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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이현은 몸이 뜨거웠고 술 냄새가 세게 풍겼다.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이 바로 지유의 귓가로 전해졌다.

술을 마신 건가?

지유가 그런 이현을 불렀다.

“이현 씨?”

이현이 지유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머리를 그녀의 머리카락에 갖다 대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조금만 안고 있자.”

이에 지유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왜 이렇게 술을 퍼부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던 지유는 몸이 뻣뻣해질 지경이었지만 이현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키스했다.

지유를 또 승아라고 생각했나 보다.

지유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이현 씨...”

“이렇게 조금만 더 누워있자, 지유야.”

이에 지유가 다시 입을 꾹 닫았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적어도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이현이 이런 적은 별로 없었기에 지유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지유는 그가 이렇게 자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지유는 이현을 살짝 밀며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자지 마요. 샤워하든지 아니면 이불을 덮든지...”

이현이 방향을 고쳐 눕더니 지유를 번쩍 들어 자신의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 지유의 코끝엔 이현의 향기로 가득했다. 술 냄새와 몸에서 나는 시원한 향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

지유는 지금 매우 당혹스러웠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현을 바라봤다.

이현도 눈을 감고 있지는 않았다.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유는 그가 왜 기분이 별로인지 헤아리기가 귀찮았다고 눈도 오래 마주치기 싫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이현이 손으로 지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뜨거운 손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져 지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현이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파?”

지유는 코끝이 찡했다. 억울한 게 너무 많아서 그런지 갑자기 들이닥친 이현의 관심을 당해내기 힘들었다.

“그건 왜 묻는 거예요?”

지유의 말에서 원망이 묻어났다.

이현은 마치 지유의 기분을 다독여주듯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너를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보내지 않을게.”

이건 지금 그녀를 관심하는 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현은 두 사람의 결혼은 거래일뿐이라고 다른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

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이현을 힐끔 쳐다봤다. 이현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녀를 다독이는 건 멈추지 않았다.

이제야 지유는 이현이 자기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현이 술을 마셔야만 두 사람의 관계가 일반 부부처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지유는 손을 들어 이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와의 거리를 더 좁히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지유의 이성이 충동을 이겼고 한참 동안 허공에 떠 있던 손을 다시 내렸다.

이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눈을 떠보면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여이현으로, 그녀는 온지유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손을 다시 내린 지유는 얼굴을 이현의 가슴에 기댄 채 그의 심장 소리를 느꼈다. 숨소리도 규칙적인 걸 봐서는 잠에 든 것 같았다.

지유는 그제야 시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현 씨, 당신 사랑하는 사람이 나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주 조금이라도 난 정말 기뻐했을 텐데.”

사실 지유는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지유에겐 사치였다.

그렇게 눈을 감은 지유는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 달콤함에서 깨어날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꿈은 언젠가 깨게 되어 있다.

이튿날 깨어나 보니 옆은 이미 텅 비고 없었다. 이현이 아침 일찍 나간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머리맡에 쪽지가 한장 놓여 있었다. 쪽지엔 호기로운 이현의 글자가 보였다.

[나 회사 가. 집에서 쉬고 있어. 밥 꼭 챙겨 먹고.]

옆엔 카드 한 장이 더 놓여 있었다.

카드를 집어 든 지유는 어제 이현이 승아에게 썼다는 1억이 떠올랐다.

그 사실을 안 지유에게 이런 방법으로 보상하려는 걸까?

이현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유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승아를 사랑하면서 그녀와 이혼하지 않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혼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도 지유에겐 큰 용기가 필요했다.

이현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그를 좋아하게 된 건지, 왜 기꺼이 그의 옆을 7년이나 지킨 건지 말이다.

지유는 그녀의 제일 아름다운 청춘과 제일 행운스러운 시간을 모두 그에게 쏟아부었다.

그런 이현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씁쓸했다.

그렇게 모든 용기를 다 바쳤는데 엔딩이라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물러나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은 늘 이성적이어야 한다. 남자에 모든 걸 쏟아부어서는 안 되고 일방적인 짝사랑은 더더욱 안 된다. 아니면 결국 이렇게 꼴이 우스워지고 만다.

지유는 카드를 서랍에 넣고 다시 꺼내지 않았다.

지희가 문자를 보내왔다. 작품 전시가 오늘부터이니 구경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지유에게 내준 아이디어는 별로 쓸 게 없어도 지희는 불타는 노력으로 작은 유명세를 가진 화가가 되었고 동시에 디자이너기도 했다. 지유는 산책도 할 겸 전시에 가려고 했다.

지유는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다. 지희는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누다가 지유를 발견하고는 얼른 대화를 마무리하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내 반쪽, 왔어?”

그러면서 지유를 꼭 끌어안았다.

지유도 그런 지희를 안아주며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

“축하는 무슨. 그냥 일상이지.”

지희는 지유가 건넨 꽃다발을 받으며 말했다.

“네가 오니까 너무 좋아. 평소엔 일이 바쁘다고 전시에 잘 오지도 못했잖아.”

이에 지유는 약간 미안해졌다.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런 말 하지 마. 우린 제일 좋은 친구니까 이해해 줄게.”

업무가 바쁜 건 사실이었고 가끔 시간이 날 때도 지희와 모여서 밥을 먹는 게 전부였다.

지희가 일적으로 하는 행사는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지희가 물었다.

“이혼은 어떻게 되어가?”

지유는 지희가 쓴 이혼신고서가 떠올라 이렇게 말했다.

“야, 그소리 하니까 생각난다. 너 그렇게 쓰면 어떡해? 나 혼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여이현이 혼내기까지 해? 이런 가정폭력범 같으니라고. 당장 앞장서.”

“딱 봐도 일부러 그랬네.”

지유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 서류라면 어지간히 총명한 사람은 다 사인 안 해. 그런데 이현 씨가 퍽이나 사인 하겠다.”

지희가 입을 앙다물며 말했다.

“난 그냥 복수해 주고 싶어서 그랬지. 결혼까지 해놓고 자기만 쏙 빠져나가겠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여자 만나고 있잖아. 네가 바친 청춘이 얼만데, 이혼할 때 조금이라도 더 보상받아야지. 여이현에게 양심이 남아있다면 재산 분할이라도 잘해줘야 할 거 아니야.”

이 화제에 지유는 다시 기분이 잡쳤다.

“오늘은 일단 이 얘기하지 말자. 전시 보러 오라며. 우리 재미있는 얘기 하자.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그러자.”

지희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어 줄게. 나랑 같이 이겨내자.”

이 말에 지유는 마음이 따듯해져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전시에는 기자들도 몇 명 참석했다. 지희의 전시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인터뷰도 받아야 하기에 계속 지유와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이때 전시장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노승아 씨, 반갑습니다.”

승아가 전혀 흠잡을 데 없는 미소를 지으며 지희네 회사의 관계자와 인사했다.

“반가워요. 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어요. 저도 작가님 그림 아주 좋아하거든요.”

“작가님 그림을 좋아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작가님은 지금 인터뷰 중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승아를 아래위로 훑었다. 팔에 파운데이션으로 가린 작은 상처가 하나 보였다.

지유의 기억이 맞다면 승아는 어제 병원에 다녀왔다. 난리법석을 떨길래 얼마나 큰 상처인가 했는데 고작 스친 상처 같았다.

지유는 어제 이현의 뒤에 숨어 긴장한 모습을 보이던 승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살도 그런 엄살이 없다고 생각했다.

뒤로 돌아선 승아는 지유를 발견하고 얼른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지유를 불렀다.

“지유 씨.”

지유가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 씨도 여기 있었네요.”

지유가 대꾸하지 않았지만 승아가 계속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왜 출근 안 하시고 전시에 오신 거예요? 오빠가 이런데 오게 해요?”

“제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지유가 미지근한 말투로 말했다.

승아가 말을 이어갔다.

“그게 아니라 이런 장소에서 만날 줄은 몰랐죠. 그것도 혼자.”

승아는 일부러 그녀가 혼자 왔다는 걸 짚어내며 다시 화제를 이현에게로 돌렸다. 그 뜻인즉 지유가 무엇을 하든 이현이 함께 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하긴 승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현은 종래로 그녀의 곁을 지켜준 적이 없었다/

이때 누군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승아 씨, 오늘 너무 예쁘다. 치마 어디서 샀어? 너무 잘 어울리는데?”

승아가 환하게 웃으며 질문한 여자를 향해 말했다.

“예쁘죠. 남자 친구가 선물해 준 거예요.”

“아, 매거진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1억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승아가 수줍게 대답했다.

“네.”

“남자 친구 정말 너무 잘해준다. 치마 하나에 1억을 팔다니, 평소에도 승아 씨한테 돈 잘 쓰겠네.”

승아가 지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당연하죠. 남자 친구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연히 돈 쓰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죠.”

이현이 승아에게 쓴 1억이 지금 승아의 몸에 걸친 이 반짝거리는 치마였다.

순간 지유는 그 치마가 너무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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