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당연히 거절할 수 있어.”“내가 장담하는 건데 내가 돕지 않는다면 조은혁은 무조건 감방을 갈 거야. 그것도 10년. 은서야, 한번 생각해 봐. 그때 얼마나 많은 부잣집 아가씨들이 네 오빠를 맘에 두고 있었는지. 그렇게 훌륭했던 사람이야. 만약에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약에 조 씨 가문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가까운 미래에는 귀여운 아들과 딸을 두고 있었겠지!” ...만약 예전에 유선우가 조은서의 몸에 상처를 냈다면 지금은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두 사람은 더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이 사실을 입 밖으로 꺼냈다. 유선우가 조은서를 아내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은 진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익과 명예 때문이었다.조은혁을 도와주는 대신 조은서는 그의 아내가 되여야 했다. 조은서는 머뭇거리며 거절을 하지 않았지만 냉큼 동의하지도 않았다. 조은서는 이불을 꽉 잡고 복잡해진 마음을 추스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한번 생각해 볼게요!”유선우는 놀라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사람은 많은 일을 겪고 더 단단해지듯이 조은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젠 부끄러운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던 어린 조은서가 아니다. 지금의 조은서는 사모님이다.유선우는 기분이 좋아서 조은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유선우는 애매모호하면서 로맨틱하게 말했다.“정확한 선택을 해낼 거라고 믿어! 은서 사모님!”...그날 밤, 유선우는 떠나가지 않았다. 다만 쏘파에서 잤다. 불을 끈 병실에는 너무 조용한 나머지 서로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서로 신경을 안 쓰려고 했으나 그 누구도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조은서는 얼굴을 베개에 붙이고 유선우가 했던 말들을 몇 번 되새겼다. 만약에 유선우의 아내가 되기를 결심하면 그는 조은혁을 구해줄 거고 그러면 조은혁은 감방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다.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했으나 사실 조은서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다만 이런 운명이 너무
조은서는 유선우의 눈을 피하면서 침대 끝쪽에 기대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제저녁에 말한 조건에는 제가 백아현과 미래의 애인들의 존재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말라는 게 포함된 거 아닌가요?”유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은서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선우 씨, 백아현과 관계를 맺는 순간 제가 어떤 마음일지는 생각하지 말아야죠! 그리고 우리가 진짜 부부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선우 씨 말대로 우리는... 그저 파트너일 뿐이 잖아요!”유선우가 이미 명백하게 말했기에 그는 조은서가 이렇게 말하는 게 웃기기도 했다. 그리고 유선우는 피씩 웃었다.유선우는 천천히 걸어와 조은서의 턱을 들고 가는 식지로 그녀의 빨간 입술을 터치하면서 매력적이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말을 정말 또박또박 잘하네!”조은서는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유선우는 조은서를 눕히면서 오뚝한 코와 입술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맞닿은 순간 기분이 묘했다.유선우는 조은서르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 겼다.“언젠간 꼭 내 거로 만들 거야.”조은서는 이젠 어린애가 아니다. 유선우와 부부생활을 삼 년 하면서 그 뜻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결혼 후, 유선우가 취해서 집으로 돌아와 같이 잠자리를 하자고 술주정을 부리면 조은서는 늘 거절했다. 만약 유선우가 강압적으로 다가오면 조은서는 베개를 맞대고 울기만 했다. 그래서 삼 년 동안 두 사람은 잠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다.예전에는 순결 때문이라면 지금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조은서는 입술을 살짝 떨었다...유선우는 조은서를 놓아주고 화장실로 들어가 어제 입었던 옷으로 환복 했다.그리고 나와서 덤덤하게 말했다.“기다릴게! 은서 사모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조은서는 고개를 들어 유선우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고 억울함과 굴욕이 가득했다.유선우는 코웃음을 치더니 떠났다.일층으로 걸어 내려갔을 때 기사는 프리미엄 벤을 정차하고 기다
유선우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펜 뚜껑을 닫았다.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백아현이 식사할 때 내는 소리를 떠올렸다. 물론 유선우는 그 소리에 별로 신경을 안 쓸 수 있지만... 김재원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다. 진 비서는 오랜 직장생활을 한 사람답게 유선우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챈 듯 낮은 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따가 차에서 아현 씨에게 식사할 때 주의하라고 얘기하겠습니다. 김재원 선생님은 학자 집안 출신이라 분명 이런 작은 예의범절에 신경을 쓸 것입니다.” 유선우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진 비서는 자신의 추측이 맞을 거라 확신했다. 사실 진 비서는 마음속으로는 백아현을 개돼지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아주 경멸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유 대표와 결혼하려고 한다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백아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그녀는 오늘 특별히 웨딩드레스와 같이 하얀 치마를 차려 입었고 겹겹이 있는 레이스는 로맨틱하고 아름다워 그녀의 작은 얼굴을 꽃처럼 보이게 했다.백아현의 휠체어를 밀며 내려오는 진 비서는 그녀를 향해 경멸의 눈총을 쏘았다. ‘시골 촌뜨기! 가뜩이나 키도 작은데 이렇게까지 입으니 정말 더 촌스러워!’ 하지만 차에 앉은 백아현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진 비서와 달리 자신은 유선우와 함께 뒷자리에 탔기 때문이다.백아현은 고개를 들어 유선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용기 내 물었다.“선우 씨, 제 치마 어때요? 김재원 선생님이 좋아하실까요?”조수석에 앉아 있는 진 비서는 어이가 없어 마른기침을 한 번 했다.유선우는 기본 예의라도 차리기 위해 백아현에게 눈길을 한 번 돌리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네.”백아현은 그 말에 더욱 자신감을 얻었다.그녀의 어머니가 말하길 남자는 여자가 하얀색 옷을 입으면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을 느낄 정도로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백아
김 선생님의 비서는 눈에 띄게 멈칫했다. 그리고 금방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말을 보탰다.“그건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선생님께 알려드린 거예요.”유선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래서 비서도 한시름 놓으면서 백아현에게 시선을 놀렸다.‘다들 백아현 씨가 예쁘다고만 했지, 장애인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그리고 옷차림도... 참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군.’비서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백아현은 활짝 웃으면서 물었다.“당신이 김재원 선생님이신가요?”“저는 선생님의 비서 임도영이라고 합니다.”백아현의 미소는 빠르게 굳어갔다. 상대가 한낱 비서 나부랭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걸 왜 이제야 말하냐는 식으로 눈을 부릅떴다.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유라는 피식 비웃었다. 임도영은 수많은 음악가가 잘 보이려고 안달 났을 정도로 인맥이 넓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백아현은 임도영을 무시할 자격이 없었다. 오늘의 행동으로 어떤 후폭풍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아현이 우스워지는 것보다도 반가운 것도 없었다....역시나 임도영은 김재원과 만나자마자 그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했다. 그러자 그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상대가 유선우의 사람인지라 일단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나눴다.유선우의 곁에 앉은 백아현은 두근거리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김재원의 제자가 될 수 있다면 세계 최고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명예는 따 놓은 당상이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유선우와도 천상의 조합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백아현과 달리 유선우와 김재원은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한 명은 음악계의 거물이고, 다른 한 명은 상업계의 거물이다. 그러니 이 상황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식사가 시작된 다음 김재원은 먼저 힘든 신세를 한탄했다.“대표님, 요즘은 클래식 음악을 하기도 참 쉽지 않아요. 제가 아무리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어도, 국내에서는 인기가 없는 게 현실이거든요. 요즘 사람들은 정신
말을 마친 김재원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백아현도 약간은 감성이 흔들린 듯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이런, 참 안타깝게 됐네요...”김재원은 금방 감정을 거두고 유선우와 술잔을 부딪치면서 가볍게 말했다.“하지만 제가 머지않아 꼭 찾아낼 거예요. 음악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으니까요.”“선생님이 음악에 대한 열정, 참 존경스럽습니다.”유선우는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진유라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그녀는 40억 원짜리 수표를 들고 오면서 말했다.“이건 대표님이 클래식 음악을 향한 응원의 마음입니다. 앞으로도 지원을 아끼지 않으실 테니, 부디 선생님께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하하, 고맙습니다!”유선우는 이만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아닙니다,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실례를 범하지는 않았나 모르겠네요.”수표는 임도영이 대신 받아서 들고 유선우 등을 끝까지 배웅해 줬다. 그가 돌아왔을 때, 김재원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유 대표님은 어디에서 이런 여자를 데려왔는지 모르겠어요. 기술부터 감정까지, 은서 씨와 비교할 수 있는 데가 하나도 없어요. 심지어 얼굴도요!”“이렇게 엉망진창인 연주는 나도 참 오랜만이군.”김재원은 느긋하게 말하면서 술 한 모금 마셨다. 임도영은 잠깐 눈치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그렇다면 백아현 씨를 제자로 안 받아주실 생각인가요?”“하아... 우리 업계가 말이야, 보기에만 우아하지 돈맛을 보려면 어떤 짓이든 해야 해. 내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자본은 이길 수 없지. 클래식 음악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어차피 잡일 할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환희한테는 적당히 한 자리 내주면 돼.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은서야. 은서가 성공해야 내 명성도 지킬 수 있어.”김재원이 백아현을 아예 ‘환희’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임도영은 자칫 웃을 뻔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수표를 힐끗 보더니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은서 씨랑 약속 잡아드릴까요? 남해 마을 만남의 카페는 어떠세요? 은서 씨
차에 올라탄 유선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다 문득 김재원이 언급한 학생이 떠올랐다. 꿈을 포기하고 결혼했다던 그 학생 말이다. 그는 어쩐지 그 학생과 조은서가 겹쳐 보였다.두 사람은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 그래서 조은서도 결혼할 때, 어쩌면 그 학생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지는 않았을지 생각하게 되었다.한 번도 평정심을 잃은 적 없었던 그는 요즘 따라 자꾸 조은서 때문에 감정 기복이 생겼다. 그래서 곧바로 전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내가 지시한 일은 어떻게 됐어?”전화 건너편에서 전담 비서는 빠르게 대답했다.“박 변호사님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12시간이 지난 다음 B시의 공항에 착륙하신다고 합니다. 때가 되면 로펌의 다른 변호사와 함께 JH그룹의 사건을 알아본다고 하셨습니다.”“성공할 자신은?”“400억 원을 요구하는 대신...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유선우는 박연준의 실력을 믿었다. 그래서 담담하게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계획대로라면 그는 이만 쉬어야 했다. 점심에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저도 모르게 앨범을 클릭해 조은서의 사진을 찾아냈다.이는 아주 오래전 조은서가 잠든 틈을 타서 찍은 사진이었다. 한창 열정이 넘치는 신혼부부이던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힘에 부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잠든 경우도 파다했다.뽀얀 얼굴과 검은 머리칼은 하얀색 베갯잇 위에서 더욱 청초한 느낌을 줬다. 그녀를 좋아하지도 않는 유선우가 저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을 정도로 말이다.그녀가 곁에 없는 출장 날이면 호텔에서 남몰래 이 사진을 꺼내 보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밀려온 욕망을 견디지 못하고 사진을 바라보면서 해결한 적도 있었다. 그때의 짜릿한 기분을 유선우는 아직도 기억했다.‘이 사진은 남이 보지 못하게 가리는 편이 좋겠어. 그러면서도 지우지 못하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가 보군. 근데 뭐 어쩌겠어? 본능을 억누를 필요는 없잖아?’..
두 사람은 몇 마디 더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조은서는 소파에 누워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이렇게라도 심적인 안정을 찾으려고 말이다.조은혁과 함께 보낸 지난날의 추억은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돌아가신 친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날이면 항상 곁에 있어 줬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녀와 놀아주면서 마음을 안정시켜줬다.등교할 때 기사가 학교 정문에 차를 세우면 그녀를 업고 교실까지 데려다주는 사람이 바로 조은혁이었다. 그는 이 세상 최고의 오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밤이 깊어져 가고 조은서는 병실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얼굴을 무릎에 바짝 댄 자세로 잠든 그녀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깨져버릴 유리 인형과 같았다.병실 밖에서 유선우는 한참이나 조용히 서서 그런 조은서의 모습을 바라봤다. 지나가다가 그를 발견한 간호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밤 뉴스를 보신 뒤로 계속 저러셨어요. 보호자분이 들어가서 침대로 데려가 주세요. 저렇게 자는 것도 불편하실 텐데...”유선우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조은서를 계속 바라봤다. 그리고 단호하게 몸을 돌리면서 간호사에게 말했다.“내가 온 적 있다고 말하지 마요.”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탄 다음에도 유선우는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이자 괜히 더 심란해지는 것 같아서 아예 불을 꺼버렸다.‘이 세상 여자가 조은서 한 명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 여자한테 돈까지 팔면서 신경 쓸 건 없지. 그럴 가치도 없는 여자야. 그런데 난... 왜 이렇게 포기가 어려울까?’‘조은서가 나를 떠나는 것도,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도... 죽도록 싫어. 내 침대에 오른 적 있는 여자라서 그렇겠지.’...이튿날 오후, 유선우는 또다시 병원을 찾았다. 말을 타다가 살짝 다친 그는 응급실로 가는 것이 아닌 조은서의 병실로 가서 의사를 불렀다.유선우는 소파에 앉은 채 조은서를 힐끗 봤다. 침대에 앉아서 책을 읽는 그녀는 그를 아예 투명 인간 취급했다. 하지만 어젯밤에 보인 반응으
조은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선우가 그녀를 자신의 무릎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살결이 상처와 닿는 순간 아픈 듯 신음을 내기는 했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그냥 내려줘요.”유선우는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거리를 좁혔다. 남자의 숨결은 마치 부드러운 비단처럼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이미지와 참 어울리지 않는 온기를 남긴 채 말이다.가만히 고개를 숙인 유선우는 조은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는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하얀 다리는 그의 검은색 정장 바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말로 이루 형용하지 못할 느낌을 줬다. 그래서 그는 전보다 훨씬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이대로 약 발라줘.”조은서는 얌전히 유선우가 건네는 약품 상자를 받아서 들었다. 그리고 그의 상처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부드러운 조명 아래에서 유선우는 오만한 자태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순순히 무릎에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그 대단한 오빠를 위해 몸을 팔겠다는 거네.’유선우는 어쩐지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은 어느샌가 조은서의 환자복 안으로 들어갔다. 인내심이 진작 바닥났는지라 움직임은 다소 거칠었다.솜에 약을 묻히던 조은서는 손을 흠칫 떨면서 그의 품으로 꼬꾸라졌다. 그는 약품 상자를 밀어낸 채 그녀의 허리를 꽉 잡더니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실의 조명은 피부에 떨어져서 에로틱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움직임이 불편했던 그는 조은서를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한참이나 괴롭혀댔다. 조은서도 그의 어깨를 깨물지언정 거절하거나 반항하지는 않았다.그도 물론 알고는 있었다. 조은서가 조은혁을 위해 얌전히 있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가만히 있는다는 건 결정을 내렸다는 거겠지? 다시 내 아내가 되어주기로 한 건가?”“...”조은서는 한참이나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의 생각을 보아낼 수 없었던 유선우가 턱을 억지로 잡고 돌리면서 눈을 맞췄다.아직 흥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