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예전 강영수가 그녀를 찾아 파리에 왔던 그 날처럼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그녀가 자주 지나가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는 어깨에 쌓이는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그곳에서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렸다...“어머, 아가씨, 왜 우세요?”아까 방에 들어왔던 은경애는 바닥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다 돌연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고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급히 다가갔다.“아이고. 왜 이러세요.”은경애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에야 정신을 차린 장소월은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걱정 마세요. 전 괜찮아요.”은경애의 시선이 장소월의 손에 쥐어져 있는 사진첩 속 사람에게 향했다.“어머나, 누군데 이렇게 예뻐요?”그녀는 급기야 사진첩을 손에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정말 예쁘네요. 선녀 같아요.”장소월이 말했다.“제 엄마예요.”“어쩐지. 아가씨도 선녀처럼 아름다우시잖아요.”이제 장씨 집안 예전 도우미들을 제외하고는 이 남원 별장의 안주인이었던 성예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장소월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엄마는 늘 부드러운 사람이셨어요...”“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고, 모란꽃을 좋아했어요...”당시 연선우는 어머니를 위해 정원에 커다란 모란꽃밭을 만들었었다. 꽃 피는 계절 창밖을 내다보면 정원 가득 만연한 모란꽃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말이다.장소월은 은경애에게 자신의 많은 일을 털어놓았다.남원 별장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장소월은 퇴원한 뒤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장시간 억눌렀던 마음이 처음으로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그래서 아가씨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거였네요. 그것도 사모님 덕분이었어요. 아가씨... 그럼 사모님은 그 뒤에 어떻게 되셨어요?”“엄마는... 절 낳고 나서 돌아가셨어요.”“사모님... 대표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도우미가 문을 두드리고 일러주었다.은경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
그녀가 거절하지 않자, 전연우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그때 마침 모든 사진 정리를 마친 장소월은 내려와 한 바퀴 둘러보았다. 꽤나 만족스러웠다.“회사 나가지 않았어?”“잠깐 시간 나서 너 보려고 왔어.”전연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이어 백옥 같은 피부에 남은 자국을 보며 말했다.“아직도 아파?”장소월은 늘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그 뻔뻔하게 뱉는 음란한 말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연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장소월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그의 손을 밀어내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걱정해줘서 고마워. 이제 괜찮아.”고맙다는 말에 전연우의 이마가 찌푸려졌다.“고마워?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돼?”갑자기 들이닥친 그의 분노에도 장소월은 평온했다.“걱정해주니까 고맙다고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바깥에서 받은 스트레스 나한테 풀지 마.”장소월이 손을 빼내고 몸을 돌린 순간, 강렬한 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벽에 밀쳤다. 전연우가 화가 잔뜩 어린 눈으로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노려보았다.“대체 언제면 알아들을 거야?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건 고맙다는 한마디 말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네가 원하는 건 내 몸 아니었어? 이제 가졌잖아. 내가 더 어떻게 하길 바라?”그의 눈빛에 갇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소월아... 이 오빠가 뭘 원하는지 넌 잘 알고 있잖아.”그녀는 늘 이렇게 모르는 척하기가 일쑤다.전연우는 그녀가 언제까지 모르는 척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장소월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와 상대하면 영원히 좋은 일은 없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알았어. 착하게 네 말 잘 들을게. 네가 싫다면 앞으로 그런 말 안 할게.”장소월은 또다시 화제를 돌렸다.“다른 일 없으면 별이 보러 갈게.”“잠시만.”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전연우는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당황함이 역력한 얼굴로 검은색 셔츠
장소월의 거친 호흡은 몇 분이 지나서야 다시 가라앉았다.전연우는 장소월의 머리카락 정리를 마친 뒤 흠뻑 젖은 치마를 갈아입히고는 번쩍 안아 들고 밥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별이 얼굴의 상처엔 이미 딱지가 앉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아이는 아기 의자에 앉아 파란색 아기 숟가락을 마구 휘저었다. 다정하게 내려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도우미들이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그가 장소월을 의자에 앉히자 도우미가 곧바로 삼계탕을 가져다 식탁에 올려주었다.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안 좋아해?”“그냥 이 냄새가 아직도 적응이 안 돼.”“그럼 먹지 마.”전연우가 도우미에게 명령했다.“가져가세요.”“네. 대표님.”전연우가 사랑이 넘실거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제 밥 먹을 수 있지?”장소월은 병아리가 모이 먹듯 천천히 깨작거렸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항상 밥 먹는 데에 30분이나 걸렸다. 장해진은 밥상에선 말하면 안 된다고 엄격히 그녀를 교육했었다. 하여 지금까지도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만 먹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녀가 조용히 옆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모두 눈에 담고 있으니... 그의 마음속 텅 비었던 한 군데가 드디어 채워지는 것 같았다.장소월은 그런 전연우의 시선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별이가 분유를 토해내자 그녀는 얼른 휴지를 몇 장 뽑아 닦아주었다. 다행히 옷엔 묻히지 않았다.“앞으론 반만 하면 돼요. 많이 준비할 필요 없어요.”“네, 사모님.”도우미가 별이를 안고 나가자 주방엔 그들 두 사람만 남았다. 식사를 마친 전연우는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이내 아직 밥을 먹고 있는 그녀를 의식하고는 라이터와 담배를 도로 넣었다.전연우의 존재는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장소월은 그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꼭 그렇게 날 보고 있어야겠어? 가서 네 할 일 해.”전연우는 피식 웃음을 터
그는 정말 극도로 즉흥적인 기분파 사람이다. 뭐가 생각나면 곧바로 행하고야 만다.장소월은 그의 손에 이끌려 주차장으로 내려가 운전석에 앉았다.전연우가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며 말했다.“이번엔 안 혼낼 테니까 일단 T형 주차부터 시작해. 저번에 내가 가르쳤던 거 잘 기억해봐.”“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다 잊어버렸어.”장소월이 긴장한 얼굴로 핸들을 잡았다.“부탁인데...”그녀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다시 가르쳐줄 수 있어? 이번엔 열심히 들을게.”전연우가 진지한 얼굴로 따끔하게 말했다.“넌 모든 것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하지만 운전은 아니야. 그러니까 열심히 배워야 해. 아니면 너 혼자 차를 몰고 나갔을 때 내가 마음이 안 놓이잖아.”그저 말뿐인 말이었다. 그녀가 운전을 제대로 배웠다고 해도 그는 절대 그녀를 혼자 나가게 두지 않을 것이다.전연우가 이토록 단언하는 걸 보면 그녀는 정말 운전에 재능이 없는 것이다. 전연우는 사물에 대한 판단 능력이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월등하다. 그가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안 되는 것이다.그에 못지않은 인내심을 가진 장소월이 차분히 그를 맞받아쳤다.“노력은 배신하지 않아. 모든 게 네 말대로 절대적인 건 아니야.”전연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렇다면... 네 실력을 기대해야겠네.”장소월은 그의 예상을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역시나 장장 20분이 걸려서야 겨우 차를 주차 자리에 밀어 넣었다. 그것도 옆에 세워진 차에 부딪히기까지 하면서 말이다.그깟 차 흠집쯤은 전연우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무리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여자의 어리석음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연습을 시작한 지 한 시간 뒤, 전연우는 담배를 피우려 차에서 내렸다. 장소월은 차에 앉아 핸들을 꼭 잡고 있었다. 차는 전연우의 개인 주차장에서 가장 저렴한 장소월 운전 연습 전용 차였다.발이 액셀에 닿은 순간, 그녀의 눈에 머지않은 곳에 서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지금 이 발에 힘을
“누군지 몰라?”장소월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나 그 사람과 예전부터 아는 사이야? 아니면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이야?”전연우가 말했다.“넌 알 필요 없어. 앞으로 만나면 무조건 피해. 그놈의 눈에 띄어 좋은 일은 없으니까.”장소월은 강지훈을 다시 떠올려 보았지만, 머릿속엔 조각난 작은 기억 한 조각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방에 돌아온 이후, 전연우는 은경애에게 장소월을 절대 나가지 못하게 지켜보라고 거듭 신신당부했다.전연우가 내려갔을 때, 남원 별장 문 앞에 검은색 군용 지프차가 멈춰서 있었다. 차 안에 앉아있던 남자가 뒷좌석에서 훈장이 걸려있는 제복을 입고 검은색 군화를 신고 내렸다. 눈 등에 험상궂게 남아 있는 흉터는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누굴 찾아오셨는지요?”강지훈의 부관이 말했다.“이 집 주인 만나러 왔어요.”강지훈이 손을 흔들자 부관이 뒤로 물러섰다.“전연우 씨는요? 난 전연우 씨 친구예요.”“저희 대표님께선 지금...”도우미가 대답하려던 순간, 전연우가 나타나 그녀의 말을 끊었다.“요즘 한가해?”강지훈의 음산한 눈동자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뒤룩 굴러갔다. 도우미들은 전연우가 나오자 이내 자리를 떴다.“손 씻었다면서요?”강지훈이 집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전연우가 그를 막아 세웠다.“신발 벗고 들어가.”현관에 펼쳐져 있는 카펫은 모두 해외에서 들여온 물건이었다. 강지훈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다.강지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돈을 벌대로 벌었으니, 대단한 줄 아시나 보네요?”전연우가 차갑게 말했다.“돈은 확실히 사람을 대단하게 만들지.”도우미는 다급히 새 남성용 슬리퍼를 꺼냈다. 강지훈의 그 눈 자국이 가득한 군화는 문밖에 놓아두었다.강지훈 같은 포악한 성정의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몇 명 되지 않는다.늘 다른 사람이 그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옆에 있던 부관이 허리를 굽히고 강지훈에게 슬리퍼를 신겨 주었다.강지훈은 오랜 감옥 생활에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장소월, 31세, 암으로 사망.서울 강남병원,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연우야, 오늘 의사선생님이 투석한다고 주사를 놓아주셨는데 너무 아팠어.」「나 곧 죽어. 보러 와 줄 거지?」「제발, 연우야...」장소월이 힘겹게 머리를 돌려 전화기의 메시지 창을 보고 있다. 메시지를 몇 개나 보냈건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전연우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그녀의 손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뼈만 남아 앙상했고 두 눈은 안쪽으로 푹 꺼져 있었다.사지는 이미 암 후유증으로 인해 썩어가고 있었다.몸을 까딱할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임 간호사도 거의 보름 너머 와보지 않았다.원인: 더 이상 치료해도 의미 없음.그녀는 사실 엄살이 많았고 아픈 걸 끔찍이 무서워했다. 암 말기라 그녀는 매일 고통에 시달렸고 전연우에 대한 사랑만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하지만 이 넘쳐나던 사랑이 메말라가자 그녀에게 남은 건 뼈만 남은 몸뚱이였다.장소월은 전화기를 꺼버리고 조용히 죽기를 기다렸다.고통으로 그녀는 의식이 흐릿해졌다. 씁쓸하게 느껴졌다. 안 깐 힘을 다해 전연우와 결혼했고 8년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좋은 아내가 되려 했다. 모든 걸 다 바쳐 그 사람 곁을 지켰는데 그녀가 얻은 건 무엇인가?사람들은 하나 둘 그녀의 곁을 떠났고 가난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그녀가 죽으면 제일 기뻐할 사람이 전연우다. 이제 그는 자유의 몸이다. 더 이상 징그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전연우, 드디어 소원대로 송시아와 결혼할 수 있다.8개월 전.전연우의 생일날,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테이블 위 그녀가 정성껏 차린 음식들도 이미 차갑게 식어갔다.기다리던 전연우는 오지 않고 비서가 이혼서류를 가져왔다. 비서가 싱겁게 입을 열었다.“사모님, 사장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요. 이렇게 큰 전 씨 집안 산업을 누군가는 물려받아야 되잖아요.”장
새벽 12시.장소월이 악몽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다. 이마엔 땀이 맺혀있다.순간 익숙한 소독제 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다.장소월은 잠시 멍해졌다. 죽은 거 아니었나?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탈칵’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했던 병실이 밝아졌다. 눈부신 불빛에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악몽이라도 꾼 거야?”긴 다리로 침대 곁에 다가왔다. 큰 체구가 그녀의 왜소한 몸에 비친 빛을 막아주기엔 넉넉했다.“전...전연우?”장소월이 머리를 들어 뼈속까지 증오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다가오지 마!”왜 또 이 악마의 곁으로 돌아온 걸까?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뒤로 물러선다.장소월의 머리는 지금 복잡하기 그지없다. 전연우를 본 순간 크나큰 두려움과 절망이 몰려와 숨이 막혔다.전연우가 멈칫한다. 이내 가느다란 눈은 차가움으로 가득 찬다. 불쾌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고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다.“의사 불러줄게.”남자의 차가운 저음이 칼처럼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문이 쾅 하고 닫기고 나서야 장소월도 긴장이 풀렸다.남자가 떠난 후 방안에 떠돌던 강렬한 압박감도 사라졌다. 장소월은 황급히 이불을 걷어냈다. 순간 째질듯한 아픔이 손목에 전해졌다.손목을 보니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손목을 그은 건가?장소월은 아픔을 견디면서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테이블에서 구식 전화기를 들어 달력을 찾아보았다.시간을 본 순간 장소월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지금은 무려 2000년, 그녀가 18살 되던 그해였다.장소월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지금 입원 중이고 손목을 그어 전연우를 협박해 고백을 받아달라는 중인 것 같았다.전연우는 장소월이 10살 되던 해에 장해진이 밖에서 데려온 양자였다.장소월이 그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 건 그녀가 15살 되던 해 집에서 키우던 티베탄 마스티프가 갑자기 실성해 그녀한테 달려들어 물
장소월이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는 전연우에게 웃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오빠, 미안해. 전에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오빠를 궁지로 내몰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제 깨달았어. 앞으로도 꼭 기억할게. 오빠는 오빠일 뿐이라고.”난리를 피우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너무나도 평온한 나머지 아무런 생기 없는 인형 같았다.전연우의 어두운 눈동자가 빛나더니 얇은 입술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비웃음이었다. 그녀의 새로운 수작인 건가?전연우가 입을 열었다.“알았다니 다행이네. 밤새우지 말고 얼른 쉬어. 내일 데리러 올게.”그러고는 어른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장소월은 피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고 수긍하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돌아선 전연우의 눈에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고 차가움만이 남아 있었다.병실에서 나온 전연우는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장소월을 만졌던 손을 닦았다.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간 그는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손수건을 던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전연우가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버튼을 누른다.아우디 한 대가 라이트를 킨 채로 있다. 조수석에는 긴 파마머리를 한 여인이 앉아있다. 섹시한 옷차림에 손에는 담배가 들려있다. 야릇한 붉은 입술은 담배연기를 뿜어냈다.여자의 시선은 차에 타는 남자의 잘빠진 몸을 따라 움직였다.“잘 달래줬어?”전연우가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했다. 그의 눈에 역겨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여자의 손에 들린 담배를 뺏아 창밖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 내 차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마.”여자가 매혹적으로 웃어 보이더니 다리를 꼬았다.“안 피면 어린 아가씨 향수 냄새를 어떻게 덮어.”아이라인을 그린 예쁜 눈이 차 안에 놓인 핑크색 향수병으로 향한다. 거기엔 글자가 쓰여있는 스티커도 붙여져 있었다: 장소월 전용 좌석.그녀가 살짝 웃어 보이더니 말한다.“18살밖에 안되는 여자애가 점유 욕은 굉장히 강하단 말이야. 왜? 장가에 데릴 사위로 들어갈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