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의 질문에 윤혜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이혼 협의서에 사인하라고 한 건 분명 이준혁 아닌가?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준혁이 허리를 쭉 펴고 일어나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오늘밤 본가 저택에 식사 자리가 있으니까 잊지 말고.”이준혁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윤혜인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대표님.”그녀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이준혁이 고개를 돌려보니 윤혜인은 아주 공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럼 다음주 월요일은 시간이 되시나요?”이준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무시하고 가던 길 가는 건데. 왜 굳이 멈춰 서서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걸까!“네 마음대로 해.”어두운 얼굴로 사무실을 나선 이준혁은 사무실 문을 쾅 닫았고 확실하게 약속을 잡은 윤혜인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해탈감이 들었다.그를 놔주기로 결심한 만큼 윤혜인은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싶었고 이제 이혼만 하면 그녀는 더 이상 수시로 그를 마주할 필요가 없게 된다.1년, 2년, 3년 혹은 10년, 그게 언제든 윤혜인은 자신을 치유하면서 천천히 그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어느덧 저녁 6시가 되었고 운전 기사는 시간에 맞춰 윤혜인을 픽업한 뒤, 이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서울의 중심 지역에 위치한 저택은 땅값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며 인테리어 또한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이 결혼 생활에서 윤혜인이 제일 아쉬운 게 바로 이준혁의 할아버지 이태수였다.이준혁의 할아버지는 보통 명문 가문과 다르게 오픈 마인드였으며 계급 관념도 없었기에 단순한 윤혜인을 매우 예뻐했다.그러다가 할아버지는 병에 걸리시게 되었고 이준혁은 할아버지에게 윤혜인과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그러자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기적처럼 좋아지더니 요 몇 년 사이에는 점점 더 건강해지기까지 했다.이제 이혼하면 할아버지를 보러 올 수 없다는 생각에 윤혜인은 마음이 울적했다.거실로 들어서자 집사가 윤혜인에게 할아버지가 손님을 접대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임신 때문인
송소미는 임세희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지만 임세희는 송소미를 전혀 신경 쓰지도 않은 것이다.“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잠에서 덜 깬 거 아니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려고 너 같은 거렁뱅이랑 결혼하겠어? 이씨 사모님 꿈은 다음 생에 다시 꿔! 준혁 오빠는 세희 언니와 결혼할 거야. 준혁 오빠가 세희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데 너 같은 천박한 여자와 결혼할 리가 없잖아. 넌 미친 게 분명해. 집에 가서 약이나 먹어. 이 멍청한 계집애야!”송소미는 흥분한 듯 윤혜인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윤혜인은 송소미가 흥분할수록 더욱 담담한 모습이었다. 다만 이 욕설들이 태교에는 좋지 않은 듯했다.이때, 밖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공손한 태도로 상황을 물어보자 송소미가 경비원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당장 이 천박한 여자를 밖으로 끌고 가!”윤혜인은 매달마다 저택에 방문해 할아버지와 식사를 했기에 이곳의 단골이었다. 그리고 송소미는 이씨 가문의 친척으로 꽤 중요한 손님이다.경비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난감했고 송소미는 머뭇거리는 경비원을 보며 더욱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개라면 집을 잘 지켜야지! 어떻게 이런 천박한 여자를 집에 들일 수 있어?! 당장 끌고 가! 안 그러면 할아버지한테 얘기해서 당신들 다 잘라버릴 거야!”개라는 욕까지 먹은 경비원은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송소미는 이태수 어르신의 친척이기에 그들을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다.송소미가 이렇게까지 난동을 부릴 줄 몰랐던 윤혜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송소미 씨, 적당히 하세요!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요. 돈이 많다고 다른 사람보다 귀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막 욕을 할 자격이 없어요!”“그래서 뭐? 너나 정신 차려, 이곳은 이씨 가문이야! 난 이씨 가문의 직속 친척이야! 내가 누굴 욕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참기 힘들면 지금 당장 꺼져!”송소미가 고고한 자태로 윤혜인을 내려다보며 비꼬듯이 말했고 그녀의 막
”네.”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대답하면서 조금 전에 너무 충동적이었던 자신을 원망했다.이제 창피를 당하는 일만 남았겠지.이틀 뒤면 이혼할 텐데 이준혁은 절대 귀찮은 일을 자초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사이를 인정할 리가 없을 것이다.“저것 봐요, 준혁 오빠! 저 여자도 인정했잖아요…”말을 하던 송소미가 순간 멈칫했다. 눈앞에 있는 이준혁이 갑자기 정장 외투를 벗더니 윤혜인에게 덮어주었다.윤혜인도 깜짝 놀랐다. 이준혁은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왠지 기분이 꽤 좋아 보이기까지 했기에 윤혜인은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었다.윤혜인은 여자들 중에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이준혁의 외투는 그녀에게 심각할 정도로 컸다. 하지만 가슴 앞에 젖은 부분은 굴곡이 심했기에 잘 가려지지 않았다.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이준혁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하면서 외투의 첫 번째 단추를 잠갔다. 가는 손가락으로 단추를 잠그는 행동이 매우 능숙하고 야릇했기에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심장은 쿵쾅거렸다.“준혁 오빠!”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야릇한 분위기를 와장창 깨트렸고 송소미가 윤혜인을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저 염치도 없는 여자가 오빠를 꼬시려고 하잖아요! 절대 저 여자에게 속으면 안 돼요!”고개를 돌린 이준혁이 얼음장 마냥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 여자 끌어내.”송소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끌어내라고? 누구를? 송소미 그녀를?“준… 준혁 오빠, 말씀 잘못하신거 아니에요?”송소미는 확신이 서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준혁이 끌어내라는 사람이 당연히 윤혜인인데 실수로 그녀를 짚은 거라고 여겼다.진작부터 송소미를 끌어내고 싶었던 경비원 두 명은 송소미 양쪽에 서서 그녀에게 말했다.“송소미 씨, 그만 나가주세요.”“내 몸에 손대지 마!”송소미는 그녀를 잡고 있던 경비원의 손을 뿌리치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준혁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 어떻게 저런 천박한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태수는 화가 나서 손까지 덜덜 떨었다.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것들이 감히 혜인 아가에게 저딴 짓을 저지르다니!이태수는 저 두 사람을 단 1초라도 더 보기 싫었다. 그는 지팡이를 다시 바닥에 내리꽂더니 다시 지시를 내렸다.“앞으로 저 두 사람은 절대 이 집에 들이지 마.”문미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평소에 친척과 아랫사람에게 늘 온화하고 다정한 이태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이 없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문미정이 잘못했다고 빌려고 했지만 경비원들이 그녀의 팔을 잡고 저택 밖으로 끌어냈다. 30초도 안 된 사이에 두 사람은 저택에서 완전히 쫓겨났고 저택 안은 다시 조용했다.이태수는 윤혜인에게 다가가 마음 아픈 듯 말을 걸었다.“우리 혜인이가 많이 서운했지?”“할아버지, 저 괜찮아요.”“얼른 가서 옷 갈아입어. 그러다가 감기 걸려.”이태수는 저택에 윤혜인을 위해 방 하나를 준비했고 그 방에는 일년 사시절을 입을 수 있는 새 옷들로 가득했다.옷을 갈아입은 윤혜인이 아래층으로 내려와 이태수와 함께 식사를 했다.윤혜인 곁에 앉은 이준혁은 갈비찜이 식탁에 올라오자 그녀가 이 요리를 좋아했던 게 기억이 나서 갈비 하나를 집어 그녀 그릇에 넣어주었다.하지만 이를 발견하지 못한 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으로 쌀밥을 휘적거렸고 머릿속에는 이준혁이 임세희를 데리러 갔다는 송소미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임세희를 데리러 갔다고 했는데 왜 임세희는 보이지 않지?그러다가 허약한 임세희의 모습이 생각나자 윤혜인은 그녀가 건강상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했다.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평소와 다른 이준혁의 태도였다. 윤혜인이 송소미에게 결혼 사실을 밝혔는데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이내 윤혜인은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임세희와 사이가 가까운 송소미는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기에 이준혁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걸 수도 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준혁이 그녀의 허벅지를 꼬집었고 깜짝
잔뜩 긴장한 윤혜인은 숨을 꾹 참은 채 어떻게든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더워서 그래요, 할아버지.”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더울 뿐만 아니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맞은편에 앉아 계신데 이준혁은 테이블 밑에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다니, 마치 어렸을 때 어른들 몰래 연애를 하고 있는 커플 같았다.“역시 젊은이들이라 더위를 많이 타네. 이 늙은이는 하나도 안 더운데 말이야!”이태수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다가 실수로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곁에 서있던 도우미가 얼른 허리를 굽혀 주우려고 하자 이태수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내가 허리를 굽히지 못할 정도로 늙지는 않았어.”말을 하던 이태수가 허리를 숙여 젓가락을 주우려고 했다. 이 순간, 할아버지가 고개만 숙이면 바로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빨갛게 달아올랐던 윤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너무 놀라서 숨까지 참고 있었다.다행히 이준혁은 할아버지가 허리를 숙이던 순간, 그녀의 손을 빠르게 놔주었고 몰래 바람을 피우다 들킬 뻔한 그런 아슬아슬한 기분이 든 윤혜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사레에 걸려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이태수는 바닥에서 주운 젓가락을 도우미에게 건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혜인아, 왜 또 사레에 걸린 거야?”말을 하던 이태수가 멈추고 고개를 돌려 이준혁을 보며 그를 나무랐다.“넌 혜인이가 저렇게 사레에 걸렸는데 등도 안 두드려주고 뭐 하는 거야!”이준혁이 손을 뻗자마자 윤혜인은 혹시라도 또 그에게 농락을 당할까 봐 얼른 피했고 이준혁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이태수에게 말했다.“할아버지, 보세요. 얘가 못 건드리게 하는 거예요.”“너 혹시 우리 혜인이한테 뭐 잘못한거 있는 거 아니지?”이태수가 이준혁을 빤히 쳐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치 윤혜인이 그의 가족이고 이준혁은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인 듯한 태도였다.겨우 기침을 멈춘 윤혜인이 일부러 이태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이태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윤혜인이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태수에게 달려가 그의 등을 쓸어주며 얼른 설명했다.“할아버지, 준혁 씨 탓하지 마세요. 제가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한 거예요.”“혜인아, 할아버지에 거짓말을 하지 마. 정말 저놈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거라면 이 할아버지에게 얘기해. 내가 저놈을 죽여줄게!”“거짓말 아니에요, 할아버지. 제가 조금 더 자유롭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됐어요.”윤혜인이 억지웃음을 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믿지 않는 이태수를 한참 동안이나 어르고 달래서야 이태수가 다시 웃음을 보였다.그리고는 장씨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약을 먹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늦은 밤, 이씨 저택에서 나온 윤혜인은 혼자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이준혁은 끝까지 그가 운전해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조용한 차 안에서 이준혁이 갑자기 정적을 깨며 말했다.“당분간 우리가 이혼한다는 말은 할아버지에게 비밀로 해.”“네.”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할아버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몸은 지금 그 어떤 충격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이다.“그리고 나중에 이혼해도 넌 할아버지를 자주 보러 갈 수 있으니 걱정마.”이준혁의 말에 윤혜인도 같은 마음이었다.“네.”“그 한 글자밖에 할 말이 없어?”윤혜인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이준혁이 말을 이어갔다.“속은 좀 괜찮아? 내일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봐.”“괜찮아요. 어차피 준혁 씨도 제가 임신 가능성이 없다고 했는데 굳이 검사할 필요가 없잖아요!”윤혜인의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고 순간 말문이 막힌 이준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왜 그래?”“내가 만약 임신했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윤혜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그럴 리가 없어.”“그러니까 제 말은 만약…”“만약이라는건 없어. 난 절대 널 임신하게 만들지 않을거야.”이준혁이 단호한 말
”내 남편의 정인을 보러 가기 싫은 게 잘못됐어요? 이준혁 씨,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건 당신 마음이에요. 제발 저만은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돼요? 저한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윤혜인의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며 서러움이 폭발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듯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그녀를 막 다뤄도 되는 건가? 그녀는 이미 충분히 초라한데 왜 계속 그녀를 괴롭히는 걸까?눈물은 줄 끊긴 구슬 마냥 하염없이 흘렀고 윤혜인은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었다.차라리 비참한 모습과 이 잔인한 현실을 다 보여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계속 이렇게 참고만 살다가 언젠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준혁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윤혜인을 조용하게 쳐다보았다.“혜인아,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이준혁의 목소리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윤혜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어떤 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곧 이혼할 사이인데 그녀가 질투할 자격이라도 있을까?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준혁 씨에게 경고하는 거예요. 우린 아직 이혼하기 전이니까 적당히 자제하세요. 만약 저도 이준혁 씨처럼 다른 남자를 만나…”“윤혜인!”이준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고 다음 순간, 갑자기 몸을 돌려 윤혜인에게 다가갔다.“읍!”이준혁은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있다!눈이 휘둥그레진 윤혜인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윤혜인.”키스를 멈춘 이준혁이 낮게 깐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눈썹을 들썩이던 이준혁이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눈 감아.”당황한 듯한 그녀의 순수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이준혁은 왠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그는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이준혁이 그녀에게 사랑을 줄 수 없다면 그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한 윤혜인은 숨을 고르다가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가 하신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어차피 저는 홀로서기를 해야 돼요. 당신이 계속 저를 케어 할 수는 없으니까요.”“혜인아, 우리가 앞으로 부부가 아니어도 넌 내 가족이야, 난 계속 너를 돌볼 거야.”이준혁이 그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차안에는 온통 이 남자의 향기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제 이 향기를 끊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자신을 속일 수가 없다.이준혁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동정은 받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희는 이혼하고 나서 더 이상 서로를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이준혁 아내가 아니라면 그 어떤 신분으로 그의 곁에 남아있든 그녀는 마음이 아플 것이다.“혜인아…”인상을 찌푸린 이준혁이 입을 열려고 하던 순간, 핸드폰이 급하게 울렸고 윤혜인이 담담하게 말했다.“가요, 준혁 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요.”가는 내내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뒤도 안 돌아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그녀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밖에서는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윤혜인은 왜 이준혁이 바로 가지 않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세희가 오매불망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하지만 이런 문제도 그녀가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가장 큰 바램은 하루 빨리 이혼하는 것이다.그래야 그녀도 마음이 흔들릴까 봐 매일 걱정하진 않을 테니.다음날, 윤혜인은 종일 집에서 휴식을 취했고 일요일 오전 소원이 그녀를 데리고 쇼핑하러 나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쇼핑을 즐기다가 소원은 얼굴 마사지를 받으러 가자고 했지만 윤혜인은 마사지 제품들이 뱃속의 아이에게 안 좋을까 봐 자신은 받지 않고 소원을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