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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애기야. 긴장 풀어.”

“자기 집에서 왜 이렇게 떨어? 응?”

남자의 낮고 고혹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이성을 점차 무너뜨렸다.

머리 위로 갇힌 두 손 때문에 그녀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남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연준 씨,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굴욕적인 마음이 들었던 그녀는 이 남자를 발로 걷어차 분풀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한쪽 다리는 남자에 의해 올려졌고 다른 한쪽 다리까지 들어 올린다면 틀림없이 보기 흉하게 넘어질 것이다.

“왜 이러냐고?”

남자는 나지막이 웃으며 뜨겁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미친 듯이 몰아붙이는 남자 때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포악한 짐승처럼 한 번 또 한 번 그녀를 집어삼겼다. 풀리지 않은 그의 분노가 그녀의 몸을 부서지게 만들었다.

현관의 불은 계속 꺼져있는 상태였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눈꼬리에 뽀뽀를 하고는 문을 잠근 다음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등이 닿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을 뒤척이며 도망치려고 하는데 남자가 그녀의 하얀 발목을 붙잡았고 너무 쉽게 그녀를 잡아당겨 자신의 몸 아래로 가두었다.

“매일 밤 널 안아야만 얌전히 있을 거야?”

코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연준 당신 개자식이야.”

욕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손을 뻗어 눈물과 엉킨 그녀의 머리카락을 떼주었다.

“얌전히 굴어. 나 화나게 하지 마. 그럼 아까처럼 울어도 진짜 소용없을 테니까.”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약속을 안 지킨 건 당신이잖아.”

허우적대는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난 늘 말하는 대로 했어.”

“하지만 그날 당신이 나한테 약속한 거 아니었어?”

“네 말대로 그건 그날이고. 오늘이랑 무슨 상관이야?”

눈물이 고인 두 눈을 부릅뜨고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쩜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가 있는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아직도 울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가에 그의 손끝이 스쳐 지나갔고 눈물이 손가락에 달라붙어 끈적끈적했다.

그녀가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중얼거렸다.

“더 이상 당신과 이렇게 지내고 싶지 않아.”

그가 그녀의 얼굴을 돌리며 시선을 마주쳤다.

“남자라도 생긴 거야?”

“남자라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그녀는 갑자기 턱에서 통증이 전해졌다. 그녀의 턱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아까보다 더 들어갔다.

“내가 자주 널 찾지 않아서 허전하고 외롭기라도 한 거야? 그래서 맞선이라도 봐서 다른 남자를 찾으려고 한 거냐고?””

“그 입 다물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녀가 벌컥 화를 냈다.

“정곡을 찔렀나?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데?”

화가 난 그녀는 두 눈을 붉히며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날 이런 식으로 모욕하지 마.”

“그럼, 방법을 바꿔볼까?”

그가 그녀를 돌아 눕혔다.

“허리 들어 올려.”

그녀는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한번 화가 치밀어 오르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 힘겨웠다.

게다가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모욕했던 남자랑 다시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벽에 부딪혀 죽고 말지.

이때, 카펫에 떨어진 핸드폰이 진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재빨리 소리쳤다.

“전화... 전화 왔어.”

“기분 잡치게.”

그가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려난 유나은은 재빨리 옷을 정리하고 침대로 내려가 핸드폰을 주웠지만 한발 늦었다. 그가 그녀보다 먼저 핸드폰을 주었다.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한테서 온 전화인지 한번 맞혀봐.”

이 시간에 전화 올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분명 승아일 것이다. 기다려도 안 나오는 그녀 때문에 틀림없이 초조해하고 있을 것이다.

남자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발신 번호를 확인하던 그녀는 표정이 굳어졌다.

김준희!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연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침대 옆에 앉았다.

“왜 안 받아?”

그를 무시한 채 등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엄마.”

“넌 왜 전화를 이렇게 안 받니? 문은 왜 또 이리 안 열리고? 비밀번호 바꿨어?”

전화기 너머로 화가 잔뜩 난 김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말에 유나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집으로 찾아왔었어요?”

“지금 집 앞이야. 당장 문 열어.”

유나은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이연준을 돌아보고는 전화를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문 잠갔어?”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나한테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나 생각해 봐.”

감사? 반박하고 싶었다. 오늘 그가 이리 집으로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유나은, 너 누구랑 말하는 거니? 집에 사람 있어?”

전화기 맞은편, 김준희는 유나은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분명 느낄 수 있었다.

“TV 소리예요. 잠깐만요.”

유나은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알았어. 빨리 문 열어.”

김준희는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유나은은 고심 끝에 이연준의 앞으로 다가갔다.

“엄마 왔어. 문 열어드려야 해. 그러니까 당신은 침실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

그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탁하는 거야?”

“응. 부탁하는 거야.”

그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양복바지에 묻은 짙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물에 젖은 것 같은데 어떤 물인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재빨리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냈다.

“남한테 부탁할 때는 부탁하는 자세를 취하라고 했었잖아.”

그가 그녀의 앞에 다가가 우뚝 섰다.

“삼촌, 부탁할게.”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소맷자락 한쪽을 잡아당겼다. 젖은 속눈썹을 내리뜨린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설렜다.

눈빛이 어두워진 그가 소맷자락을 빼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10분 줄게. 그 안에 얼른 돌려보내.”

“10분은 너무...”

“너무 많아?”

“그럼 5분. 1분이라도 늦으면 이 문 열고 나갈 거니까 알아서 해.”

그래. 내가 참자.

그녀는 얼른 가서 문을 열었다.

나가기 전에 그녀는 화장대에서 향수를 한 병 꺼내 향수를 뿌렸다. 방금 현관에서 있었던 그와의 섹스. 냄새가 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 김준희가 눈치라도 챌까 봐 그녀는 조심스러웠다.

재빨리 현관을 정리하고 옷과 머리카락을 정리한 뒤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문을 열었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준희는 이미 짜증이 날 대로 나 있었다.

그녀가 정색을 하며 걸어 들어왔다.

“안에서 뭐 하고 있었어? 왜 이렇게 꾸물거린 거야?”

“옷 갈아입었어요.”

김준희의 시선은 그녀의 옷에 쏠렸고 그녀가 입고 있는 건 실내복이 아니라 외출복이었다.

“집에서 외출도 안 하는데 무슨 옷을 갈아입어?”

말을 하던 김준희는 유나은의 안색을 자세히 살폈다.

“아까 전화에서 남자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던데. 아무리 생각해도 TV 소리가 아닌 것 같아. 유나은, 사실대로 말해. 혹시 방에 남자 숨겨놓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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