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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대표님 즐겁게 해드려

그 생각이 든 순간 송재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고 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추측을 입증하기 위해 송재이는 당일 밤에 바로 약국에 가서 임테기를 샀다.

빨간 줄 두 줄이라니!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몇 번이고 더 테스트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제 막 힘겹게 설영준을 단념하고 그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는데 왜 또 이런 치명타를 주는 걸까?

임신한 몸으로 남자의 집까지 찾아가 결혼을 다그치는 파격적인 스토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녀는 늘 그런 방식이 존엄도 없고 멍청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가 마주해야 하는 건 설씨 일가와 같은 재벌 가문이다.

막강한 권력으로 서민의 삶을 처참하게 짓밟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만약 설영준이 그녀가 임신한 걸 알면 기뻐할까?

어휴, 당연히 아니겠지.

그와 함께한 3년 동안 이 남자가 처음부터 섹스와 결혼을 철저하게 갈라놓는 인간이란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

설영준의 아내가 될 사람은 오직 그와 조건이 대등한 정략결혼 상대일 것이다. 주현아와 같은 재벌가 따님이 제격이다.

송재이처럼 바람이 불면 휙 쓰러지는 하찮은 존재는 가당치도 않다.

그녀는 설영준에게 끌려가 낙태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에 그녀의 가족은 단 한 명도 없다.

배 속에 아이는 유일한 핏줄이니 그녀는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

...

설도영의 과외를 관둔 송재이는 친한 선배에게 또 다른 학생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선배는 아주 열성적으로 곧장 그녀에게 학생을 찾아줬다.

이런 1대1 레슨은 시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아 낮에는 밴드에 가서 공연 리허설을 하고 밤에는 또 아르바이트를 한 건 할 수 있다.

그녀는 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어쩌면 요 녀석을 위해서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할 듯싶다.

지민건은 송재이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고 하니 축하하는 의미로 밥 한 끼 사주겠다고 했다.

송재이는 수업을 마친 후에야 그 문자를 확인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알겠다며 단답형으로 답장했다.

이젠 지민건에게도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

임신한 이상 더는 그를 지체할 수 없으니.

저녁 7시 30분, 송재이는 지민건의 차에 올라탔다.

둘만의 저녁 자리인 줄 알았는데 장소에 도착하자 다른 사람들도 더 있었다.

송재이는 멍하니 넋을 놓았고 지민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에 설영준 대표님도 있어요.”

그녀는 지민건이 무슨 속셈인지 도통 몰랐고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에게 끌려들어 갔다.

룸에 있는 몇몇 사람들 중 설영준만 아는 사이였다.

그는 고개 돌려 송재이를 바라봤다.

그 순간 송재이는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아 제자리에 선 채로 몸이 확 굳었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인데 지민건이 한사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다정한 표정으로 애원하듯 그녀에게 말했다.

“제 친구들한테 재이 씨 소개해주고 싶어요.”

친구?

송재이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남자가 지금 누굴 바보로 아나? 룸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어느 누가 그의 친구 같아 보이지?

이건 엄연한 비즈니스 술자리이고 그녀를 데리고 온 건 함께 술 마시기 위해서인데, 친구가 웬 말이냐고?

전에 설영준과 함께할 때 그녀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애인이었는데 지금 지민건은 되레 대범하게 그녀를 데리고 공식 석상에 나온다. 그녀를 술이나 따르는 여자로 취급할 따름이긴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서로 나누는 대화를 엿들어보니 전부 상업적인 얘기였다.

지민건은 조심스럽게 설영준에게 하청 계약 건을 언급했다.

오늘 밤 설영준은 깔끔한 흰색 셔츠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매고 있었고 윗단추 두 개를 풀어 멋스러운 자태를 한껏 뽐냈다. 그는 아득하고 짙은 눈매로 상대와 대화할 때 무심코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지민건 씨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말을 마친 설영준이 일부러 무심한 척하며 술이 가득 담긴 잔을 들여다보더니 또다시 지민건의 옆에 있는 송재이를 힐긋 쳐다봤다. 그 눈빛은 의도가 너무 선명했다.

지민건은 곧바로 알아채고 옆에서 줄곧 침묵하는 송재이를 힐끔 바라봤다.

송재이는 오늘 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좌불안석이었다. 이때 지민건이 달래는 듯한 말투로 그녀더러 얼른 설영준 대표님께 술을 따르라고 했다.

송재이는 그를 째려본 후 테이블에 마주한 느끼한 남자들을 쭉 둘러보았는데 다들 그녀가 술을 따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민건이 끊임없이 곁눈질했지만 송재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초조해진 지민건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부드러운 말투로 한없이 파렴치한 말을 내뱉었다.

“재이 씨, 나 한 번만 체면 세워줘요...”

그 순간 송재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고 마지막 인내심까지 극에 달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굽이 낮은 신발을 신어 꽤 빨리 걸어 나갔는데 지민건이 재빨리 룸 밖으로 쫓아오며 그녀를 가로챘다.

“재이 씨...”

“꺼져!”

송재이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지민건은 화들짝 놀라더니 유순하고 다정했던 얼굴이 흐릿한 복도 불빛 아래 점점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부모도 다 죽고 본인 조건도 별로인데 솔직히 너 같은 여자를 받아들이는 집안은 거의 없어. 나니까 싫증 안 내는 거야. 말 듣자, 안에 들어가서 설영준 대표님 즐겁게 해드려. 그럼 우리도 계속 잘 지내고 결혼까지 가는 거야.”

송재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요즘 세월에 정상적인 인간이 몇이나 될까? 다행히 지민건이 일찍 몰골을 드러내서 그녀도 제때 알아챘다.

송재이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관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는 하려고 했는데, 아니다, 됐어. 지민건, 내가 넘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네가 가당치 않은 거야!”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역병을 피하듯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지민건처럼 앞뒤가 다른 인간은 멀리 피하는 게 상책이다!

...

호텔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렸다.

송재이는 회전문 앞에 서서 가방을 한참 뒤졌지만 우산을 찾지 못했다.

차가 서서히 다가오며 전조등을 깜빡였는데 송재이는 처음에 신경 쓰지 않다가 찰칵찰칵하는 휴대폰 촬영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다보니 설영준이 운전석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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