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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승아의 얼굴이 순간 부어올랐다. 승아는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웠다.

승아는 역시 무대가 어울렸다. 불쌍한 척하는 것도 아주 예술이었다.

아까 막무가내로 덤비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지유도 승아가 가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말 좀 가려서 해요!”

지유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승아가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유 언니, 저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저는 언니 남자를 뺏은 적이 없어요. 오해하지 마요...”

“온지유!”

이현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지유가 깜짝 놀랐다. 그가 갑자기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그러다 이내 자신이 승아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지유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죽을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

이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연약한 승아를 자기 품으로 당겨왔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지유도 관성에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오빠.”

승아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지유를 쏘아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사과해.”

지유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과하라는 이현의 말이 비수가 되어 지유의 심장을 후벼팠다.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지유는 억지로 추스르며 말했다.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

“네가 승아한테 손댄 거 내가 못 봤을 거라 생각해?”

이현이 싸늘하게 말했다.

승아가 이현을 말리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지유 언니 너무 탓하지 마요. 지유 언니 기분을 잡치게 했으니 다 내 탓이에요.”

“그래도 이렇게 제멋대로 나오면 안 되지.”

여기는 사람이 적고 기자도 없었기에 사진이 찍힐 일도 없었다.

그들이 대담하게 애정 행각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지유는 숨이 점점 조여오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넘치면 해가 된다고 했는데 그녀는 오늘 자신감이 너무 넘쳤던 것 같다.

지유는 이현에게 도대체 뭘까?

아내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낯선 사람보다 못했다.

이현은 차갑고 매정한 이현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난 당신 앞에서 한 번도 제멋대로 나간 적이 없어요.”

지유는 제멋대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니 시끄러워질 일도 만들 리가 없었다.

누가 그랬던가, 착하면 오히려 손해라고.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현 곁을 오래 지키면서 업무적인 접대를 하고 술에 취해도 지유는 직접 차를 잡아 집으로 돌아갔다.

아프거나 다쳐도 그가 걱정하지 않게 혼자 병원으로 향했다.

그가 신경 쓰는 게 싫어서 그랬지만 오히려 그는 지유가 무쇠로 만든 몸이라 다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승아한테 사과하라니까, 세 번 말하게 할래?”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고 언짢은 티를 냈다. 인내심이 바닥난 게 틀림없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건 양보할 수가 없어 지유가 고집을 부렸다.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 사과도 안 해요.”

“꼭 내 기분을 잡치는 일을 해야겠어?”

지유는 이현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반항하면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

오자마자 지유가 힘없이 당하는 광경을 본 지희가 얼굴을 굳히고 지유를 막아 나섰다.

“정말 우리 지유가 만만한 줄 알아요? 지유 편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이렇게 괴롭히나 본데, 여이현 씨, 지유 아직 당신이랑 이혼하기 전이에요. 그런데 벌써 저 세컨드를 감싸고 도는 거예요? 밖에 기자들도 많은데 좋은 구경거리 만들어 줄까요?”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지희를 쏘아봤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이현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지희는 말은 당당하게 내뱉었지만 이현이 무섭게 쏘아보자 순간 기세가 살짝 눌렸다.

“제 말은 상황을 너무 걷잡을 수 없게 만들면 누구든 다 손해라는 거예요.”

지희는 승아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전시 보러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기자들이 냄새라도 맡으면 어떡하려고요?”

승아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한발 물러섰다.

“오빠, 그만해요. 나는 괜찮아요. 피곤한데 먼저 내려가서 쉬면 안 돼요?”

이현은 하얗게 질린 승아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승아의 팔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피곤하면 이런 행사는 참석하지 마.”

이현도 더는 따지지 않고 승아를 이끈 채 자리를 떠났다.

지유는 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지유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당당하게 자리를 비우는 두 사람을 보며 지유는 자신을 비웃었다.

‘사모님’이라는 타이틀을 가지면 뭐 해? 이현이 단 한 번도 그녀를 아내로 받아들인 적이 없는데.

지희는 떠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욕했다.

‘연놈들, 정말 역겨워.’

고개를 돌려보니 지유가 눈시울을 붉힌 채 그들이 떠나간 자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지희가 얼른 지유를 다독였다.

“지유야, 신경 쓰지 마. 노승아가 올 줄은 몰랐어. 알았다면 바로 입장 금지라고 했을 텐데. 미안해. 또 속상하게 했네.”

두 사람이 그녀를 앞에 두고 꽁냥거리는 걸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얼마나 열불이 터질까.

지희는 지유가 속상한 게 싫었다.

지희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더니 꽉 움켜쥐었던 주먹에 힘을 풀었다.

“여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언젠간 마주쳤을 거야.”

한편, 이현은 승아를 휴식실로 데려다주고 그녀가 자리에 앉자 바로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얼굴은 좀 어때?”

이현이 물었다.

원하던 목적에 도달한 승아가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이현은 승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이 이렇게 부었는데 장난해?”

승아가 멈칫하더니 자기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얼한 게 아픈 건 사실이었다.

“언니가 세게 때리긴 했는데, 언니를 화나게 한 내 잘못이니 어쩔 수 없죠.”

“이런 얼굴로 화보는 어떻게 찍어?”

이현이 승아의 말을 자르며 진지하게 물었다.

“많이 부었는데 화장품으로 가려지겠어? 스케줄 영향 주는 거 아니지?”

승아는 그제야 이현을 도와 여진그룹의 화보를 찍어주겠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얼음으로 냉찜질 좀 하면 돼요. 걱정하지 말아요. 나 할 수 있어요.”

이현이 사람을 불러왔다.

승아의 매니저가 얼음으로 얼굴을 찜질해 줬다.

이현은 계속 옆에서 전화하고 있었다.

승아는 몰래 그런 이현을 훔쳐봤다. 그는 일할 때 매우 진지했고 웃음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약간 인정머리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매력은 넘쳤다. 이에 승아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승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현의 일을 돕는다는 생각에 승아는 그와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야말로 이현과 천생연분이다.

지유 따위가 뭐라고, 그냥 이현의 비서일 뿐이라고 승아는 생각했다.

이현은 전화를 끊더니 승아를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나올 필요 없어.”

이 말에 승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왜요? 나 할 수 있는데.”

이현이 붓기가 하나도 가시지 않은 승아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빨리 내려가지는 않을 것 같아서. 촬영에 차질을 줄 바엔 내일 다시 얘기하는 게 좋겠다.”

승아가 자책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다 내 잘못이에요. 오후에 촬영 있는 거 알면서 다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현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승아의 매니저에게 말했다.

“데리고 가서 쉬어요.”

승아는 이현과 함께 있고 싶었다.

오후 촬영이 내일로 연기되었으니 더 할 일이 없어졌다. 승아의 목적은 원래 둘만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기에 매니저를 밀쳐내고 이렇게 말했다.

“오빠, 나...”

승아의 말을 듣지 못한 이현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덤덤하게 물었다.

“온지유, 너 지금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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