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한가한가 봅니다. 아니면 업무가 배달로 바뀌기라도 했습니까? 바꿔...”계속 말하려다가 수현은 멈칫했다. 조수가 한 말 중 포인트를 잡았기 때문이다. 바로 심 비서 세글자였다.“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심 비서요?”조수는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네. 배달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습니다.”조수가 이 말을 마치자마자 수현은 윤아가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할머님께서 수현 씨 아직 점심 먹지 않았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방금 회사로 수현 씨 좋아하는 거 시켰어. 레스토랑 쪽은 이미 배달했다고 하던데, 받았어?」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수현은 이 메시지를 보고 나서 얼굴빛이 그나마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날 피할 땐 언제고... 마음에도 없는 행동 하네.”말을 마친 수현은 조수에게 눈짓했다.“이리 줘요.”“네.”조수는 손에 들도 있던 봉지를 탁자에 놓았는데 그 옆엔 마침 소영이 만든 사랑의 도시락이 놓여있었다. 이 장면이 약간 거슬렸던 조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수현에게 말했다.“대표님, 아까 강소영 아가씨가 만든 도시락을 저에게 준다고 하셨죠?”“네.”수현은 점잖게 대답했다.조수는 속셈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하지만 제가 혼자 먹기엔 무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무실 기타 사람들과 나눠 먹어도 될까요? 음식 낭비는 되도록 면하는 게 좋을지 싶습니다.”이 말을 듣자, 수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런 수현의 모습을 본 조수는 수현이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 그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미 해결하라는 권한을 줬으면 알아서 할 것이지, 이 작은 일도 물어봅니까?”“알겠습니다.”수현이 후회라도 할까 봐 조수는 당장 도시락을 들고 밖에 나갔다.-거의 퇴근할 때쯤, 소영은 또다시 회사에 왔다. 집으로 돌아간 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였다.점심을 먹을 시간에 무슨 약속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현이 자신을 홀대했다는 점이 내내 마음
여기까지 말한 성민은 잠시 회상하다가 말을 이었다.“다들 맛있다고 했습니다.”“뭐라고요...”성민의 이 얘기를 들은 소영은 더는 웃음을 유지하기 힘들었다.그녀는 원래 이 도시락을 성민에게 주려고 했었다. 수현이 바쁠 거라 생각되어 조수에게라도 좋은 인상을 남겨주고 싶었다.하지만 점심때 수현이 돌아왔다. 심지어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 조수와 사무실 직원들에게 나눠 주었다.소영은 순간 자신의 성의가 짓밟혔다고 느껴졌다.“아가씨, 왜 그러십니까?”성민은 앞에 서 있는 소영을 보며 물었다.“괜찮으십니까?”이 말을 듣자, 소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간신히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괜찮아요. 그러면 전 먼저 수현 씨 보러 갈게요.”“네.”소영이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성민은 얼굴의 웃음기를 사악 지웠다.똑똑--“들어오세요.”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소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늘한 얼굴로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수현이 눈에 안겨 왔다.일하고 있는 수현은 특별한 아우라를 풍기며 더 잘생겨 보였다. 검은색 셔츠 깃이 살짝 흐트러졌고 넥타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으며 단추도 두 개 풀려 매끈한 목선을 드러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그의 눈동자는 매우 짙었고 아무 감정도 엿볼 수 없었던 평소와는 달리, 지금의 그는 더 날카로웠고 매력적이었다.소영은 늘 알고 있었다. 수현의 외모는 탁월했고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리고 완벽한 몸매에 어마어마한 집안까지 더했으니, 그야말로 완벽했다.이런 남자야말로 소영의 마음에 꼭 들 수 있었다.소영은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 서서 넋을 잃은 채 수현을 바라보았다. 들어온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눈치챈 수현이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소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소영아.”일 처리를 하면서 찡그러졌던 눈썹은 소영을 보자 많이 펴졌다.“웬일이야?”이 말을 할 때, 수현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던 차가운 공기는 점점 누그러졌다.소영은 옅게 웃음을
할 수만 있다면...강소영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 하마터면 정말 수현에게 원하는 걸 말해버릴 뻔했다.‘지금은 얘기를 꺼낼 때가 아니야. 냉정해져야 해.’소영은 얼른 화제를 바꿔 어르신의 병세에 관해 물었다.“그러고 보니 나 귀국하고 한번도 할머님을 뵙지 못했네. 괜찮으시면 조만간 한번 찾아뵙고 싶은데 어때?”수현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거절했다.“나중에. 할머니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 봐 그래.”그의 말을 들은 소영은 입가의 웃음이 옅어졌다. 매번 이런 식이다. 왜인진 모르지만 선월은 소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수현을 구해준 은인이기에 예의를 갖추는 정도다. 그녀를 공손하게 대하는 모습은 분명 소영을 그저 은인으로만 생각한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영과 달리 심윤아는 친손녀처럼 대한다는 사실이 소영을 더욱 안달 나게 했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소영은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_휴가를 마친 윤아는 회사로 돌아왔다.연차를 급하게 쓰는 바람에 휴식 전 인수인계를 잘했어도 일손이 모자랐다. 윤아가 돌아왔을 땐 업무상의 허점들을 이미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돌아쳐야 했다. 윤아 앞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일 때문에 점심시간이 되어야 간신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임연수는 바쁜 윤아를 위해 중간중간 마실 음료를 가져다주곤 했다. 윤아는 바쁜 와중에 연수가 가져다준 커피를 들어 한입 마셨다가 커피의 씁쓸한 맛이 입안 전체에 퍼지는 감각에 불현듯 뭔가 떠오른 듯 잔을 내려놨다. 연수가 다시 돌아왔을 땐 그 뒤로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아 차게 식은 커피를 발견할 수 있었다.“윤아 님. 커피 새로 타서 그릴게요.”연수의 말에 윤아는 드디어 일에 파묻혀있던 머리를 들며 말했다.“연수 님. 앞으로 커피 대신 따뜻한 물로 주세요.”“네?”연수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커피 안 마시게요?”“네.
윤아는 서늘해진 눈빛과는 달리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괜찮으니까 먼저들 먹어요. 아직 처리해야 할 업무가 남아서요. 기다릴 필요 없어요.”말을 마친 윤아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윤아는 그때 마침 나가려던 연수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연수 님. 식사하시러 가는 거죠?”“네. 윤아 님. 같이 드실래요?”“네. 같이 가요.”윤아는 가방과 핸드폰을 챙기고 연수와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연수는 윤아와 함께 걸어가는 내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잔뜩 설레었다. 사실 그녀는 윤아와 함께 구내식당에 가는 게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방방 뛰는 참새같이 윤아의 곁에서 말이 끊이질 않았다.“윤아 님. 구내식당에 음식을 입에 맞으실까요? 별로면 밖에서 먹어도 되는데.”“괜찮아요.”윤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구내식당이 가깝잖아요. 먹고 바로 일해야 하니까 여기가 편해요.”“아...”일 얘기에 연수는 자책하며 말했다.“죄송해요. 다 제가 부족한 탓이에요. 제가 능력 좋은 직원이었다면 지금처럼 일이 많지도 않으실 텐데.”연수의 말에 윤아는 그녀를 한 눈 보기만 할 뿐 별다른 위로는 하지 않았다.이제 진수현과 이혼을 하고 나면 윤아는 이 일도 그만둘 생각이다. 윤아의 사람은 임연수밖에 없으니 그녀가 이 회사를 떠날 때면 반드시 연수도 데려갈 것이다. 예전의 윤아는 연수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느슨하게 대했다. 대부분 일은 윤아가 다 하고 연수는 옆에서 천천히 가르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는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그렇게 미안하면 오후부턴 공부량을 늘리도록 하죠.”연수는 잠시 멈칫하더니 힘껏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저 꼭 열심히 해서 윤아 님 부담을 덜어드릴게요.”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식당에서 줄을 섰다.밥을 가지러 가는 내내 주변에서는 윤아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윤아가 자리에 앉고 나서는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말이 돼요? 대표님 부인이 우리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다는 게? 이
결국, 연수는 윤아의 잔잔한 호수 같은 표정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다시 앉긴 했지만, 연수는 여전히 화가 사그라지지 않은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윤아 님. 저 사람들이 하는 말 못 들으셨어요? 정말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정말이지 당장 달려가 저 인간들 입을 찢어버리고 싶어요.”반면 윤아는 느릿하게 말했다.“그리고 나서는? 저 사람들 말 몇 마디에 반응했다가 구내식당으로 쫓겨나 밥 먹는 것도 모자라 저들이 하는 말에 찔려서 손까지 댔다는 소리 듣게 할거예요?”윤아의 말에 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윤아 님.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알아요. 그런 뜻 아닌 거. 하지만 지금 저 사람들한테 따지러 간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연수 씨가 반격하든 안 하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까지 막을 순 없어요.”연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렇다고 윤아 님이 저런 모욕을 당하는 걸 듣고만 있으라고요? 전 못해요.”자신을 대신해 화를 내주는 연수의 모습에 윤아는 마음이 찡해났다. 평소에는 아무 말도 못 하는 겁쟁이인 줄만 알았는데 관건적인 순간에는 이렇게 불같은 사람일 줄은 몰랐다.윤아는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모욕이라고 할 수는 없죠.”그의 말에 연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윤아 님. 뭐라고요?’“저 사람들이 한 말 다 맞죠. 우리 집이 망한 것도, 수현 씨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도.”“그럴 리가요...”연수는 계속해서 윤아를 대신해 말해줬다.“윤아 님이 회사에서 제일 도움이 많이 되는 사람인걸요. 능력이 이렇게 출중하신데 어느 회사든 윤아 님을 원할걸요. 윤아 님만 계시면 범이 날개를 얻은 격이니까요. 저 사람들 하는 말 하나도 안 맞아요.”“됐어요.”윤아가 서둘러 수연의 말을 멈췄다.“어서 먹어요. 그 정성으로 돌아가서 더 많이 배우세요.”연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윤아의 모습에 뭐라 더 말하기도 무안해 그저 화를 삭이며 밥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윤아는 무표정을 유지
연수는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때, 옆에 함께 앉아있던 윤아가 맞은 쪽에 앉은 그 인간을 서늘하게 바라보더니 말했다.“대표님. 공적인 얘기 하실 거 아니면 저흰 시간 낭비 안 하고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말을 마친 윤아는 아직도 얼이 빠져있는 연수를 일으켜 대표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선선한 바깥공기가 윤아와 연수의 얼굴을 식혀주었지만 연수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심...심비서님. 저희 그냥 이렇게 가도 괜찮은 거예요?”윤아는 그런 연수를 한 눈 보고는 말했다.“안 그럼요? 계속 있고 싶어요?”연수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아니...아뇨.”“그럼 됐어요. 가요.”윤아는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세워 연수를 데려다줬다.“저와 함께 일하는 동안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절대 참지 마세요. 안 그러면 저런 뻔뻔한 인간들만 더 기고만장해질 뿐이에요.”덕분에 연수는 윤아와 함께 일했던 긴 시간 동안 이런 일은 더는 당하지 않았다.윤아가 지금 그녀에게 많은 양의 업무를 내주는 것도 아마 그녀를 잘 가르쳐보려는 것일 거다. 연수는 윤아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힘차게 스스로 다짐하고는 일에 몰두했다.‘똑똑’누군가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연수가 고개를 들었다. 웬 아름다운 여성이 문 앞에 서 있었는데 흰 드레스에 어깨까지 드리워진 고운 머릿결이 인상적이었다.“안녕하세요. 심 비서님 찾으러 왔는데요.”연수는 그녀를 한 눈 보자마자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연수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던 그날, 진수현 대표님과 함께 사무실에 있었던 여자. 최근 회사 내에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인 강소영이다.연수는 강소영이 요즘 들어 부쩍 회사에 자주 드나드는 바람에 윤아가 식당에서 그런 일을 당한 거라 생각해 그녀를 곱게 볼 수 없었다.연수가 대답이 없자 소영이 한 번 더 물었다.“저기요?”연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새초롬하게 말했다.“저희
윤아의 말에 소영은 잠시 멈칫했다.생각 못 해본 일은 아니다. 이미 여러 번 눈치를 줬는데도 진수현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뿐. 못 알아듣는 건지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소영은 직접 말했다가 수현이 자신을 가벼운 여자로 생각 할까 봐 천불이 나는 걸 꾹 참고 있었던 거다.소영이 낯빛이 어두워져서는 말이 없자 윤아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혹시 불러내지 못해서 절 찾아와 부탁하는 건가요?”그 말에 소영은 머리를 들어 불쾌한 기색이 역력해서 윤아를 쳐다봤다. 그러나 소영의 시선에도 꿈쩍 않는 윤아.“제 말이 틀렸나요? 이런 쓸데없는 일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절 싫어하면서도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건 수현 씨 앞에서 대인배 행세를 하고 싶은 건가요? 그런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 아량이 넓지 못하다고 싫어할 남자라면 이참에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어요?”윤아의 말은 소영의 속내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었다. 소영은 주먹을 꽉 쥐며 당장 윤아를 능지처참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윤아는 입꼬리를 올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일을 해야 해서요. 별일 없으면 이만 가시죠.”소영은 분노로 부글거렸다. 대인배 행세를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미치게 후회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윤아에게 날카로운 말 몇 마디라도 날려주고 싶었지만 윤아의 심기를 건드려 수현의 앞에서 막말이라도 할까 봐 간신히 참아냈다. 소영은 차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윤아 씨. 제게 이렇게까지 적대적일 필요 없어요. 윤아 씨가 제 요구를 들어준다고 약속했을 때부터 우리 관계는 이제 다 풀린 거예요. 전 그냥 윤아 씨와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서 잘 챙겨주려는 거예요. 나이로 따지면 사실 제가 언니인데...”소영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윤아가 싸늘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강소영 아가씨. 우리 집 딸은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그래요. 제가 준비한 반찬이 윤아 씨 입맛에 맞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나 봐요. 똑똑히 들어요. 진 씨 그룹에서 연수 님은 그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그리고 저와 연수 님이 무슨 사이라고 절 대신해 화를 내주는 거죠?”연수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간신히 참고 있었다.사무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큼, 큼.”이때, 밖에서 누군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윤아는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봤다. 언제 왔는지 강찬영이 문어구에 서 있었다.윤아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연수에게 말했다.“가서 일 보세요.”연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그가 강찬영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찬영은 연수의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걸 보았다.연수가 나간 후에야 윤아는 찬영에게 물었다.“찬영 오빠. 무슨 일이에요?”찬영이 문을 닫으며 윤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윤아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못되게 해? 그러다 너 호의도 다 곡해되는 수가 있어.”윤아는 아무 표정 없이 그저 시선을 떨궜다.“상관없어요. 어차피 전 얼마 안 가 떠날 거니까요.”좋게좋게 말했다가 연수가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성장하지 못하면 어떡한단 말인가.윤아의 담담한 모습에 찬영은 잠시 멈칫했다. 이윽고 들고 있던 파일을 윤아의 책상에 올려놓고는 무심한 척 말했다.“간다고? 언제?”윤아는 강찬영에게 수현과의 가짜 결혼과 임신 사실을 제외하고는 딱히 숨기는 게 없었다. 그녀는 잠시 입을 앙다물더니 이내 말했다.“구체적인 시간은 아직 정하지 않았는데 아마 곧 갈 거예요.”찬영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곧 떠난다는 그 말에 조금 전 연수를 대하는 태도까지... 찬영은 이런 정황들로 보아 윤아가 한 달 안에 회사를 떠날 거라 짐작했다. 그는 아무래도 다른 수를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생각에 잠긴 찬영의 모습에 윤아도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찬영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