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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송문영은 얼굴이 붉어졌다. 김예훈은 송문영이 여유를 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젯밤만 해도 김예훈 앞에서 당당하게 콧대 세우고 함께 노래부르기도 싫어하던 송문영이 오늘 이곳에 서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한다.

김예훈은 그녀를 한참 쳐다보았다. 훈녀로 불리던 옛 동기 송문영은 까칠했지만 본성이 나쁜 건 아니었다. 이 생각이 든 김예훈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당장 널 해고할 생각은 없어. 다만 승진과 관련해서는 네 능력을 보고 판단할게.”

말을 마친 김예훈은 송문영을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졌다. 이제 막 회사를 받았기에 운영 상황 같은 것도 어떤지 모르는 판국에, 송문영과 쓸 데 없는 이야기 주고 받을 시간이 없었다.

송문영은 아름다운 여자지만 김예훈이 보았던 미모의 여성은 차고 넘쳤다. 적어도 자신의 아내인 정민아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

YE 투자 회사는 대표가 바뀌면서 진행 중이던 모든 투자 계획이 중단된 상황에 오히려 1조를 투입해 양질의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한다.

이 소식은 마치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남해시 전체로 전파됐다.

남해시 유명 일가 세력들에게 크나큰 변수가 될 것임을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가장 먼저 YE 투자 회사에 취임한 새 대표 이사의 신임을 사게 된다면 남해에서 제일 가는 일가로 급부상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정씨 일가는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고 그 즉시 가족 연회를 열어 모든 친인척을 불러 모았다.

정민아는 김예훈에게 연회에 참가할 준비를 해야하니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며 전화를 걸었다.

김예훈은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정민아는 이미 자신의 빨간 포르쉐에 올라타 있었다. 휴대폰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여보, 내가 늦었지.”

김예훈은 잰걸음으로 정민아에게 다가왔다.

정민아는 허리 라인이 강조된 예복을 갖춰 입었다. 가슴팍에는 독특한 장미 브로치를 차고 있었다.

‘프라하의 심장?’

김예훈의 눈이 반짝였다. 이것이 왜 그녀에게 있는지 김예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내가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김예훈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하지만 정민아는 탐탁치 못하다는 표정으로 김예훈을 쳐다보며 차디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눈빛으로 한 번만 더 쳐다보면 눈알 뽑아버린다.”

“알았어, 안 볼게.”

자신의 표정을 들킬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김예훈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급히 거뒀다.

“그리고, 오늘 연회에서 말 최대한 아끼고 여기저기 구경하지 마. 우리 가족에게 망신 주지 말라는 뜻이야.”

“알았어.”

김예훈은 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안전벨트를 채 매기도 전에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예훈, 이렇게 입고 연회에 가겠다고? 어떻게 삼겹살 냄새가 밴 거야? 쓰레기 더미에서 주어왔어?”

그의 장모인 임은숙이 냉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데릴사위인 김예훈은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은 인물이었다.

임은숙은 기다란 다리를 드러내는 짧은 연회복을 입고 있었다. 성숙함에서 느껴지는 섹시함이 사람을 더욱 매료시켰다.

그에 반해 아무 옷이나 주워 입은 김예훈의 옷차림은 촌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말에 개의치 않고 씩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말해줘도 변화가 없을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임은숙은 치밀어 오르는 화에 몸이 떨렸다.

“어떻게 너 같은 쓸모 없는 놈에게 내 딸이 시집을 갔는지, 정말 불운한 정씨 집안이야!”

“엄마, 그만 화내. 화장도 다 해놓고.”

운전하던 정민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김예훈의 모습에 그녀도 할 말을 잃었다.

“다른 집안 사위 보다가 우리 집 사위 보면, 화가 안 나게 생겼니?”

임은숙은 김예훈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똑똑히 들어. 입 안 연다고 아무 일 없다고 생각하지 마. 내일 아침에 당장 가정법원 가서 이혼 서류 제출 할 생각이니까! 이게 너에게 주는 보상금이야, 알아들어?”

임은숙은 핸드백에서 오만원권 뭉치를 꺼내 김예훈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하지만 김예훈은 상황 파악을 못한 사람처럼 망부석이 되어 앉아있었다.

정민아는 모진 마음을 먹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김예훈을 보자 이가 갈릴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거절하려는 일말의 의지라도 있다면 이 정도로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 속으로 몇 번이고 화를 삼키고 나서야 김예훈을 당장 차에서 쫓아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

정씨 일가의 별장 앞, 외제차가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고 로비 안에는 이미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정민아의 여동생, 정소현은 이미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이 학교를 마치고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이곳으로 온 듯 했다.

그럼에도 그녀만의 특별한 청초함에 장내에 있던 남자들은 침 삼키기 바빴다. 정씨 일가의 여동생이 성인이 된다면 최고로 아름다운 여성이 될 것이 분명했다.

가족들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많은 정씨 일가 사람들이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그 가운에 김예훈은 투명인간처럼 어느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했다.

어차피 정씨 일가에서 자신의 위치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기에 김예훈 역시 개의치 않았다. 오늘 밤에는 그저 구색만 갖추러 온 것이기 때문에 많이 먹을 수만 있다면 부러울 게 없었다.

하지만 이런 김예훈을 굳이 걸고 넘어지려는 사람도 있었다. 정소현은 김예훈 옆자리에 앉아 말했다.

“못난 형부, 내일 우리 집에서 쫓겨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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