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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정략결혼일 뿐 신경 안 써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송재이는 짜증이 확 밀려와 고개를 돌리고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에 설영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휴대폰을 거둬들이고는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타!”

전 애인을 마주할 때 누군들 화려하게 빛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오늘 밤 룸에서 그와 마주친 광경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하고 난감했다!

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휴대폰 앱을 열어서 콜택시를 부르려고 했는데 설영준이 차에서 내려와 긴 다리를 내뻗으며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에 검은색 큰 우산이 쥐어져 있었다.

계단 위에 서 있는 송재이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압적인 포스에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때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말 안 들어?”

거만하기 짝이 없고 뭐든 당연하다는 듯한 이 말투, 그녀는 순간 두 사람이 이별하지 않은 줄로 착각할 뻔했다.

다만 송재이는 곧바로 사색을 가다듬고 말했다.

“설영준 대표님, 고맙지만 나 혼자 할게...”

“새 남친 별로던데.”

설영준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야유의 뜻이 살짝 담겨 있었다.

그는 송재이의 다른 한 손을 잡아당겨 그녀를 더 가까이 다가오게 했지만 송재이는 여전히 머리를 높이 들었다.

“나랑 헤어지고 결혼한다더니 고작 저딴 자식을 찾아? 재이 쌤, 누굴 엿 먹이는 거야?”

설영준은 지금 그녀를 비웃기도 하고 방금 그녀의 처지를 비웃기도 했다.

송재이의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벌게졌다.

그녀는 발끈 화내며 설영준을 째려봤다.

“내가 어떤 사람을 찾든 너랑 뭔 상관인데? 오늘 밤에 네가 여기 있단 걸 알았다면 오지도 않았어.”

그녀는 지민건에게 속아서 이리로 왔다.

다만 이 점은 굳이 설영준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확 잡고 두말없이 차 쪽으로 끌어갔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그에겐 전혀 소용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설영준은 안으로 차 문을 잠가버렸다.

설영준은 줄곧 차가운 표정이었다.

매번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녀는 질끈 겁을 먹고 목이 꽉 막혀서 감히 소리도 못 지른다.

부슬비가 내리는 밤, 어렴풋한 밤빛에 시야가 흐릿해지고 앞 유리의 와이퍼가 좌우로 흔들며 신호등을 기다릴 때, 시간이 오래 걸리니 스르륵 잠이 쏟아졌다.

송재이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지탱하며 반듯하게 앉았는데 지금 이건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차는 길옆에 세워지고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송재이는 왠지 모르게 섬뜩한 기운이 들었다.

“너...”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옆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안전벨트를 풀고 그녀의 얼굴을 잡더니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

송재이는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처음 몇 초간은 아예 그에게 몸을 맡기다가 이 키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제야 설영준의 품에서 힘껏 몸부림쳤다.

창밖에 흩날리는 비바람이 차창을 사납게 내리치며 솨솨 청아한 소리를 냈다. 이 소리는 마치 거리낌 없이 그녀의 이성을 어지럽히는 것 같았다.

바로 이 남자처럼, 이 남자가 딱 이러했다.

그는 정말 지독하게 나쁜 남자였다.

그와 이별하고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또다시 불쑥 찾아와 그녀가 힘겹게 쌓아 올린 높은 담벼락을 무너뜨렸다.

설영준은 키스에만 몰입하다가 차갑고 짭짤한 맛을 느끼고 나서야 흠칫 놀라며 동작을 멈췄다.

그녀를 내려놓고 보니 입술과 두 눈이 똑같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울었다.

뭐가 이토록 서러운 걸까?

고작 키스 한 번 했다고 이렇게까지 서러운 일일까?

“우리 집에 네 물건이 아직 더 남아 있어. 시간 되면 와서 가져가.”

이 남자는 그야말로 거만하기 짝이 없다. 그녀를 상냥하게 달래줄 리가 없고 ‘돌아와’라는 이 세 글자는 더더욱 말할 리가 없다.

비록 똑똑히 말하진 않았지만 그와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지라 지금 그녀에게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송재이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긴 속눈썹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한참 생각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뭐가 남았든 다 필요 없으니까 버려 그냥. 주현아 씨 이사 들어와서 보게 되면 안 좋잖아.”

설영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후 그는 담담한 어투로 그녀의 머리 위에 대고 대답했다.

“정략결혼일 뿐이야. 현아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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