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고 유월영은 그대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예전에 레온 정원에서 온천을 즐기던 중, 유월영은 서정희한테서 현시우가 국내 한 회사를 인수해 우회 상장이라는 경로를 통해 그 동안 해외에서의 산업을 국내로 이전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 있었다.당시에는 이 사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방금 신연우의 얘기를 듣고 보니...설마 현시우가 진짜 외국에서 돌아오려고 하는 건가?유월영은 뒤통수를 벽에 기댄 채 고개를 살짝 들어 작년 섣달 그믐날을 떠올렸다.연재준의 마음에 쭉 두고 있었던 지난해 섣달 그믐날에 그녀도 현시우를 만났다.신연우는 최근 몇 년 동안 가끔 국내로 돌아오곤 했으며 유월영과도 여러 번 만난 적 있었다.유월영의 눈빛은 추억 속에 잠겼고 너무 감성에 젖어 있었던 나머지 문 앞에 있는 연재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연재준은 유월영이 뭔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표정을 보며 이 순간 그녀가 도대체 어떤 추억 속에 빠졌는지 알고 싶었다.잠시 후, 유월영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은 전화를 받았다. “승연 언니.”이승연이 말문을 열었다.“서씨 가족이 방금 나에게 연락했어. 너랑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그러더라.”유월영은 담담하게 거절했다. “난 그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수 없어.” 그렇다고 해서 유월영이 서씨 가족을 만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후 3시로 약속을 잡자.”유월영이 만남에 동의하자 이승연은 되려 약간 놀랐다. “너, 생각이 바뀌었구나?”유월영은 눈을 내리꽂으며 말했다. “승연 언니, 합의서를 나 대신 준비해 줄 수 있어? 금액은 30억 원으로 적어놔. 그들이 이 금액에 동의하면 내가 그들과 합의할게.”이승연은 그 말에 살짝 의아해했다. 어젯밤 유월영은 분명히 합의하는 데 강한 반대의 의지를 보여줬는데 어떻게 갑자기 마음을 고쳐 먹은 걸까?하지만 유월영이 합의하는 데 동의하고 이 사안에 마침표를 찍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이승연은 알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호텔 방 안에서 연재준은 전화를 걸어 사람을 시켜 바꿔 입을 옷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연재준의 이 병은 갑자기 발작한 것이 아니었다.일찌감치 봉현진에서 살짝 불편함을 느꼈고 유월영 때문에 밤새도록 서울에 와 피곤한 데다 설상가상으로 폭설까지 맞자 결국 열이 나고 말았다.연재준은 전신 거울을 보며 셔츠를 입었고 긴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하나씩 끼워 넣었다. 입체적인 얼굴은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 유월영 앞에서 보였던 그 무례한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졌다.그렇다. 연재준이 어젯밤 유월영의 방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던 건 그 무례함과 뻔뻔함 때문이었다. 사실 유월영은 연재준을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다.과거에 있었던 그 일들 때문에 유월영은 연재준이 무척이나 거북했다. 그들의 화해도 한 장의 종이처럼 가냘팠고 힘이 없었다. 새해 첫날에 겨우 쌓은 호감은 백유진 덕분에 깔끔하게 파괴되었고 유월영은 지금 다시 연재준에게 높은 가슴의 담벼락을 세웠다.정말 인과응보가 따로 없다.연재준은 짜증을 내며 외투를 입고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눌렀다.그리고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는 이혁재를 만났다.이혁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약간 놀란 듯이 말했다. “재준아, 너 신주시로 돌아갔지 않았어?”연재준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어제 왔어.”이혁재는 친구의 썩 좋지 않은 인상을 살펴보며 물었다.“너 정말 병들었어? 병원에 가봤어?”연재준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이젠 다 나았어.”이혁재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연재준은 미동도 하지 않는 소나무처럼 우뚝 서서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이혁재는 그제야 눈앞의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 그렇구나, 넌 일부러 아픈 척 핑계를 대고 유 비서와 화해하려고 온 거구나? 참 잘했네, 재준아. 넌 이제 하다 하다 불쌍한 컨셉까지 잡고 달려드는구나.”그는 연재준을 20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연재준이 이 정도로 비참한 수단까지 이용하는 것을 본 적
유월영은 자리를 바꾸기 귀찮아서 그냥 점심때 이승연과 식사한 식당에서 서씨 가족과 만났다. 다만 실내 식당에서 실외의 양산 아래로 이동한 것뿐이었다.새해 연휴가 끝나고 모두가 정상적인 업무 진행 상태로 돌아왔다. 조금 적막해진 거리를 보며 유월영은 갑자기 새해 밤에 연재준과 손을 잡고 북적이는 거리를 걸으며 연극을 보기 위해 연극관에 갔던 일을 떠올리며 정신을 놓고 있었다.마침내 맞은편의 의자가 누군가에게 밀려내자 유월영은 다시 정신을 차렸고 무의식중에 시선을 맞은편에 돌렸다.하늘에서 눈이 사뿐히 내리고 있었고 자리에 앉은 사람은 연재준이었다.어젯밤과 이른 아침의 병에 찌든 창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깔끔하고 비싼 정장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옷깃부터 소매까지 세부적으로 정교했고 잘 다리미질 되어있는 상태를 보니 언제나 높은 곳에서 위풍당당하게 내려다보던 평소의 연재준이었다.유월영은 잠시 멈칫하다가 연재준에게 질문했다. “재준 씨가 굳이 아픈 몸을 끌고 나를 위해 참전했나요? 그 진심은 고맙지만 난 이 변호사만 있으면 충분해요. 이 변호사는 방금 공증 사무소에 서류를 가지러 가서 곧 돌아올 것이에요. 별다른 일이 없다면 신주시로 돌아가세요. 연말에 회사가 얼마나 바삐 돌아가나요.”예전에 연재준과 함께 있을 때 매년 연말은 연재준에게 가장 바쁜 시기였다. 그렇게 바쁜 시기에 이따위 보잘것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하정은은 업무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었으니 부디 해고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당신에게 꼭 도움이 될 거예요.”연재준은 유월영이 주동적으로 말문을 떼자 살짝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병든 내 몸 상태를 걱정해? 아니면 회사를 걱정해? 아니면 내가 너무 빡세게 일할 걸 걱정해?”유월영은 커피를 들며 유유하게 말했다. “난 다만 나 때문에 하정은에게 피해가 가는 게 괴로울 뿐이에요.”연재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딴 사람을 신경 쓰는 건 이렇게 잘 하면서 왜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거야? 분명히 합의하고
한 손으로 사인하고 한 손으로 수표를 건넨 다음 공증까지 받았으니 이 일은 여기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서씨 가족이 떠난 후, 윤영훈은 순식간에 유월영 쪽 사람으로 전환하여 실실 웃으며 제안했다. “우리 근사한 곳을 찾아 제대로 축하 파티를 열죠. 오늘 밤은 내가 살게요. 그냥 플로팅 라이프로 가죠.”유월영과 이승연은 모두 정중하게 사양했다. 이렇게 세 명이 함께 놀러 간다니? 아무리 봐도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아, 사람이 너무 적어서 그래요?” 윤영훈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별거 아니에요. 내가 몇 명 더 부를게요!”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이 그의 이런 태도를 보면 윤영훈이란 사람은 유월영이 서씨 가족에 파견한 잠입 요원인 줄 알겠다.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의 합의금을 지급하고도 이렇게 즐거워하며 축하 파티를 준비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하지만 윤영훈이 이 정도로 준비를 철저하게 하자 유월영과 이승연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냥 윤영훈과 그의 친구들 식사 자리에 잠깐 참석하는 걸로만 생각하기로 했다.윤영훈이 부른 사람은 30대쯤 되는 성숙하고 세련된 남자였다. 유월영은 그 남자를 몰랐지만 이승연은 그를 보자마자 멈칫하며 온몸이 굳어졌다.윤영훈이 자연스럽게 그 남자를 소개했다. “이분은 오성민이라고 해요. 내 친구예요. 처음에는 이 친구에게 서정희 사건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으니 함께 식사나 하며 그동안 쌓였던 좋지 않았던 걸 풀어보죠.”오성민은 잘생긴 외모를 갖췄지만 관상을 보면 속이 아주 깊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오성민은 유월영, 이승연과 차례로 악수했다.오성민이 이승연의 손을 잡을 때 조용히 몇 초 동안 더 잡고 놓지 않았고 이승연이 살짝 움직이자 그제야 웃으며 손을 놨다.그들은 둥근 테이블을 중심으로 주위에 앉았고 윤영훈은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말했다. “오 변호사는 서남 지역에서 유명한 형사 변호사예요. 이 변호사는 내 친구를 알고 있었나요?”이승연은 담담한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유월영의 집에서 가정부가 전화를 걸어와 유월영은 방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가정부는 유현석이 최근 술에 빠져 매일 술에 절어있어 이영화가 도무지 그를 설득할 수 없다고 했다. 이대로라면 유현석의 몸 상태가 악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유월영에게 묻는 것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떠나는 그날부터 유현석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데 술에 빠지는 정도까지 발전할 줄이야.유월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이영화가 유현석을 챙기느라 그녀의 몸이 다시 불편해질까 봐 불안했다.“내일 아버지가 깨어나면 나한테 전화해요. 내가 아버지와 얘기해 볼게요.”가정부는 알았다고 대답했다.유월영이 전화를 끊고 방으로 돌아가 보니 전화하는 짧은 순간에 방에 이승연과 하정은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 세 남자는 모두 사라졌다.“남자들은 다 어디에 갔어?”이승연이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한 사람은 담배 피우러, 한 사람은 전화 받으러, 한 사람은 화장실에 갔어.”유월영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두 빈자리를 넘어 하정은에게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넌 방금 신주시에서 돌아왔어?”하정은은 능수능란하게 대답했다. “그래, 난 먼저 유진 씨를 스워시로 가는 비행기에 모셔다드리고 여기 서울로 왔어.”백유진을 스워시로 보내다니? 유월영은 살짝 충격을 받았다. 하정은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유진 씨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유월영은 국을 한 그릇 떠서 천천히 마시며 생각에 빠졌다. 연재준이 서슴없이 백유진을 국외로 보내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이것도 연재준이 나에게 부리는 응석인가? 백유진을 보내고 나면 연재준이 더 이상 백유진한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거잖아? 그렇게 먼 나라로 주저 없이 보내는 걸 보면 그냥 날 화나게 하기 위해 백유진을 찾았던 것인가? 연재준이 정말 백유진을 좋아했던 적이 없는 건가?’유월영의 기분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았다. 단지 그렇게 오랫동안 신경이
유월영은 앞 구석에서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와 그쪽으로 곧장 걸어갔다.그리고 연재준과 오성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의 분위기를 보면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유월영의 발소리가 들리자 두 남자가 동시에 그녀 쪽으로 돌아봤다.오성민은 유월영이 연재준를 찾아온 것을 알고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연재준은 담배를 끄고 유월영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왜 나왔어?”유월영은 방금 그들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재준 씨는 성민 씨를 알아요?”연재준이 그 말에 무심하게 말했다. “상가 유람선에서 너와 함께 포커를 치던 그 오 대표를 기억해?”“기억해요.”그날 포커 테이블에는 서울 신씨 가문의 투자 업계 대부 신현우, 신주시 연씨 가문의 재벌 연재준, 송초시 윤씨 가문의 부동산 업계 거물 윤영훈이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용청시 오씨 가문의 IT 업계 거물... 오씨?유월영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설마 그 오씨가 오성민이었단 말인가?연재준은 유월영의 눈 앞을 가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귀 뒤로 넘기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럽고 촉촉한 피부를 만지작거렸다. 어느새 눈빛도 그윽해졌다. “오성민은 오 대표의 사촌 동생이야.”그제야 유월영의 머릿속에서 얽혔던 실마리들이 순식간에 전부 정확하게 연결되었다. “그럼 당신이 오성민에게 서정희가 기껏해야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사실을 서씨 가족에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한 건가요?”“내가 분명히 말했지? 네가 합의하든 말든 내가 널 이 상황에서 무사하게 빼내는 방법이 있다고.”“...” 연재준이 유월영 몰래 많은 일을 해결한 것 같았고 심지어 주동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유월영의 어머니를 위해 외국 의사를 모셔 온 것이나 서씨 가족에 “간첩”을 심어둔 것도 전부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었다.연재준은 몸을 약간 숙여서 그녀의 시선에 맞췄다.매혹적인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길게 내빼며 첼로가 귓가에서 천천히 울려 심금을
창밖의 밤은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은 짙은 어둠에 휩싸였다. 작은 눈꽃이 겨울바람에 실려 창틈으로 들어왔지만 고작 겨울바람의 추위로는 실내의 습기와 열기를 쫓아내지 못했다.유월영이 이불 밖으로 하얗고 야들야들한 팔을 내밀어 침대 옆 등을 켜려고 했다.그러자 남자가 다시 그녀의 벌거벗은 등을 눌렀고 그녀의 목덜미에 미친 듯이 키스했다. 유월영은 기습 행동에 몸을 떨었고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격렬하게 그녀의 척추를 따라 허리까지 쭉 키스했다.유월영은 베개에 엎드려 그 키스가 간지러워 몸을 꼬았고 몸을 돌려 남자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연재준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베개 양쪽에 놓으며 머리를 숙여 그녀와 키스했다.유월영은 자연스럽게 연재준이 뭔가... 너무 치근덕거리는 느낌이 들었다.어젯밤에는 병든 주인 없는 개처럼 유월영을 찾더니 지금은 자꾸 사람에게 치근덕거리는 골든리트리버처럼 보였다.유월영은 연재준과 한 번 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연재준이 이렇게 부드럽게 애무하자 자제할 수 없이 폭삭 빠져들었다.어둠 속에서 연재준은 몸을 놀리며 평소의 침착함과 이성적인 모습을 잃은 유월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연희진이 연재준에게 전화해 유월영의 마음을 얻었냐고 묻던 그날을 떠올렸다.연재준이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연희진은 아직 연재준이 유월영을 손에 넣지 못한 사실을 눈치채고 연재준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오빠, 그런 말을 못 들어봤나요? 고백은 어린이들이나 하는 유치한 일이고 성인은 직접 상대방을 유혹해야 한다는 말을요. 그리고 유혹의 첫걸음은 바로 인간성을 버리고 고양이가 되고 호랑이가 되고 또 비에 푹 젖은 강아지가 되라는 것이죠.”“무슨 뜻이지?”“다시 말해 자기 약점을 드러내고 세상 불쌍한 척을 하라는 것이죠. 그러다가 적절한 시기에 본 모습을 드러내 상대방을 순식간에 잡아먹는 거죠.”연희진의 그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 연재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유월영을 침대에서 일으켜서 자기 무릎에 앉히고 그녀의 몸을 자기 어깨에 기대
오성민은 그녀의 냉랭한 눈빛을 보고도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화났어? 당신은 아직도 나를 신경 쓰고 있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7년이야. 난 누구보다 당신을 잘 알고 있어. 만약 당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건드린다고 해서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거야.”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승연아, 나 그 여자와 헤어졌어. 우리 다시 시작하자.”이승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와 혁재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우리의 혼인 관계를 아는 사람도 적지 않을 텐데, 오 변호사님은 모르셨나 봐요?”오성민은 그녀가 7년 동안의 감정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게 믿기지 않은 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승연아,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하는데.”이승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혁재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에게 발길질 하기 시작했다.“감히 내 마누라한테 치근덕거리다니!”오성민은 날아오는 발길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의 정장에 허연 발자국이 찍혔다.고개를 든 오성민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이혁재, 네가 승연이와 결혼하는 이유가 뭔지 내가 모를 줄 알고. 마누라? 지금 나랑 해보겠다는 거야? 승연이가 나를 남편이라고 부를 때 넌 이제 막 대학교에 다니는 동생이었다고.”오성민은 재밌는 일이 생각난 듯 히죽거렸다.“재밌네. 너 언제부터 승연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야? 어쩐지 내가 승연이랑 같이 대학교에 물건 주러 갔을 때, 네가 나한테 그렇게 적대적이더라니, 어린놈이 징그럽게 걔가 너의 이모뻘이라고.”이혁재는 평소에 헤헤거리며 진지한 모습이 적었지만, 이렇게 살기를 띠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는 ‘쌍'이라고 욕을 한 번 하고는 오성민에게 바로 주먹을 휘둘렀다.오성민도 이번에는 더 이상 봐주지 않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복도에서 주먹다짐하며 몸싸움을 벌였다.이승연이 외쳤다.“이혁재.”이혁재가 반응이 없자 그녀도 두 남자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 자칫하다 자신도 봉변당할 수 있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자 이승연은 더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