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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그녀는 믿지 않았다. 그저 진명수가 겁을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연준이 어떻게 직접 그녀를 찾으러 오겠는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소식은 이내 이씨 가문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너무 큰 위험이었다.

갑자기 이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분 남았어.”

그 순간 유나은의 몸은 엄청난 반응 속도를 보이며 정말 2분 만에 식당에서 나와 그의 차에 올라탔다.

“이틀 동안 휴가를 냈다고 들었어.”

그는 그녀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손을 뻗어 셔츠 깃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아직도 양수경이 어디 갔는지 궁금했던 그녀는 남자의 물음에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급성 위염 때문에 어제 병원에 이틀 휴가를 냈어. 삼촌은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아프다고 휴가까지 냈으면 왜 집에서 쉬지 않고?”

남자는 편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단추를 푼 뒤 손을 내려 한쪽에 걸쳤다.

나른하고 느슨한 모습에 압박감이 조금 덜하였지만 여전히 귀티가 났다.

그녀는 남자의 옆모습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승아네 집에서 승아한테 맞선을 보라고 해서. 마침 시간 돼서 같이 온 거야.”

“그리고 또?”

이연준은 고개를 기울인 채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게 다야.”

당황스러웠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한 척했다. 약간의 허점이라도 보인다면 이연준이 바로 알아차릴 테니까.

다행히 이연준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진명수한테 차를 출발시키라고 했다.

“잠깐만요.”

마음이 급한 나머지 이연준의 팔을 덥석 잡았다.

“승아가 기다리고 있어. 이대로는 갈 수 없다고. 이건 너무 양심에 찔려.”

그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가는 손에 시선을 옮겼다.

“양심?”

유나은은 바로 손을 뗐다.

그녀가 잡고 있던 셔츠 끝자락을 살짝 털었다. 구김이 잘 가지 옷감이라 다행이었다.

“너한테도 양심이 있었어?”

그녀는 한동안 멍해졌다.

나한테도 양심이 있었냐니?

내가 왜 양심이 없어?

“전화 받아.”

그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제야 그녀는 핸드폰이 울리는 걸 알아차렸고 뾰로통한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주승아게게 걸려 온 전화인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감정을 추슬렀다.

“왜 안 받아?”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전화를 받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쥐고 웃으며 말했다.

“승아가 날 찾고 있어. 가봐야 해.”

“급할 것 없잖아. 스피커폰으로 통화해.”

결국 어쩔 수 없이 스피커폰을 켠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유나은?”

주승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왜 이렇게 안 보여? 유나은?”

유나은은 이연준을 빤히 노려보며 대답했다.

“나 화장실이야.”

그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도 잘하네.”

전화기 맞은편, 누군가 옆에서 말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고 남자 목소리 같았다.

“유나은, 옆에 누가 있어?”

핸드폰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옆에서도 통화하고 있는 것 같아.”

정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언제 나와? 생리 왔어? 아니면 또 위가 안 좋은 거야?”

말을 하면서 주승아가 화장실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가 갈게.”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남자의 반응을 슬쩍 살피던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나 사실 속이 좀 안 좋아. 좀 더 있다가 나가야 할 것 같아.”

“심각해?”

“아니. 그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많이 아프면 말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주승아는 발길을 멈추고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았다.

“알았어. 끊어.”

“잠깐. 이참에 솔직하게 말해봐. 너 우리 삼촌한테 관심 있어?”

주승아는 그녀의 뜻을 똑똑히 물어본 뒤 손지태에게 귀띔해 줄 생각이었다.

그 물음에 유나은은 머리가 하얘졌다.

이연준의 안색을 살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근데 또 한편으로는 이연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눈을 들어보니 남자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은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해진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주승아가 두 번이나 재촉하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손 교수님 좋은 사람이지.”

“그렇지? 우리 삼촌이 꽤 매력이 있다니까. 이따가 삼촌한테 귀띔이라도 해줘야겠어.”

그녀의 확답을 듣고 주승아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삼촌. 이젠 차에서 내려도 될까?”

남자는 담담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서화 아파트로 갑시다.”

“네.”

진명수는 노선을 조정하고 시동을 걸었다.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삼촌, 나 아직 집에 갈 수 없어.”

“아프면 집에 가서 푹 쉬어.”

그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아픈 데 없어 나.”

그러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이연준은 그녀를 무시했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가는 길 내내 유나은은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이연준의 차가 떠나면 택시를 타고 승아에게 갈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승아한테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집에 도착한 뒤, 차에서 내리기 전에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간다고? 뭐가 그리 급해?”

차갑게 웃던 그가 손을 뻗어 문을 밀고 내렸다. 깜짝 놀라는 사이 옆문이 밖에서 열리더니 그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이연준 씨,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녀는 급할 때마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고 남자는 그녀의 손목에 힘을 꽉 주었다.

“사람들 눈에 띄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이연준이 갑자기 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뜻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이곳에 방 2개짜리 집을 얻었고 주승아와 그녀의 어머니 김준희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와본 적이 없었다.

이연준은 단 한 번도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다. 그녀 또한 그를 한 번도 초대해 본 적이 없다.

집이 좁아서 이연준 같은 도련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이 건물은 한 층에 4세대가 살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옆집 여자와 마주쳤다. 옆집 여자는 웃으며 유나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당직이 아닌가 보네?”

“네. 마트 갔다 오세요?”

옆집 여자가 손에 채소 봉지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오늘 마트에서 세일해서 다녀왔어.”

윤은서는 그녀 옆에 있는 남자를 훑어보았다.

풍기는 분위기 하며 잘생긴 외모 하며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다만 나이가 적지 않아 보였다.

두 사람이 아직도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옆집 여자는 이내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었다.

“유 선생 남자 친구인가?”

“아니요.”

그녀는 바로 부인했다.

“나도 알아. 성숙하고 듬직해 보이네. 유 선생 안목이 좋아.”

윤은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아이고 유 선생, 난 얼른 가서 손주 밥해 줘야겠어.”

옆집 여자는 채소 봉지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나서며 한마디 던졌다.

“두 사람 아주 잘 어울려.”

유나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며 그녀는 화를 참으며 남자에게 설명했다.

“은서 언니가 오해한 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신경이 쓰인다면?”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이곳에 나타나지 않으면 은서 언니도 더 이상 묻지 않을 거야.”

그녀는 돌아서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남자가 뒤따라 들어오더니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끌어당겨 현관의 캐비닛에 눌렀다.

“왜? 내가 옆에 있는 게 창피해?”

그가 그녀의 손을 들어 머리 위로 눌렀다.

위험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남자가 그녀의 목을 잡아당기며 키스를 퍼부었다.

“비좁긴 하지만 너 하나 혼내주는 데는 충분해.”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미쳤어? 여기 우리 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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