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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하.”

고개를 든 민지훈이 피식 웃었다.

“이미 이혼한 사이에 결혼기념일을 챙기시겠다. 좀 웃기지 않아?”

“우리... 신혼여행에서도 따로 다녔고 결혼하고 나서도 기념일 한번 챙긴 적 없잖아. 그러니까 오늘... 오늘만큼은 같이 있으면 안 될까? 그냥... 우리 결혼생활에 대한 마지막 작별 인사라고 생각해. 우리 비록 행복하게 살진 않았지만 마지막은 사이좋게 헤어질 수 있는 거잖아.”

가벼운 그녀의 목소리에 애원이 살짝 서렸다.

“조연아, 너 또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 거야?”

“수작 같은 거 없어. 내일이면 여길 떠날 거야. 그리고 다신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약속해.”

조연아가 다급하게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아니, 맹세해.”

순진무구한 그녀의 표정에 민지훈의 머리가 갑자기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극심한 두통에 정신을 차리려는 듯 살짝 고개를 젓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 따라 이상하리만치 잦은 두통, 그리고 그때마다 흐린 기억 속 낯선 여자아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과 함께 항상 조연아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꽤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은 민지훈이 되물었다.

“정말... 약속 지킬거지?”

그냥 매정하게 뿌리치고 돌아설 수도 있는데 왜 이 보잘것없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지 민지훈 본인도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럼. 무조건 지킬게.”

“그럼 이거 놓고 타.”

“우리 별장으로 가면 안 돼? 오늘 눈 와서 되게 예쁠 것 같은데.”

차에 탄 조연아가 재잘거렸다.

소복하게 쌓인 눈,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눈송이가 유난히 아름답게 빛나는 밤, 이 마지막을 민지훈과 함께하면 더없이 좋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부탁에 민지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말없이 차는 돌리는 모습에 조연아는 왠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백 번 상처받고 아파도 단 한 번의 작은 친절에 감동받고 감사하며 살아온 지난 10년, 이제 이 감정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게 아쉬우면서도 어딘가 후련햇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의 발자국이 도화지처럼 새하얀 눈길에 자국을 남겼다.

“부부가 함께 첫눈을 맞으면 백년해로 한다던데.”

“그런 거 다 헛소리야.”

“나도 알아. 오로라를 보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더니. 그것도 다 거짓말이더라. 그리고... 우린 이미 이혼했잖아. 백년해로라니, 말도 안 되지.”

괜히 들뜬 목소리로 어색함을 덮어보려 애쓰는 조현아였다.

“추워?”

연신 손을 비비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지훈이 문득 물었다.

“아니.”

“이거 써.”

그가 건넨 검은 가죽장갑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처음이네. 당신이 나 먼저 걱정해 주는 거.”

장갑을 꼭 쥔 채 아이처럼 기뻐하는 조연아를 보고 있자니 민지훈은 왠지 모를 미안함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기뻐하는 여자였나...’

“고마워.”

조연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잘해줘? 솔직히 나...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최악인 여자는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단호한 부정에 잠시나마 희망이 담겼던 조연아의 눈동자가 다시 차갑게 식었다.

“그럼 왜 이러는데?”

“마지막이라며. 사이좋게 헤어지자며.”

‘아... 오늘 밤만 같이 있어주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해서... 그래서 이러는 거였어?’

실망스러웠지만 민지훈과 말없이 눈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조연아는 행복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가슴 시리긴 했지만.

잠시 후, 저택에 도착한 민지훈은 추위에 빨갛게 언 손으로 여전히 장갑을 꼭 쥐고만 있는 조연아를 발견하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장갑 줬잖아. 왜 바보처럼 들고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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