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가 차우미의 말을 끊었다.차우미는 멈칫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난 그런 뜻이 아니야. 상준 씨도 그럴 사람이 아니고.”3년간의 결혼 생활을 하면서 차우미는 그가 나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그런 부류의 남자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차우미의 마음속에서 나상준은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차우미의 맑은 눈이 믿음으로 가득 찼다.이 믿음은 3년 동안 쌓아온 믿음이었기에 쉽게 무너지지도, 쉽게 바뀌지도 않았다.그러나 20분 전에 나상준이 차우미에게 무슨 짓을 했다면 이 신뢰는 깨지고 말았겠지.한순간에 깨진 믿음으로 차우미는 다시는 나상준을 믿지 못했을 거다.나상준이 바라본 차우미의 눈에는 두터운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상준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녀의 믿음을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았다.나상준은 시선을 거두고 앞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럼 너 지금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차우미는 방금 나상준이 냉담한 말투로 물었을 때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평온하게 대답했다.그러나 지금 나상준의 말투는 아까처럼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듣기에는 질문처럼 들리는 그의 말이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그녀가 나상준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이런 나상준의 모습에 차우미는 오늘 병원에서 그가 이젠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고 하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며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 졌다.눈앞의 사람이 더 이상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고 무섭지도 않았다. 그들은 마치 친구처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다.차우미는 이런 대화를 좋아한다.차우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상준 씨도 상준 씨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했어. 앞으로 상준 씨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거고 나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가정을 꾸릴 거야. 우리가 예전처럼 한 침대에서 자는 건 말이 안 돼.”그가 별
지금 이 순간의 나상준은 정말 위험해 보였다.차우미는 무의식적으로 긴장했지만 이내 긴장이 풀렸다. 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누군가가 그녀 앞에서 자신을 모함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았다.왠지 모르게 웃음이 터진 차우미의 눈이 휘어졌다.“그럼 상준 씨는 재혼하지 않을 거야? 상준 씨 이렇게 젊은데 무조건 결혼 할거잖아. 인생이 얼마나 긴데. 상준 씨도 좋은 사람 많이 만나게 될 거고 마음에 드는 사람 있다면 자연스럽게 결혼 할거잖아.”차우미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달래는 듯한 인내심 있는 말투 말이다.나상준이 아파서 그런지 차우미는 지금 나상준에게서 진실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피와 살이 있고 감정도 있으며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불쾌해하며 심지어 화도 냈다.차우미는 진짜 나상준과 친구가 된 것 같아 편안했다.나상준은 차우미에게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차우미는 웃고 있었다. 진지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그녀는 무책임하게 웃고 있었다.석양을 담은 듯한 차우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상준은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내가 다시 결혼한다고 해도 그 상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너야.”차우미는 멍해졌다.순간 당황한 차우미는 더는 웃지 않았다. 심지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다시 결혼한다고 해도 나랑 한다고?’그의 말이 차우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차우미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나상준의 말 한마디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차우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으며 심지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몰랐다.나상준은 깜짝 놀라며 멍해 있는 차우미를 바라봤다. 나상준의 눈에 차우미가 전에는 본 적 없었던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나상준은 더는 말하지 않고 침대에 누운 뒤 눈을 감았다.차우미는 가만히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나상준을 바라보며 자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이성적인 나상준의 말이 차우미의 귓가에 똑똑히 들려왔다.침대 머리에 서서 불을 끄려던 차우미는 나상준의 말을 듣고 멈칫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알았어.”나상준은 방금 차우미가 한 말이 쓸데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쓸데없는 말이 아닌 사실이었다.남자와 여자는 정말 다르다. 특히 이런 사소한 면에서 남자와 여자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차우미는 나상준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더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어볼 것이 있다면 오해가 생기지 않게 물어보려 했다.요 며칠 나상준과 대화를 나눈 차우미는 기분이 좋았다. 그들은 지극히 소소한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고 나상준도 이런 일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도 그녀와 이야기하기를 원했다.방안의 불이 꺼지면서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사이로 도시의 불빛이 비춰 들어왔고 방안의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차우미는 밖의 불빛에 의지해 소파로 걸어간 뒤 소파에 누웠다.침대를 마주하고 누운 차우미가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상준 씨, 불편한 곳 있으면 나 불러. 내가 여기서 밤새 지켜줄게.”“응.”나상준의 대답을 들은 차우미는 완전히 마음이 놓이며 평온해졌다.그녀는 싸우는 것과 경쟁을 싫어했다. 그녀는 이성적으로 소통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이점이 나상준의 생각과 똑같았기에 차우미는 행운이라고 생각했다.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그였다. 그래서 현재를 포함한 3년 동안 그들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고 모든 일을 잘 해결할 수 있었다.차우미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이 순간, 그녀는 몸과 마음이 느긋해졌다. 어두움과 조용함이 방안을 감싸자 졸음이 몰려왔다.온종일 바삐 돌아쳤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 차우미는 안심하고 잠을 청했다.나상준은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있었다. 움직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소파에 누운 차우미가 잠이 들자 모든 것이
눈을 감고 한참 있으니 눈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는 실눈을 뜨고 서재의 불빛에 적응한 뒤 창밖에 내린 어두움을 바라봤다.밖은 고요했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안평 시가 고요해진 느낌이었다.'벌써 새벽이 됐나 보네.'일의 특성상 늘 야근을 해왔던 김온은 시간을 보지 않고 밖의 하늘만 쳐다봐도 지금이 몇 시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그는 시선을 거두고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정말 새벽 12시였다.“선배, 밤새지 말고 일찍 쉬어. 건강이 제일 중요해.”머릿속에 부드러운 말이 떠오른 김온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지었다.예전의 김온은 시간을 상관하지 않고 일이 끝나야지만 휴식을 취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생겼다. 이럴 때면 그의 머릿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그는 더 이상 일에 집착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그는 건강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한 평생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었다.그는 컴퓨터를 끄고 책상 위의 각종 서류를 정리한 뒤 서재에서 나가 욕실로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에서 나온 그는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원래 이 사건은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에요. 제가 차우미 씨의 사건을 맡은 뒤로 주혜미 씨를 조사해 봤는데 주혜민 씨는 말하기 어려운 사람인 것 같았어요. 주혜민 씨와 차우미 씨의 갈등은 나상준 씨에서 비롯된 거더라고요. 제 경험으로 여자들의 감정 문제는 매우 번거로운 사건이에요.”“특히, 주혜민 씨는 성격이 강하고 집안 배경이 있는 관계로 얼굴 깎기는 것을 싫어하죠. 그래서 차우미 씨와 끝까지 싸울 수도 있었고요. 그러나 이 일은 차우미 씨한테 유리한 일이었기에 어떻게 해도 주혜민 씨가 차우미 씨를 이길 수는 없었을 거예요. 이 점은 제가 확신할 수 있어요. 다만 과정이 비교적 번거로웠겠죠.”“하지만 공교롭게도 주혜민 씨와 차우미 씨가 갈등이 생긴 다음 날 주영 그룹에 불리한 사건이 터졌죠. 이 사건은 아주 엄중한 사건인데
이영진 변호사는 사건의 원인과 이유 그리고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줬다.김온은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친척들과 친구 중에서는 사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씨 가문은 크고 이름있는 가문이었기에 청주에 있는 가온 그룹과 나씨 가문은 종종 서로 왕래를 했다. 그렇기에 김온은 NS 그룹이 나상준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주영 그룹과 합작하는 회사가 다른 회사라면 몰랐겠지만 NS 그룹과 합작하고 있다는 걸 안 김온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 생각이 났다.주영 그룹과 NS 그룹은 이제 막 합작을 시작한 게 아니라 예전부터 합작을 해왔었다. 그래서 이렇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NS 그룹에서 주영 그룹과 합작을 그만하자고 한 것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사업에서 이익을 내려 하지 손실을 입히려 하는 사람은 없을 거니까.NS 그룹이 지금 지위가 매우 높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투자한 돈을 도로 거두어 드릴 수는 없었다.공교롭게도 차우미와 주혜민의 사건이 터진 후 주영 그룹의 안 좋은 소식이 터졌고, NS 그룹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영 그룹과의 협력을 바로 중단했다.이영진 변호사의 말을 들은 김온은 주영 그룹의 안 좋은 소식을 누군가 일부러 퍼뜨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합작하는 사이에 한쪽에 문제가 생긴다면 다른 한쪽도 반드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바로 한쪽과의 관계를 청산하거나 함께 해결해나가는 방법이 있었다.주영 그룹과 나씨 가문은 사이가 좋았다. 가온 그룹과 나씨 가문의 관계보다 더 좋았기에 NS 그룹에서는 주영 그룹을 도와주는 게 맞았다.NS 그룹에서 도와줬다면 주영 그룹은 바로 일을 해결했을 것이다.그러나 NS 그룹에서는 주영 그룹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선택했다.김온은 NS 그룹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주혜민과 나상준의 관계로 봤을 때 이런 상황에서 NS 그룹이 주영 그룹을 도와줘야 했지만 NS 그룹에서는 도와주지 않았다.NS 그룹은 무정하고 냉담했다.김온의 머릿속에
겨울의 한기가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네 시를 넘기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면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봄의 시작을 알리며 아늑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초봄의 시작을 알렸다.시내의 어느 유치원.사무실을 나온 차우미는 처마 밑에 서서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우산을 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오늘은 시댁에 가족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시할머니는 가족간의 우애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분이었다. 나 회장이 돌아가신 뒤로 가문에는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하루는 꼭 시간을 내서 본가로 돌아와 저녁을 같이 하는 풍습이 생겼다.이 풍습은 차우미가 NS그룹 며느리가 되기 전부터 이미 오십 년이나 전해져 내려온 풍습이었다.아침부터 비 온다는 예고는 있었지만 오후에 뒤늦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저녁이 되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차우미는 조용히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다섯 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나상준은 며칠째 출장 중이었다. 아침에 나상준의 비서인 허영우에게 문자를 보내 확인했을 때는 예정대로 세 시 사십 분에 공항에 도착한다고 했다.네 시가 넘었으니 아마 지금쯤은 도착했을 것이다.차우미는 방향을 틀어 주차장을 벗어났다.청주에 있는 시댁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차우미는 직접 시댁으로 가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나상준이 집에 도착하면 그와 같이 시댁으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관강동은 청주의 유명한 부유층들이 사는 주택가였다. 나상준과 차우미가 결혼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창 밖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금방 싹을 피워내기 시작한 비에 젖은 나뭇가지들이 춤을 추는 것이 보였다.차우미는 익숙한 길을 따라 저택으로 들어가서 검은색 롤스로이스 뒤에 차를 세웠다.차가 도착한 걸 보니 그가 돌아온 모양이었다.시동을 끈 그녀는 핸드백을 챙겨 집으로 들어갔다.“일단 그렇게 알고 진행해.”커다란 거실 창문을 통해 커튼 사이로 거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
시댁은 청주시 남부의 교외에 위치해 있었다. 번화한 시내와 떨어져 산과 들을 등지고 지은 호화저택은 요양하기 최적인 곳이었다.차가 서서히 정원으로 들어서자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날은 이미 저물었고 저택에서는 밝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빗소리와 가족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아늑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겼다.최우미는 곱게 포장한 쿠키를 들고 나상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집 안에서 어린 소녀가 뛰어나오더니 앳된 목소리로 그들을 맞아주었다.“큰아빠, 큰엄마!”최우미는 미소 띈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박스를 아이에게 건넸다.“열어봐.”아이의 눈이 반짝하고 빛나더니 환호를 질렀다.“와! 백설공주랑 일곱 난쟁이다!”최우미는 동화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들 취향을 고려해 동화 속 캐릭터를 닮은 쿠키를 만들어 아이에게 자주 선물하고는 했는데 여느 베이커리 전문가와 비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았다.“마음에 들어?”“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큰엄마!”“마음에 들었으면 됐어.”가족들은 이미 모두 도착해서 최우미와 나상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늘 있는 일이었기에 지각했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둘은 가족들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전하고 자리에 앉았다.나상준의 할아버지인 전대 회장님은 아주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네 아이와 함께 졸지에 든든한 가장을 잃었지만 이혜정 여사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녀는 홀로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네 아이를 돌보고 회사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회사는 점차 기울기 시작했고 결국 빚더미에 허덕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나 회장이 사망한지 불과 3년이 되던 해에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막내아들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남편을 잃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식까지 잃은 이혜정 여사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는 대신, 다시 일어서서 홀로 아이들을 길러냈고 지금의 NS를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장남인 나상준의 아버지 나명덕은 슬하에 1
“따라와.”문하은은 싸늘하게 한마디 던지고 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차우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시어머니를 따라갔다.시댁은 전형적인 전통식 궁전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기왓장 하나하나 신경을 썼고 목재도 은은한 나무 향이 풍기는 원목 자재를 사용했다.시할머니는 원래 청주에서 잘나가는 재벌가의 딸이었으나 경제위기가 찾아오면서 가문이 몰락하여 당시는 아직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했던 나동석과 결혼했다고 했다.빗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차우미는 문하은을 따라 서재로 들어가 열린 창문을 닫았다.방 안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앉아.”문하은이 먼저 자리에 앉고 차우미는 그녀와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네가 우리 집에 시집온 지도 벌써 3년이 돼가는구나.”문하은은 대대로 교수를 배출한 학자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녀가 나명덕과 결혼할 당시, 이혜정 여사는 이미 혼자 힘으로 NS그룹을 일으켜 세웠기에 그녀와 나명덕의 결합은 잘 어울리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었다.이혜정은 돈보다는 자라온 가정환경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이 집에 3년을 살면서 눈칫밥에는 이골이 난 차우미였기에 문하은이 자신을 따로 불렀을 때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자식 문제.그녀와 나상준은 결혼한지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아이가 없었다. 품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어머니였기에 3년 동안 심한 말 한번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눈치를 준 것도 사실이었다.“네, 어머니.”남 얘기하듯이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시어머니 앞에서 차우미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문하은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참았던 불만을 토로했다.“처음부터 난 이 결혼 반대했다. 집안이나 학벌 어느 것 하나 우리 상준이에 비해 많이 떨어졌으니까. 하지만 어머님이 널 지목했고 상준이도 불만이 없다고 해서 가만히 있었어.”“하지만 3년 동안 기쁜 소식 한번 없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니?”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문하은이었기에 책망하는 말조차도 차분하고 부드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