영식은 알아서 우리 회사를 잘 책임져 주었기에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다.배현우 그쪽도 마찬가지로 바쁜 거 같았다. 우리는 각자 바쁘게 지내면서 연락도 거의 안 했다. 그저 이세림과 두 번 정도 안부를 나눴고 회의할 때 가끔 마주쳤다.그녀는 지금 천우 그룹의 견습 주임이었고 말로는 본부에서 파견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본부와 관계가 있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나는 출장 갔다가 금방 일산에서 돌아와 KTX에서 내리자마자 이세림이 나보고 어디냐고 연락
뭐라고? 배현우도 온다고?“근데 오빠는 아마 조금 늦게 올 거예요. 오빠가 평택에 갔다가 지금 돌아오는 길이어서요. 그렇다고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까 먼저 먹으면 돼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바로 전에 현우 오빠가 갑자기 전화 와서 뭘 먹을지 묻길래 그냥 지아 씨랑 먹는다고 하니까 자기도 오겠다길래 그러라고 했어요. 혹시 불편한 건 아니죠?”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요! 괜찮죠!”‘정말 괜찮나?’ 사실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이 순수하고 무해한 이 사람을 상대로 불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다행이네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메뉴판을 나에게 건넸다. “제 것은 이미 다 골랐어요. 같이 밥을 먹는 게 처음이니까 지아 씨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여기 보면서 골라봐요!”그녀는 정말 열정적이고 솔직하고 숨김없는 사람이었다. 처음 봤을 때 그 오만하고 차가웠던 인상과는 정반대였다. 난 그때 그녀가 일어서서 주변을 훑어볼 때의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나는 먹고 싶은 요리들을 고른 후 웨이터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이세림에게 말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연락 못 했네요. 죄송해요.”“에이, 무슨! 미안할 필요 하나도 없어요. 바쁜 거 다 알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듣기 좋았다. “저는 지아 씨가 너무 존경스러워요! 자기 회사를 다 차리고 너무 대단한 거 같아요!”나는 그저 웃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휘청거리며 거의 무너져 가는 회사가 누군가의 존경 대상이 된 게 웃기고 놀리는 거 같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 죄가 없었다. 우리가 주문한 요리들이 나왔고 나는 이세림을 보며 물었다. “정말 배 실장님 안 기다릴 거예요?”“실... 실장님?” 이세림의 눈은 휘둥그레졌지만 곧바로 표정 관리를 하고는 말했다. “아... 기다릴 필요 없어요!”나는 뭔가 잘못 말한 거 같았다. “저... 혹시 뭘 잘못 말한 건가요?”“아... 아뇨! 기다릴 필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