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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새벽 12시.

장소월이 악몽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다. 이마엔 땀이 맺혀있다.

순간 익숙한 소독제 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다.

장소월은 잠시 멍해졌다. 죽은 거 아니었나?

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

‘탈칵’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했던 병실이 밝아졌다. 눈부신 불빛에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긴 다리로 침대 곁에 다가왔다. 큰 체구가 그녀의 왜소한 몸에 비친 빛을 막아주기엔 넉넉했다.

“전...전연우?”

장소월이 머리를 들어 뼈속까지 증오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다가오지 마!”

왜 또 이 악마의 곁으로 돌아온 걸까?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뒤로 물러선다.

장소월의 머리는 지금 복잡하기 그지없다. 전연우를 본 순간 크나큰 두려움과 절망이 몰려와 숨이 막혔다.

전연우가 멈칫한다. 이내 가느다란 눈은 차가움으로 가득 찬다. 불쾌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고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다.

“의사 불러줄게.”

남자의 차가운 저음이 칼처럼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문이 쾅 하고 닫기고 나서야 장소월도 긴장이 풀렸다.

남자가 떠난 후 방안에 떠돌던 강렬한 압박감도 사라졌다. 장소월은 황급히 이불을 걷어냈다. 순간 째질듯한 아픔이 손목에 전해졌다.

손목을 보니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손목을 그은 건가?

장소월은 아픔을 견디면서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테이블에서 구식 전화기를 들어 달력을 찾아보았다.

시간을 본 순간 장소월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은 무려 2000년, 그녀가 18살 되던 그해였다.

장소월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지금 입원 중이고 손목을 그어 전연우를 협박해 고백을 받아달라는 중인 것 같았다.

전연우는 장소월이 10살 되던 해에 장해진이 밖에서 데려온 양자였다.

장소월이 그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 건 그녀가 15살 되던 해 집에서 키우던 티베탄 마스티프가 갑자기 실성해 그녀한테 달려들어 물고자 했을 때였다.

그녀를 구한 건 전연우였다. 팔을 단단히 물려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그녀를 몸 아래 숨겨 보호해주었다.

그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무서워하지 마. 눈 감아.”

장소월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눈에 전해진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도 따듯한 손길이었다.

전연우가 준 안전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고 미련으로 가득했다.

스무 살이 넘은 전연우는 이미 남자의 진중함이 있었고 얼굴도 너무나 준수했다. 진한 눈썹에 별과도 같은 눈, 넓은 어깨에 잘록한 허리와 잘빠진 골반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항상 차가웠고 잘 웃지 않을뿐더러 누구한테나 거리감을 두었다.

며칠 전 전연우의 생일에 그녀는 서프라이즈로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미 성인이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새벽에 돌아온 전연우가 침대에 누운 그녀를 발견하고는 역겨운 듯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냈다.

부끄러운 줄 모른다고 욕했다.

전연우가 이렇게 불같이 화낸 건 처음이었다.

그날 밤 전연우는 문을 박차고 나갔고 그녀를 피하기 위해 연달아 며칠이나 사라졌다.

장소월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전연우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이런 멍청한 방법을 쓴 거였다. 손목을 그어 그가 나타날 수밖에 없게 했다.

전연우와 함께한 후의 일들이 떠올라 무서워졌다.

몇 분 뒤, 여러 명의 의사가 들어왔다.

전연우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는 밖에 서있었다. 차가운 눈으로 장소월의 창백한 얼굴을 훑었다.

장소월이 갓 깨어났을 때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두려움과 절망에 가득 찬 슬픔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왜 나를 두려워하는 거지?

의사가 장소월의 상황을 살피고는 옆에 있는 동료와 토론 후 입을 열었다.

“환자분 열은 이미 내렸습니다. 내일 퇴원하셔도 됩니다. 손목에 상처는 물에 닿지 않게 조심하시고 한주 뒤에 실 뽑으러 오세요.”

남자의 차가운 얼굴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의사들은 몇 마디 더 당부하고는 바로 병실에서 나갔다.

의사들이 나가자 크지 않은 병실에 장소월과 전연우 두 사람만 남았다.

장소월은 불편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떠 그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전연우가 팔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더니 살짝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반 시간 뒤에 회의가 있어서 회사 가봐야 돼. 내일 8시에 데리러 올게. 퇴원 수속해야지.”

장소월이 입을 삐죽거렸다. 전연우는 늘 그랬다. 한 편으로는 거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잘해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정확하게는 전연우와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보는 것조차 싫었다.

죽기 전의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태연하게 전연우를 대할 순 없었다.

그녀가 말이 없자 전연우는 실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불쾌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너 자신을 해치는 멍청한 짓 하지 마. 연애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 찾으면 되잖아. 너한테 나는 안 어울려.”

장소월의 마음이 세게 저려왔다. 전생에 전연우가 했던 말 그대로였다.

그녀는 아직도 기억한다. 전생에 이 말을 듣고 그녀가 얼마나 세게 울었는지 말이다. 심지어 확 뛰어내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다. 그때도 전연우는 죽든지 살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차갑게 내뱉었다.

그녀는 이미 한번 죽었다 살아난 몸이다. 전연우에 대한 사랑도 무수히 많은 실망스러운 나날들에 소모되고 없었다.

장소월이 눈을 떴다. 창백함은 그대로지만 전연우를 바라보는 눈만은 평온했다.

전연우, 지금 이 시간부로 더는 널 사랑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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