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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

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

“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

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

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

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

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

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

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

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

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

여진숙이 답했다.

“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

“그런 뜻 아니에요.”

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

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허.’

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

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

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

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소파에 앉았다. 여진숙은 승아가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겨주며 자상하게 웃었다. 지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지유는 불편한 마음을 꾹꾹 참으며 승아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승아는 손으로 찻잔을 살짝 건드렸다.

지유는 차가 뜨거울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승아가 다치는 게 싫어 얼른 막으려 했지만 승아가 찻잔을 그대로 엎었고 그렇게 승아의 손에 차가 쏟아졌다.

스읍.

지유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내 승아의 비명이 들렸다.

“아악!”

소리를 들은 여진숙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된 거야?”

승아는 눈물이 글썽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 저는 괜찮아요. 언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빨갛게 부어오른 승아의 손을 보며 여진숙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지유를 돌아보며 바로 귀싸대기를 날렸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손에 지유는 맞고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여진숙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자신에게 손을 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승아 피아노 연주하는 거 몰라? 화상이라도 입으면, 그 가정 형편에 병원비는 낼 수 있겠어?”

여진숙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지유는 볼이 얼얼했지만 마음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는 그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혼자 쏟은 건데,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여진숙이 그런 지유를 노려보며 말했다.

“따박따박 말대꾸는! 거기 누구 없어? 당장 저년 가둬!”

여진숙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도우미 둘이 지유를 잡아당겼다.

순간 지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발버둥 쳤다.

“이거 놔요! 이거 놓으라고요!”

하지만 그들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렇게 지유는 컴컴한 방으로 끌려갔다.

안에 던져진 지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이미 잠겨버린 문을 두드리다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유는 순간 모든 힘이 풀렸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근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무서움을 이겨내려 했다.

거실에 둔 지유의 핸드폰이 계속 울려댔다.

승아의 상처를 치료해 주던 여진숙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화면에 뜬 이현의 이름을 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응, 이현아.”

수화기 너머로 이현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여진숙이 답했다.

“그래, 나다.”

이현이 멈칫하더니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지유는요?”

“집에 있지.”

이현은 별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

“지유한테 서류 좀 가져다 달라고 해요. 서재 서랍에 있어요.”

진작부터 그 전화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던 승아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아주머니, 이현 오빠예요?”

“그래.”

여진숙이 말을 이어갔다.

“지유더러 서류 좀 챙겨오라는구나. 지유도 현이 비서라는 이유로 현이 와이프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

여진숙은 승아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미소를 지었다.

“승아야, 그때 네가 외국으로 가지만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이가 너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결혼도 당연히 너랑 하지 않았겠어? 네가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왔으면 진작에 아이가 들어섰을 텐데. 밥만 축내는 애가 우리 집에 발을 붙일 일도 없었을 테고.”

“네가 현이한테 서류 가져다주는 건 어때?”

“그래도 돼요?”

승아가 약간 주저하며 물었다.

“당연하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현이도 좋아할 거야.”

여진숙이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네가 손주 안겨줬으면 하는데?”

승아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일단 자료부터 가져다주고 올게요.”

여진숙의 말에 승아는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지유와 이현의 결혼은 이현의 할아버지가 결정한 일이었다. 3년간 아이가 없다는 건 한 번도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는 방증이었다.

승아는 이현이 아직 자기를 잊지 못하고 귀국하기만을 기다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아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밴을 타고 여씨 본가에서 나왔다.

이현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면서 회사 사람들은 모르게 하고 싶었다.

이현은 사무실에 앉아 시간을 확인했다. 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지유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의자에 앉은 이현은 등을 돌린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이현이 그제야 몸을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승아가 거기에 서 있었다.

“오빠.”

승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사실은 설렘이 더 많았다. 밤낮을 그리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자 승아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현은 살짝 멈칫하더니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쩌다 네가 온 거야?”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본가에 아주머니 뵈러 갔었어요.”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허락했지?”

이 말에 승아는 표정이 굳었고 심장이 살짝 저렸다. 그 말은 마치 승아가 못 갈 데라도 갔다는 뜻 같았다.

승아는 애써 진정하며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귀국했으니 먼저 아주머니 뵈러 가는 건 당연한 거죠. 서류 전해주러 왔어요.”

승아는 이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서류를 꺼냈다.

이현은 원래 지유의 손에 들려있어야 할 서류가 승아의 손에 들려있는 걸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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