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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너 아직도 변명할게 남았어?”

유준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머리 위로 울려 퍼졌다.

하영의 입술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뭘 어떻게 해명하라는 말인가?

CCTV가 조작된 것이 분명하지만 증거가 없다.

“말해!”

유준의 고함소리에 하영은 몸을 떨었다.

억울함이 치밀어 오르자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요?”

하영의 담담한 대답에 유준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을 때는 될 대로 되라는…….

영상에서도 그랬고, 지금 자신의 앞에서는 그랬다!

유준은 나지막한 소리로 경고했다.

“오늘 이후로, 출근할 때 외에, 별장에서 한 발짝도 나갈 생각 하지 마!”

하영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뭔데, 제 자유를 박탈하는 거예요?!”

“내가 네 상사니까!”

이 말을 남기고 유준은 문을 박차고 떠났다.

하영은 아무 말 못도 하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가슴 속에서 밀려오는 알 수 없는 아픔은 그녀의 신분이 얼마나 비천한지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

온몸에 극심한 피로가 몰려온 하영은 책상에 기대어 몸을 지탱했다. 그런데 이때 책상 한가운데 잠긴 서랍이 눈에 들어왔다.

잠긴 서랍 안에는 정유준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정유준이 술에 취했을 때 잠꼬대를 한 적이 있었다.

“하영아, 다들 나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는데…… 내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바로 저 서재 서랍 안에 있어. 매번 서랍을 열 때마다 내 심장은 쪼개지는 것만 같아…….”

처음으로 유준이 실의에 빠진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당시에 서랍 속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 이 완벽한 존재의 남자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이제 하영은 알 것 같았다.

서랍 속의 물건은 틀림없이 양다인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지금껏 줄곧 그녀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으니…….

여기까지 생각하니 하영은 마음이 더욱 괴로웠다.

……

아침 식사 후, 하영은 병원에 양운희를 보러 갔다.

별장을 나서자 허시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강 비서님, 회사 출근 외에 나가면 안 된다고 사장님께서 지시하셨어요.”

하영은 눈썹을 찡그렸다.

“병원에 가서 어머니 좀 뵈려고요…….”

허시원은 핸드폰을 꺼냈다.

“그럼,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허시원이 유준에게 전화하는 것을 보니 명치에 화가 뭉쳐 오르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뭘 그리 잘못했단 말인가?

CCTV 속의 일이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역겹다고 꺼지라고 해야 하지 않나? 왜 여기에 두고 자유를 구속하는 것인지,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허시원은 전화를 끊었다.

“강 비서님,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하영은 생각을 멈추고 하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차에 올랐다.

30분 후 차가 병원으로 도착한 뒤.

허시원은 하영과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병동까지 따라가 하영이 병실 안으로 들어가서야 입구 앞에 멈춰 섰다.

병실에서 어머니가 힘겨운 표정으로 죽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본 하영은 눈시울을 붉혔다.

마스크를 위로 당겨 빨갛게 부은 얼굴을 가린 후 에야 양운희 앞으로 다가갔다.

“엄마.”

양운희는 힘없이 눈을 들어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하영이 왔네.”

말이 끝나자, 양운희는 마스크를 낀 하영을 보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얘기했다.

“하영아, 뭐 하러 불편하게 마스크까지 썼어.”

“감기 걸렸어요. 엄마한테 옮길까 봐요.”

“아이, 참……. 너 아직도 열나니?”

“전 괜찮아요. 엄마는 면역력이 약하니 몸 잘 챙기셔야 해요.”

……

양운희와 잠시 시간을 보낸 하영은 떠날 준비를 했다.

항암치료를 마친 지 며칠 안 된 엄마의 컨디션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말할 힘조차 없어 보였다. 엄마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일어섰다.

병실을 나왔을 때 허시원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침 간호사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양운희의 주치의 부진석을 보았다.

부 의사가 하영을 보고 입을 열기도 전에 허시원이 둘 사이 중간에 가로막아 섰다.

시선이 가려지자, 하영은 기분 나쁜 듯 허시원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강 비서님, 사장님께선 비서님이 어떤 남자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하셨어요.”

화가 난 하영은 치가 떨렸다.

“이 분은 우리 어머니 담당 의사 선생님이세요! 어머니 병에 관한 이야기밖에 안 한다고요!”

허시원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부진석을 바라보았다.

“부 선생님, 강 비서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면, 병세와 무관한 이야기는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진석은 눈살을 찌푸리는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저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부진석은 허시원 뒤의 하영을 바라보았다.

“하영 씨, 혹시 도움 필요하세요?”

하영은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먼저 갈게요!”

말이 끝나자 곧장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입구로 걸어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진석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를 탈 때쯤 하영은 부진석의 카카오톡을 받았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요?]

[아니에요, 우리 엄마…… 잘 부탁해요. 선생님.]

부진석은 한숨을 내쉬는 표정을 지었다.

[우린 친구 아닌가요?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요. 도울 수 있는 건 도울 테니…….]

하영은 여전히 거절했다.

[정말 괜찮아요. 선생님, 감사드려요.]

……

월요일.

잠에서 깨어난 하영은 간단한 세안을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틀 동안 보이지 않던 유준이 식탁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유준 맞은편에 앉은 하영은 생각을 정리한 뒤 말을 시작했다.

“언제까지 저를 숨 막히게 할 생각인가요? 그만하면 안 될까요?”

유준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어머니 치료비 끊기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내 말을 듣는 게 좋아.”

“어머니 병원비는 제 월급으로 충분히 부담 가능합니다. 지금껏 그렇게 했고요!”

하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는 걸 겨우 참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번 돈으로 아버지의 빚도 갚고, 어머니 병원비도 냈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 병원비로 자신을 협박하다니?

정유준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돈이 아니라 직장이 필요 없어도 된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날 떠나도 돼.”

하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직장으로 협박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한다면?”

유준은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너 지금 직장을 잃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유준은 하영에게 어느 직원보다도 더 많은 월급을 주고 있다. 전제 조건은 자기 말을 고분고분 따르고, 본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갈수록 말을 안 듣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위해 의사에게 눈웃음이나 치고, 아버지의 빚 때문에 노름쟁이 인간들에게 매달리고…….

그녀가 고분고분하게 부탁만 하면 모든 것을 다 들어줄 수 있는데……

이 여자는 결코 자신에게 고분고분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오기가 생긴 유준은 오히려 그녀가 언제까지 자신에게 기대지 않고, 이렇게 고집부릴지 두고 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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