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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건 지유가 이현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니 이현도 기뻐해야 마땅했다.

아니면 이혼하자는 말을 그녀가 먼저 꺼내서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한 걸까?

이현은 시선을 돌리더니 차갑게 말했다.

“시간 됐어요. 그만 일하러 가보세요.”

시간을 확인해 보니 9시였다. 근무 시간이 시작되었다.

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갔다. 혹시나 지유가 1초라도 낭비할까 봐 이렇게 친절히 알람을 해주고 있다.

이현의 뒷모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들 사이에 남은 건 상사와 부하의 거리감뿐이었다.

지유도 더는 질척이지 않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진호가 이렇게 말했다.

“온 비서님, 대표님이 처리하라고 주신 서류입니다.”

산처럼 쌓인 서류가 그녀의 손에 올려졌다.

먼지를 먹은 지유가 기침하며 말했다.

“먼지가 쌓일 정도면 얼마나 오래된 서류예요?”

진호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표님이 주신 거라.”

직원들이 동정의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봤다.

이현에게 밉보였으니 이렇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지유가 이현의 눈 밖에 난 게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유는 이현이 무슨 심술을 부리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업무를 주는 걸 봐서는 확실히 이상했다.

한참 후.

“온 비서님, 중요한 서류들이니까 50부 프린트해요. 대표님께서 쓰실 자료니까 잘 준비해야 할 거예요.”

지유와 같이 이현의 비서로 있는 예림이 꾸깃꾸깃한 A4용지를 그녀에게 내밀며 하찮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지유가 눈 밖에 났으니 바로 자기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해 벌써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서류를 처리하던 지유는 예림이 건넨 서류 한 다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서류는 프린트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리도 해야 하니 야근하지 않고서는 절대 완성할 수가 없었다.

지유가 고개를 들어 예림을 바라보자 예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온 비서님 업무 능력으로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예림과 지유는 사실 경쟁 관계였다.

이현은 지유를 데리고 다니는 날이 많았기에 둘 사이의 케미는 다른 사람이 비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예림은 늘 이를 질투했다. 자신의 업무 능력도 뛰어난데 지유에게 뒤처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사고로 이현과 지유는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았고 이현은 지유에게 하급 비서가 할만한 일을 던져주기까지 했다.

예림은 지유가 예쁘게 생겨서 늘 자신보다 행운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꼭 좋은 성과를 내어 지유를 못살게 굴고 싶었다.

지유는 예림이 자신을 못마땅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엔 이현을 위하는 마음이 컸기에 예림이 어떻게 비아냥거리든 참았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예림은 지금 또 지유를 건드리고 있다.

지유는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 참으면 참을수록 그녀를 만만하게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서류들 정말 대표님께서 확인할 중요한 서류가 맞아요? 맞다면 왜 잘 보관하지 않은 거죠?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도와주긴 어려울 것 같네요.”

예림은 지유가 걸려들지 않자 짜증 내며 말했다.

“지금 대표님을 거역하겠다는 건가요?”

지유가 그런 예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제 힘이 닿는 데까지만 합니다.”

“온 비서님,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 해고당해도 무섭지 않다는 거죠?”

지유가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려 하지 않자 예림은 바락바락 악을 쓰며 언성을 높였다.

이현의 동의가 없었다면 예림도 이렇게 그녀를 괴롭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유와 그렇게 오래 일하면서 정말 봐주는 거라곤 일도 없었다.

지유는 바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던 서류를 팽개치며 서늘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네, 이 직장이 뭔 대수라고. 진 비서님이 대표님께 좀 말해줄래요? 저 오늘 결근이라고. 나를 감시하면 뭐 회사 경영에 도움이라도 되나.

지유는 이렇게 말하더니 가방을 챙겨 회사를 빠져나왔다.

예림은 정말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지만 지유의 끝장은 보고 싶어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래요. 지금 바로 대표님께 전해줄게요. 어떻게 되나 한번 보자고요.”

예림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감히 이현을 이렇게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유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주면 바로 잘리지 않을까?

예림은 지유가 잘리는 걸 정말 너무 보고 싶었다.

하여 사무실 문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대표님.”

이현은 머리도 들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무슨 일 있어요?”

예림은 공손하게 그 자리에 선 채 이렇게 말했다.

“대표님, 온 비서님이 근무 시간에 함부로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대표님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감시한다면서 그러지 않으면 회사가 망하는 거냐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어요. 이를 회사 사람 모두가 봤어요. 온 비서님 정말 가면 갈수록 점점 겁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감히 대표님 머리 위로 기어오를 생각 하고 회사를 저주하는지. 저는 온 비서님의 이런 태도가 너무 막 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해고하는 게 어떨까요...”

이현은 차갑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장 나가.”

예림의 말을 듣는 것조차 싫었다.

이에 예림은 멍해졌다. 이현이 이 일을 알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무조건 지유를 해고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불똥이 자기에게 튈 줄은 몰랐다.

예림은 살짝 억울했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표정을 보고 더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 뻘쭘하게 다시 나왔다.

지유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는데 마침 안에서 구급상자를 든 의사가 한명 나왔다.

큰 키에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석훈이 지유를 보더니 활기 넘치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형수님, 왜 회사에 있지 않고 여기 계세요? 가방까지 메고, 어디 가시게요? 형님이 말 안 했어요? 형수님 다친 거 알고 저한테 검사 좀 해주라고 하던데...”

이현이 진찰을 봐달라고 그를 부르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하고 있긴 한 것 같다.

지유는 그런 석훈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단 대표님부터 챙겨줘요. 전체적으로 자세히.”

지유는 이렇게 말하더니 어리둥절한 석훈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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