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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안에 계십니다.”

진명수가 옆으로 몸을 돌리며 한 방향을 가리키는데 그곳은 식당의 별실이었다.

그녀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결국은 이리 일어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이연준이 왜 갑자기 식당에 왔는지 추측할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요? 삼촌도 왔구나...”

그녀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친구들이랑 밥 먹고 있었어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말을 마친 뒤, 그녀는 진명수의 옆으로 지나갔다.

“나은 씨, 잠깐만요.”

그의 부름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도련님께서 오실 때 안색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진 비서님께서 신경 많이 써주세요. 전 친구들이 기다려서 이만 가볼게요.”

재빨리 도망치는 그녀를 진명수는 다시 부를 기회조차 없었다.

유나은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도련님의 노여움을 산다면 누구도 좋은 결과가 없을 텐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진명수의 얼굴을 보니 망했다는 표정이었다. 그에게도 덩달아 화가 미치기 때문이다.

한편, 유나은은 황급히 테이블으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맞은편에 있던 손지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아가 쓸데없는 얘기를 했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주승아와 유나은의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유나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경 쓰지 않아요. 굳이 설명 안 하셔도 됩니다. 승아와는 친한 사이니까 정말 별거 아니에요.”

“봤지? 삼촌이 괜한 걱정을 한 거라니까.”

주승아가 헤벌쭉 웃었다.

“언제 어디서든 입조심해.”

“알았어. 나은이가 혼자 밖에서 지내는 게 안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랬던 거야. 삼촌은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나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고.”

말을 마친 주승아가 유나은을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에 유나은은 웃음을 터뜨렸다.

주승아는 메뉴판을 집어 들었고 펼쳐보기도 전에 손지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은 씨한테 메뉴판 줘. 나은 씨가 먼저 주문하게 해.”

“나랑 나은이는 누가 먼저랄 게 없어.”

손지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은 씨한테 먼저 주라고.”

“알았어.”

외삼촌의 태도가 수상쩍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대로 유나은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한편, 뭔가 걱정이 앞섰던 유나은은 두 가지만 주문하고 메뉴판을 주승아에게 돌려주었다.

이따가 어떤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떠야 할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주승아와 조현태는 서로의 취향에 대해 알아갔다. 조현태는 주승아에 대해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한 손지태 덕분에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반면 생각이 맞았던 유나은은 그들의 대화에 전혀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손지태는 이내 눈치챘고 무례한 질문이라도 할까 봐 망설이고 있을 때 식당 저쪽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눈치챈 듯 유나은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이연준이 별실에 나왔고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다. 옆에 있던 양수경은 매우 불안해 보였고 식당 매니저는 거듭 사과를 하며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그 소란에 식당에 있던 손님들이 그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유나은의 테이블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걸음을 멈춘 이연준이 냉담한 눈빛으로 눈앞의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 식당에 투자를 한 건 이곳의 요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오늘 나온 요리가 그게 뭡니까? 그런 엉망진창인 요리를 누구한테 먹이려고?”

매니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요리는 모두 도련님께서 지난번에 인정해 주셨던 것들로 올린 것입니다.”

“지난번이요? 어떻게 새로운 건 하나도 없이 그대로 올려요?”

“진 비서.”

진명수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바로 처리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인수인계를 할 시간도 없이 매니저와 주방장은 모조리 해고되었고 후임 매니저와 주방장은 식당으로 부랴부랴 달려오는 중이었다.

보는 사람이 다 땀을 뻘뻘 흘릴 정도였다. 유나은도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떨렸다.

끔찍할 정도로 냉담하고 무자비하다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유나은, 너희 셋째 삼촌이야.”

갑자기 주승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사실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식당 전체가 너무 조용했기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연준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와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이 막혔고 긴장된 그 끈은 손끝이 닿기만 해도 끊어질 듯했다.

다행히 이연준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리고 뒤돌아섰다.

“나은아, 네 손...”

가까이에 있던 주승아가 무심코 그녀의 손목에 손이 닿았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세히 만져보니 유나은의 손이 엄청 차가웠다.

분명히 식당 안은 난방이 잘 되어있는 상태였다. 근데 얘 손이 왜 이렇게 차가운 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그녀는 유나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관자놀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매우 긴장한 듯했다.

“나은 씨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요.”

손지태도 그걸 눈치채고는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정신이 든 유나은은 그가 건네준 따뜻한 물을 두 손으로 받아쥐었다.

“고마워요. 구경만 한 것뿐인데 겁이 많아서 조금 놀란 것 같아요.”

“그렇지? 나도 깜짝 놀랐어.”

주승아가 이내 맞장구를 쳤다.

“너희 삼촌 화날 때 엄청 무섭더라. 앞으로 어떤 재수 없는 여자가 너희 삼촌이랑 결혼할지 모르겠네. 매일 겁에 질린 생활을 하겠지.”

콜록.

물을 마시고 있던 유나은은 헛기침을 했다.

주승아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너랑은 상관없으니까.”

그녀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종업원이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와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주방장이 해고되는 바람에 제대로 음식을 올릴 수 없게 되었으니 사과를 하면서 보상하겠다고 했다.

울상인 종업원을 보며 주승아는 뭐라 하기가 불편했다.

“우리 다른 데가 먹자. 다들 의견 있어?”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

이때, 손지태가 입을 열었다.

“괜찮은 가정식 식당 있는데. 내가 예약할게.”

주승아는 두 손 들어 환영했다.

“삼촌 뜻대로 해.”

다들 의견이 없자 그들은 가정식 요리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이제는 안심하고 밥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핸드폰에 진명수라는 이름이 뜨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은아, 전화 받아.”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그녀는 덤덤하게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기다릴게.”

기껏해야 3분, 5분 정도밖에 안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화를 받으러 간 유나은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편, 식당 아래층에는 회색 벤틀리 한 대가 주차돼 있었다.

가림막이 천천히 올라가면서 모든 시야를 차단했고 비좁은 느낌에 압박감이 몰려왔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했던 그녀는 옆에 있는 남자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방금 전화에서 진명수는 이연준이 그녀에게 3분 주겠다고 하면서 3분 뒤에도 안 내려오면 직접 올라올 거라고 전해줬다.

그렇다. 그가 직접 올라오겠다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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