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화

“지유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서 오기 싫다고 해서 내가 올 수밖에 없었어요.”

승아는 얼른 손에 난 덴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며 말했다.

“오빠도 지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을 그르친 건 아니죠?”

지유가 회사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현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지만 승아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

“아니야.”

이현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왔으니 앉아.”

이현의 말에 승아는 내심 기뻤다. 그녀를 받아준다는 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회의하러 간다면서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이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했다.

“회의 시간 뒤로 30분 미루세요.”

승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서 혹시나 이현이 원망하면 어쩌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메꾸면 된다.

소파에 앉은 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명하려 했다.

“오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때 내가 인사도 없이 떠난 거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지금은 다시 돌아왔으니까...”

“먼저 일 처리 좀 할게.”

이현이 승아의 말을 잘라버렸다.

승아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빠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승아는 별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오빠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

승아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반 시간 중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약간 이현의 속내를 맞히기 어려웠다.

진호가 안으로 들어와서야 이현은 하던 일을 멈췄다.

이현이 걸어오자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

“오빠, 나...”

“손은 아직도 아파?”

그녀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까?

승아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제 안 아파요.”

“응.”

이현이 가볍게 대답하더니 진호의 손에서 한약을 받아왔다.

“귀국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목도 불편하고. 이 약 마셔. 성대에 좋은 약이야.”

승아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약을 보며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이현이 승아의 소식을 주목하고 있었으니 성대가 불편한 것도 알았겠지, 이현이 승아를 아직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승아는 얼른 약을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오빠가 이렇게 걱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해요. 얼른 다 마실게요.”

코에 가까이 대지도 않았는데 맡기 힘든 냄새가 풍겨왔다.

한약을 싫어하는 승아였지만 이현이 준 것이었기에 승아는 꾹 참고 마셨다.

너무 써서 미간이 찌푸려졌고 목구멍이 메어왔지만 군말 없이 한 번에 끝냈다.

승아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해치워서야 이현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대표님, 회의 곧 시작합니다.”

진호가 옆에서 귀띔했다.

이현이 승아에게 말했다.

“나 이제 일하러 가야 해. 들어가 봐.”

승아가 입가를 닦으며 어쩔 수 없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찾으러 올게요.”

이현이 바깥으로 나갔다.

승아는 그런 이현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기분이 좋아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이겼어. 오빠는 아직 날 사랑해.]

사무실 밖.

회의실로 걸어가던 진호가 이현에게 물었다.

“대표님, 왜 탕약에 피임약을 넣으신 거예요?”

아무 표정이 없는 이현은 차가워 보이기까지 했다.

“승아 호텔에 갔었다면서요.”

진호는 그제야 알았다. 아마도 어젯밤 그와 잠자리에 든 여자가 승아라면 혹시나 임신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 같았다.

피임약을 먹어야 안전하다.

하루 종일 지유는 회사로 나오지 않았고 전화로 휴가를 내지도 않았다.

평소 이현의 곁을 지키며 실수를 한 적도 자리를 비운 적도 없는 지유였다.

요새 지유는 점점 제멋대로 나갔다. 회사를 나오지 않으면서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이현은 속에 화가 치밀어올라 하루 종일 얼굴을 굳히고 웃은 적이 없었다. 이에 직원들은 혹시 업무 실수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퇴근하고 이현은 바로 본가로 향했다.

그 시각 지유는 이미 풀려난 뒤였다.

방에 돌아와 누운 지유는 아직도 두손이 바들바들 떨렸고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무척 불안해했다.

손에 난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않아 어느새 수포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현이 현관으로 들어오자 도우미가 다가와 신발을 갈아주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윤는?”

“위층에 계십니다.”

도우미가 말했다.

“사모님은 밖에서 들어오신 후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습니다.”

대답을 들은 이현은 바로 위층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어보니 침대가 봉곳하게 올라와 있었다. 지유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다.

지유의 이상행동에 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침대로 걸어가더니 이불을 살짝 건드렸다.

“건드리지 마요!”

지유가 이현의 손을 탁 쳐냈다.

사실 지유는 문 쪽에서 나는 기척을 이미 들었다. 다시 그녀를 깜깜한 방에 가두려는 줄 알고 지유는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이불을 푹 뒤집어쓴 지유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누군가 그녀의 이불을 건드리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 손을 뿌리친 것이다.

이현은 이상할 정도로 큰 지유의 반응에 얼굴이 굳더니 차갑게 말했다.

“온지유, 호들갑 떨 필요 없어. 나도 너 건드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이현의 목소리에 불안했던 지유의 마음이 천천히 차분해졌다.

하지만 그 말에 구멍 난 가슴이 아파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유는 감정을 추스르며 이렇게 말했다.

“대표님이 온 줄은 몰랐어요.”

“이 집에 나 말고 너를 건드릴 사람이 어디 있어?”

이현이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너의 마음이 다른 데로 샜다면 몰라도.”

지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머릿속엔 여진숙의 매정한 말들로 가득 찼다.

어쩌면 승아가 이현과 더 잘 어울릴 수도 있다.

때마침 승아도 귀국했으니 두 사람은 못 이룬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유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겠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요.”

지유는 자신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다.

“승아 씨가 서류 가져다줬죠? 너무 늦지 않았길 바라요.”

오늘따라 제멋대로 행동한 지유에 이현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온지유 비서, 사리가 이렇게 밝은 사람이 왜 이런 사달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거지?”

사달이라면 그의 어머니를 노엽게 한 것,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다치게 한 것일 테지.

지유는 다친 손을 이불 속에 감췄다. 마음이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엔 유의할게요.”

이혼하면 자연스럽게 이런 일도 없어질 것이다.

지유는 그들 중 그 누구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젯밤 그 여자 누구였는지 조사해 봤어?”

지유가 멈칫하더니 대꾸했다.

“시시티브이가 고장 나서 아직이에요.”

이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오늘 하루 종일 도대체 뭐한 거야?”

지유는 그제야 창밖을 내다봤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 있었다.

하루 종일 회사에 나가지 않았으니 이현은 분명 그녀가 업무 태만에 게으름을 피운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바로 조사해 볼게요.”

지유는 더 입씨름할 생각이 없었다. 여씨 가문에 빚진 돈까지 갚으면 둘 사이는 완전히 끝나게 된다.

그러면 7년 동안 지속된 짝사랑도 결말을 맺을 수 있겠지.

지유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더니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 집에서 지유가 유일하게 미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현이었다.

하지만 지유는 이제 지쳤다. 더는 이런 수모를 겪고 싶지 않았다.

이현은 그런 지유를 바라보다 그녀도 손을 다쳤음을 알게 되었다.

그 상처는 승아보다 훨씬 심각했다.

지유가 방에서 나가려는 찰나 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Related chapters

Latest chapter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