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임유진은 강현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서서히 입을 열었다.“나는...”하지만 이제 막 입을 열려던 찰나 강현수의 손이 입술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입술 위로 전해지는 그의 시원한 체온에 임유진은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강현수는 간절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했다.“오늘은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요. 이 드레스를 입은 채로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요.”그 눈빛이 너무나도 애절해 보여 임유진은 결국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켜버리고야 말았다.“집에 데려다줄게요. 여기서 택시 기다리는 것보다 빠를 거예요.”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현수와 함께 파티장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출구 가까이에 다가가 보니 검은색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가득 모여서 심각한 얼굴로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그중에는 무전기를 든 사람도 있었고 상황을 보아하니 큰일이 터진 것 같았다.이상함을 감지한 강현수가 그들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이죠?”“그게... 누군가의 경호원들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밖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다 돌려보내고 이제는 주차장 입구까지 전부 다 막아버렸습니다.”경호실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난감한 얼굴로 보고했다.그 말에 강현수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오늘 이 자선 파티의 메인 주최자는 강현수이지만 그가 대표로 있는 KS 그룹 말고도 이름만 대면 알 정도의 대기업 인사들도 함께 힘을 보탠 파티이다.그러니 여기서 일을 벌인다는 건 그 많은 회사를 한꺼번에 상대하려는 것과도 같다.S 시에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누가 이런 짓을 한 건지 지금 당장 확인해보세요.”강현수의 말에 경호실장은 서둘러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흐른 뒤 그는 다시 강현수 앞으로 다가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이곳을 봉쇄한 사람은... GH 그룹의 강지혁 대표라고 합니다.”역시 S 시에서 이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강지혁뿐이었다.강현수는 그 말을
뭐라고 정확하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시선을 받는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심지어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멀리, 아주 멀리,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그때 잔뜩 움켜쥔 주먹을 누군가가 부드럽게 잡아 왔다.“무서워요?”임유진은 강현수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떨고 있는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강현수는 그녀에게 안심이라도 주려는 듯 손을 꽉 잡았다.“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내가 계속 옆에 있어 줄게요.”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고 그렇게 서서히 손 떨림도 멎어갔다.강지혁은 두 눈을 줄곧 그녀에게 고정한 채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마치 이곳에 온 목적이 그녀인 것처럼 말이다.설마 아니겠지...임유진은 자기가 괜한 생각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지난번 별채에서 그와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고 자신의 마음을 똑똑히 전했으니까.게다가 그가 정말 그녀를 찾아온 것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큰 움직임을 보일 필요는 없다.강지혁은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이윽고 임유진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입꼬리를 예쁘게 위로 말아 올리며 물었다,“네가 이런 파티를 좋아할 줄은 몰랐네. 그런데 왜 벌써 가려고 그래? 더 있다 가지 않고.”강지혁은 그녀와 두 눈을 마주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평범하게 말을 걸어왔다.하지만 임유진은 오히려 털이 쭈뼛서는 느낌이었다.가까워진 거리로 인해 그녀는 강지혁의 두 눈에 어린 분노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그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강지혁,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그때 강현수가 입을 열었다.“사람들까지 끌고 와서 대체 뭐 하자는 건데?”“뭐하긴. 내가 찾는 사람을 네가 데려가 버리지 않게 막으려는 거지.”강지혁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흠칫했다.설마 그가 말한 찾는 사람이라는 게 자신인 걸까?그녀의 질문에 답해주듯 강지혁은 다시
경호원들 중 누구 한 명 이 상황에 개입하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앞에 있는 두 남자 모두 S 시의 꼭대기에 있는 남자들이고 그 두 사람 사이에 낀다는 것은 목숨이 여럿 있어도 부족할 게 분명했으니까.“그래, 그런데 그게 뭐?”강지혁은 차갑게 대꾸했다.임유진은 그런 그를 힘껏 노려본 뒤 서둘러 강현수의 손을 감싸 쥐고 말했다.“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파티장 안에 의사 있죠?”돌발 상황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기에 이런 파티가 열릴 때면 의료진들은 항상 파티장 안에 대기하고 있다.“괜찮아요. 조금 부러진 것뿐이에요.”강현수는 그녀의 걱정에 괜찮다는 말부터 했다.생각해보면 어릴 때 산속에서 다리를 다친 뒤로 이런 식의 골절은 오랜만이었다.그래서였을까, 지금은 이런 생각할 상황이 아닌데도 당시 감옥 안에서 임유진이 손가락 골절로 얼마나 아팠을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남자와 여자는 태생부터 피지컬 적인 차이가 있기에 남자인 자신도 이렇게 아프니 여자인 임유진은 최소 이것보다 10배는 더 아팠을 것이 분명했다.임유진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강현수가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자기 때문이었으니까.“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대체. 지금 당장 치료 안 하면 나중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은 그녀의 팔을 홱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이에 임유진의 몸은 잠깐 굳어버렸다가 곧바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혁, 이거 안 놔?”강지혁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뒤돌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수가 임유진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데 강지혁의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를 막아섰다.파티장 경호원들이 많다고는 하나 작정하고 이곳으로 온 강지혁이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파티장 경호원들은 강지혁이 데려온 사람들 손에 묶여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강현수는 다친 손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산속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그는 어릴 때부터 줄곧 각종 운동을 해왔었고 그 목적은 다시
까만 눈동자가 멀어져가는 차량의 뒷모습을 찢어 죽일 듯이 보고 있다.강현수의 얼굴은 초조함과 분노가 뒤섞여 엉망이 되었다.강지혁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은 무조건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증명하려는 건가?한편, 차량 뒷좌석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진 임유진은 몸을 절반 정도 일으키며 물었다.“강지혁,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왜.”그녀의 옆에 앉은 남자는 차갑게 웃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마치 뜨거운 불과 차가운 얼음이 그대로 공존하는 것 같은 눈동자에 임유진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몸을 움찔 떨었다.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몸을 기대오더니 두 팔을 시트 위에 올려놓고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감싸다시피 했다.그와 동시에 앞 좌석과 뒷좌석을 연결하는 부분에 가림막이 내려오더니 공간을 철저히 분리해버렸다.지금 두 사람이 있는 뒷좌석은 온전히 독립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이에 임유진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강지혁은 얼굴을 점점 더 그녀 가까이 가져가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강현수가 그렇게도 좋아? 그래서 걔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고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었던 거야?”그의 얼굴에는 질투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그렇다. 강지혁은 지금 질투하고 있다. 그것도 미칠 듯이!아까 임유진에게 붙여준 경호원들에게서 그녀의 사진을 전해 받았을 때 그는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서 강현수와 꼭 끌어안고 있었다.사진 속의 그녀는 전혀 반항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결국 강현수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이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는 순간 질투라는 감정이 온몸을 집어 삼켜버렸다.강지혁은 강현수가 보라색 드레스와 원피스를 수집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건 대외적으로는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는, 친한 지인들끼리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언제 한번 이한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은 적이 있다.“현수야, 너 그 옷들은
“피고 임유진, 음주 운전으로 피해자 진애령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징역 3년에 처한다!”“유진아, 미안한데, 그 일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널 반대하셔. 탓하고 싶으면 그 사고를 저지른 널 탓해. 그러게 왜 하필이면 진애령을 쳐 죽이냐고.”“진애령은 진화 그룹 큰딸이자 강지혁의 약혼녀였어. 너 강지혁 몰라? S시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없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우리 그만하자. 우리 집안까지 화를 입게 할 수는 없어.”“임유진 씨, 죄송하지만 당신은 이미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으므로 아무리 좋은 경력을 갖고 있더라도 채용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과 연루된 지라, 자격증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울 겁니다. 죄송합니다.”“네가 무슨 낯짝으로 집에 기어들어 와? 그 일로 우리 집안이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알기나 해? 네 동생은 여주인공으로 데뷔할 수 있었는데, 너 하나 때문에 무산됐다고! 넌 네 여동생의 앞길을 망쳤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난 너 같은 범죄자를 딸로 둔 적 없어!”……유진은 꽁꽁 얼어붙은 손을 비볐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월의 밤이었다.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살과 뼈를 파고들었다.노란 형광색의 환경미화원 복장을 입고 있는 유진의 청초한 얼굴은 찬바람을 맞아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예쁘고 맑은 두 눈 아래에 오뚝한 코와 빨간 입술, 긴 머리를 대충 질끈 묶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온갖 풍파를 겪은 여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얼굴만 보면 아마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 정도로 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젊음의 활기 대신 사회의 모든 풍파를 겪은 듯한 체념과 무기력함이 담겨 있었다.유진은 3년의 옥살이로 거칠거칠해진 자기 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본래 새하얗고 보드라웠던 그녀의 손은 온데간데없었다.손에 감각이 돌아온 그녀는 계속해서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다가 돌연 그녀의 시선은 길 건너편의 검은 실루엣에 멈췄다.이른 아침, 그녀가 이 거리를 청소할 때
“혹시 갈 곳이 없으면 저랑 같이 갈래요?”임유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유진은 자기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충동적으로 낯선 남자를 집에 데려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어쩌면 이 남자가 아무런 공격성이 없어 보여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이 남자가 감옥에 있을 때의 자신과 너무 닮아서일 수도 있다.그도 아마 그녀와 똑같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보려 발버둥 치고 있는 그녀에 반해, 그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 같았다.“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괜찮으시다면 바닥에서 주무시겠어요? 이불 깔아 드릴게요.”유진은 침묵을 유지하는 상대에게 새 수건과 새 칫솔을 꺼내 건네주었다.“욕실은 저쪽이에요. 남자 옷이 없어서……, 최대한 옷이 젖지 않게 조심하세요.”남자가 욕실에 들어가자 유진은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여분의 이불을 꺼냈다.그녀가 살고 있는 그리 집은 크지 않은 원룸이다. 기껏해야 5평 남짓한 크기에 따로 주방도 없이 달랑 화장실 하나 있는 게 다였다. 때문에 평소에 요리를 해 먹을 때면 구비해 둔 인덕션을 사용하곤 했다.남자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여전히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는 물에 젖어있었다.유진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수건 하나를 꺼내 들고 몸을 일으켰다.“허리 좀 숙여 봐요.”남자는 허리를 숙이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물기를 닦아드리려고요. 머리가 너무 축축하잖아요, 안 말리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여전히 유진을 빤히 쳐다보던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지금 나 걱정하는 거예요?”서늘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듣기 좋았다.“네.”유진은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제가 당신을 데려온 이상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요.”속눈썹이 살짝 떨리던 그는 이내 천천히 몸을 숙였다.그제야 유진은 수건을 그의 머리에 덮고 담담히 물기를 털어주었다.“이름이 뭐예요?”오랜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네, 원해요.”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좋아요.”이건 그녀가 처음 보는 남자의 미소였다. 매우 옅고 희미한 미소였지만 매우 아름다웠다.……출근해야 하는 유진은 그에게 5천원을 건네며 밥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혁이 유진의 집에서 나오자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는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대표님.”“가자.”강지혁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검은색 벤츠에 올라탄 지혁은 손에 쥐고 있던 5천 원짜리 지폐를 한참이나 바라봤다.‘오랜만에 용돈을 받아보네. 그것도 5천원을.’그는 생각할수록 웃음이 새어 나왔다.“강 대표님, 어제 대표님과 같이 있던 여성분은 환경위생과의 계약직 직원입니다. 한 달 전부터 이곳에서 월세로 지내고 계시고, 2달 전에 출소하신 걸로 확인됩니다.”오랫동안 지혁의 개인 비서였던 고이준이 차에 오르기 바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감옥?”“네. 이름은 임유진, 3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진애령 씨를 죽인 장본인이자 소민준의 전 여자친구입니다. 그때 그 일로 3년 동안 징역을 살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소당했습니다.”이준은 지혁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지혁은 매년 이맘때면 남루한 차림으로 노숙자인 양 거리에 앉아있곤 했다.이는 지혁의 이상한 취미이자 꺼내면 안 될 금기에도 가깝다.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는 금기.심지어 그의 곁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이준마저 자기의 대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몰랐다. 이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루틴이자 꼭 치러야 할 의식이었다. 이미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일지 언정 매년 이 행동은 반복됐다.추운 겨울밤, 지혁은 홀로 거리에 머물렀다.이준이 할 수 있는 일은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밤 11시 35분만 되면 다시 그가 알던 강 대표님으로 돌아올 지혁을.하지만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이, 어젯밤은 이변이 일어났다. 낯선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 것이었다. 게다가
임유라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임정호는 망설임도 없이 임유진의 뺨을 때렸다.“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네가 사고로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간 거로 우리 집 체면이 얼마나 깎였는지 알아? 네 인생 망쳤다고 동생 앞날도 망칠 셈이야?”임정호의 눈에는 유진에 대한 원망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가 유진 덕에 서씨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친구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많은 부러움과 질투를 샀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부러움은 모두 비아냥으로 변했고 우쭐대던 그도 체면이 완전히 깎여버렸다.유진의 한쪽 뺨은 이미 붉게 부어올랐지만, 눈빛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분했다.“어머니 제사 때문에 왔는데, 보아하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앞으로 이 집에 다시는 발 들일 일 없을 겁니다.”말을 마친 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나섰다. 이 ‘집’에는 이제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유진이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캄캄했다. 불을 켠 뒤 그녀를 맞이하는 건 그저 쓸쓸한 적막감뿐이었다.5평 남짓한 방은 아무도 없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혁이 씨는 간 건가? 결국 또 혼자구나.’유진은 문득 공허함을 느꼈다.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으려고 몸을 살짝 돌렸을 때,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림자에 멍해졌다.‘혁이 씨잖아!’그는 여전히 어제와 똑같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두꺼운 앞머리가 얼굴을 반 정도 가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그 앞머리에 가려진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이런 사람이…… 정말 노숙자라고?’그녀는 아무런 친분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그를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충동적이고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어쩌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나 왔어요.”차갑고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에겐 그저 듣기 좋은 빗소리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