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계약 결혼을 원하는 거면 왜 하필 나를 고른 거야? 딱 하루만 부부로 지낼 수 있다 해도 자기를 원하는 여자가 서울엔 수없이 많을 텐데.’그러자 이내 이준혁이 그녀를 보며 담담하게 설명했다“할아버지의 건강이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어. 의사 말로는 두 달도 남지 않았대.”“쿵!”윤혜인은 머릿속에서 마치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그녀가 이씨 집안에서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 이태수였다.‘어떻게 이렇게 갑자기...’가슴이 미어지는 듯했고 목소리도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그럼 계속 연기해도 되는데...”“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이준혁은 냉정하게 거절했고 놀란 윤혜인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이런 상황에서까지 나는 할아버지를 속이고 싶지 않아.”언뜻 들으면 일리 있는 말 같았지만 윤혜인은 곧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물었다.“하지만...”그러나 이준혁은 성가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자만할 필요 없어. 너랑 재혼하는 건 단순히 할아버지를 위해서야. 물론...”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무심하게 다시 말했다.“강요하는 건 아니야. 재혼할지 아니면 여기서 바로 나랑 할지, 둘 중 하나 정해.”윤혜인은 얼굴이 붉어졌다. 선택지가 이 두 개라면 그녀는 어느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태수를 위해서라면, 석 달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우리 이거 비공개죠? 아주머니도 우리가 재혼한 걸 알지 못하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석 달이 지나면 꼭 저랑 이혼할 거죠?”그러자 이준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응.”하고 짧게 대답했다.윤혜인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 듯했다.“좋아요. 그럼 우리 혼인신고서랑 이혼합의서에 둘 다 서명해요. 어차피 석 달은 금방이니까 나중에 다시 서명할 필
할아버지를 뵙고 난 후, 윤혜인은 저녁에 있는 강의를 들으러 가야 했다.이준혁은 그녀를 수업 장소까지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차 문을 잠그고 윤혜인을 못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왜 이래요?”이준혁은 진지하게 말했다.“너 지금은 기혼자야. 한구운이랑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부부인 동안에는 절대 만나지 마, 알겠어?”“알겠어요.”윤혜인은 깊게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어차피 원래부터 한구운과 더는 엮이지 않기로 결심한 상태였으니 말이다.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자 이준혁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며 안심이 되었다.하지만 그런데도 비꼬는 듯한 말투는 여전했다.“대답이 왜 이렇게 빨라? 그 자식이 상처받을까 두렵지 않아?”윤혜인은 어리둥절했지만 지난번 오해를 생각하며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랑은 원래부터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어요.”다른 일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한구운이 윤혜인을 구해준 것만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녀는 한구운의 좋고 나쁨은 그저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싶었다.이윽고 윤혜인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이준혁이 덥석 그녀의 손을 잡고는 거칠게 물었다.“아무 사이 아니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예요.”그가 하도 손을 꽉 잡고 있어서 불편했는지라 윤혜인은 이내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하지만 그는 놓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럼 두 사람 같이...”말을 하다가 그는 갑자기 질문을 멈췄다. 그녀의 대답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을까 봐 두려워서 말이다.결벽이 있는 이준혁이었지만 만약 상대가 눈앞에 있는 윤혜인이라면 그 결벽증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지금처럼, 그는 그녀를 속여서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있었다. 다른 남자가 윤혜인을 차지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윤혜인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했다.“이만 내려야 해요. 강의 늦겠어요.”“뭐가 그렇게 급해.”이준혁은 지그시 응시하다가 순간
찰나의 순간, 육경한의 차가운 눈빛은 진아연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그가 그녀에게 이렇게 무섭게 대하는 일은 드물었다.지난번 크루즈선에서도 소원 때문에 육경한은 망설임 없이 진아연을 내던져 바닥에 쓰러지게 했었다.진아연은 육경한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경한 씨... 설마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진아연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고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모습은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소원이 아직도 깨어나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육경한은 목소리에도 짜증이 섞여 있었다.“그럴 일 없어.”“하지만 방금 나한테 화냈잖아요!”진아연은 콧물을 훌쩍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조금 전 경한 씨 행동 때문에 나 진짜 화났어요!”그녀는 육경한이 자신의 제멋대로인 모습을 좋아하고 연약한 모습 따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진아연은 적절하게 연약함과 제멋대로인 성격을 섞어가며 육경한에게 접근했다.아니나 다를까 육경한의 말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알겠어. 너도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니까 먼저 가서 쉬어.”그 말에 화가 난 진아연은 이를 악물었다.이건 그녀를 달래는 걸까? 아니, 이건 그녀를 내쫓는 것이었다.진아연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경한 씨, 소원 씨가 나를 다치게 한 일을 그냥 넘길 작정이에요? 그 여자 정말 날 죽이려고 했다고요! 난 아직도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려요!”하지만 육경한은 담담하게 말했다.“소원이는 이미 벌을 받았어.”그러자 진아연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벌을 받았다고?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고작 아이 하나 잃은 거로 이렇게 마음 아파하는 거야? 설마... 그 아이가 경한 씨 아이였나?’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빌어먹을 년, 빌어먹을 년, 빌어먹을 년!’육경한은 진아연이 고개를 숙인 채 매우 슬퍼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네가 억울해하는 거 알아. 내일 소
진아연의 말에 진찬성은 마음이 놓였다.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그 여자 진짜 명도 길어? 그런데 그 몸매가 죽으면 좀 아깝긴 하겠다.”진찬성은 소원의 굴곡 있는 몸매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정말 매혹적인 여자라니까.’오빠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아연은 바로 그의 말뜻을 알아챘다.이건 그가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러다 문득 진아연은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오빠, 정말 그 여자랑 하고 싶다면...”한편 병실 안.소원이 막 깨어난 후, 간병인이 그녀에게 죽을 먹여주고 있었다.그녀의 손, 얼굴, 목의 상처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전보다는 나아져 덜 부어 있었다.육경한이 들어오자 간병인은 그의 눈짓을 보고 나갔다.그렇게 그가 그릇을 받아들고 계속 소원에게 음식을 먹여주었다.거부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소원은 그런 기색 없이 숟가락이 오자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심지어 너무 급하게 먹다가 입가에 국물이 조금 흐르기도 했다.육경한은 그릇을 내려놓고 휴지로 그녀의 입을 닦아주며 말했다.“무슨 애처럼 먹어, 천천히 먹어도 돼, 여기 너랑 밥 뺏는 사람 없어.”그의 말에는 은근히 애정 어린 느낌이 묻어 있었지만 본인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늘 털을 쭈뼛 세운 고양이처럼 행동하던 소원이 이렇게 얌전한 모습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육경한도 자연스럽게 놀리게 된 것이었다.그러나 곧 이상함을 느꼈다. 소원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상처투성이 얼굴에는 표정조차 없었고 온몸이 마치 곧 부서질 것 같은 깨진 유리 인형 같았다.찝찝하긴 했지만 육경한은 이내 다시 그릇을 들어 먹여주었고 소원도 계속해서 받아먹었다.마지막 한 숟가락을 먹일 때, 소원의 표정이 약간 흔들리더니 곧바로 ‘우웩' 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 먹은 죽을 모두 토해냈다.끈적한 액체가 침대와 육경한의 팔에 쏟아졌고 이윽고 위산 냄새가 함께 몰려왔다.순간 안색이 어두워지며 육경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소원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겪은 후, 갑작스러운 폭력 앞에서 소원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구치소에서 두 여자가 그녀의 손톱을 뽑던 모습을 즉각 떠오르자 반사적으로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기도 했다.그녀의 이런 모습에 육경한은 마음이 마치 무엇인가에 세게 부딪힌 것처럼 멈칫했다. 이윽고 높이 치켜들었던 손이 갑자기 힘을 잃었다.분노로 거칠게 들썩이던 그의 가슴은 신기하게도 진정되었다.그는 펼쳐진 손가락을 모아 천천히 내리며 여자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예상대로 소원의 몸은 본능적으로 떨리기 시작했고 깊은 혐오감 때문에 그의 스킨십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러자 육경한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말이다.그녀는 마치 꼭두각시 인형인 척하며 그가 알아서 떠나기를 바랐던 것이다.“내가 만지는 게 싫어?”육경한은 담담하게 물었다.넓은 손바닥은 소원의 뒤통수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하얀 목에 멈췄다. 그러더니 마치 그녀의 목 너비를 재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그가 실제로 목을 조르지는 않았지만 소원은 목이 꽉 조여지는 느낌을 받았다.뒤이어 육경한은 비웃듯이 말했다.“그게 가능할 것 같아?”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악마의 예언처럼 들렸다.더 이상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었던 그녀는 육경한의 손목을 세게 붙잡고는 마구 물어뜯었다.방심하고 있던 육경한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짧은 신음 소리를 냈다.곧 피 냄새가 사방에 퍼지자 소원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피를 생으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예 다 마셔버려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육경한은 그녀를 떼어내지 않고 오히려 팔을 낮춰 소원이 좀 더 쉽게 물 수 있도록 했다.각도를 조금 틀자 그는 소원이 자신의 피를 마시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정말로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온몸의 피가 ‘훅'하고 불타오르는 느낌이었지만 그는 단지 ‘흥분’이라는 감정만 느낄 뿐이었다.그는 몸을 굽혀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 담담하게
“네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우리는 다시 하게 될 거야. 그러니 나를 거부하려고 하지 마. 말 잘 듣고 나를 화나게 하지만 않으면 죄는 피할 수 있을 거야. 알겠어?”육경한은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고 더욱이 이런 유혹하는 듯한 말투로 말한 적도 없었다.오늘 밤 그는 사상 최고의 인내심을 보였다.두 사람의 몸은 밀착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육경한이 소원을 자신의 품에 가두고 있었다.소원의 몸은 너무나도 허약했다. 조금 전 피를 빨 때 모든 힘을 소진했기 때문에 지금은 반항할 힘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그저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한참 후, 그녀는 절망과 무력감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육경한,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를 놔줄 거야?”그러자 소원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육경한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움직이며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다음 생에.”‘다음 생엔 이렇게 엮이지 말자, 나도 힘들어.’곧이어 그가 덧붙여 말했다.“이번 생엔 꿈도 꾸지 마.”다음 생이라는 이 단어에 소원은 밀폐된 철상자에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모두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그 열쇠는 바로 이 악마 같은 육경한의 손에 있었다.끝이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싸움이 소원에게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지친 그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육경한, 왜 나를 죽이지 않는 거야? 그렇게 나를 미워한다면, 나를 죽여서 내 시체를 개에게, 늑대에게, 돼지에게 먹이는 게 더 통쾌하지 않겠어?”그러자 육경한은 그녀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네 마음속에 나는 사람을 죽이는 악마인 거야?”“그 정도는 아니지.”소원은 차분하게 말했다.“내 마음속에서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돼지나 개만도 못한 짐승이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약혼자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하지 않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역겨워하는지 알긴 알아?”그 말을 들은 육경한이 그녀의 턱을 움켜잡고 화난 얼굴로 말했다.“역겨워도
소원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의 품에 꼭 안기고 말았다.온기를 머금은 눈물은 독약처럼 남자의 딱딱한 가슴으로 스며들어 그 냉혈하고 무정한 심장을 물들였다.슬픔이 전염되기라도 하는 듯 육경한의 심장도 욱신거리기 시작했다.꽉 힘을 준 그의 훤칠한 손가락 마디가 창백하게 질렸고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널 죽게 할 순 없어. 그러니까 꿈도 꾸지 마.”소원은 더 이상 반박할 힘이 없었고 아픈 몸에 의해 그녀는 오랫동안 깨어있는 것에 한계를 느껴 곧 남자의 품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창밖으로 푸른 달빛이 흘러들어와 방 전체가 은은한 하얀 빛깔의 천에 뒤덮인듯한 느낌이었다.육경한은 자신의 품에 안긴 어린 여인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조롱하듯 입꼬리를 끌어당겼다.입 밖에 내지 못한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소원아, 내가 또 너한테 잘해주고 싶다니.”“나 진짜 싼 인간이지. 응?”매번 이 여자에게 무자비한 우롱을 당하고 매번 그녀의 손에 익사하고 싶었다.육경한은 정말 천하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이다....윤혜인은 8시 반에 끝나는 저녁 수업을 마치고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갔다.길에서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를 느끼고 열어보니 이준혁의 전화였다.“수업 끝났어?”“네.”“내가 데리러 갈까?”그의 열정에 윤혜인은 더욱 경악하며 눈을 들어 몇백 미터만 있으면 도착하는 지하철역을 바라보았다.“괜찮아요. 지하철역에 도착했어요.”그러자 휴대폰 너머로 남자의 매력적인 음성이 들려왔다.“뭐가 괜찮아. 넌 내 와이픈데.”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멈칫한 윤혜인은 이제 그녀는 또 한 번 그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협의에 불과한 부부관계.두 번 다 할아버지 때문에 이준혁이 그녀와 결혼했다고 생각하니 윤혜인은 마음이 씁쓸했다.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도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는 끌어내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아무렇게나 버려도 되는 물건 말이다.사실 이준혁에게 있어 그녀는 있든 없든 중요
이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천수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에 아직은 공개할 수가 없다.꾹 입을 닫고 있는 이준혁에 원지민이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준혁아, 네 전 와이프는 널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아.”그 말은 마치 커다란 자석처럼 이준혁의 가슴 깊은 곳에 박힌 가시를 다시 돋우어 주었다.허...원지민처럼 일면식도 없는 외부인조차도 그녀가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줄은 몰랐다.그만큼 윤혜인의 마음이 선명하다는 것이다.이준혁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원지민은 그제야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고 감정도 안정되었다.“이건 아줌마의 뜻이니 계략을 쓰는 건 어때?”뜻밖의 제안에 이준혁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내가 없어도 아줌마는 계속 다른 여자를 소개해 줄 거잖아. 그렇다면 내가 방패막이가 돼도 상관없어.”그러자 이준혁이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이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 모습이었다.“걱정 마, 난 너한테 그런 마음이 없어. 나도 당분간은 선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네가 나를 방패막이로 삼으면 나도 너를 허울로 삼을 거야. 아무도 손해 볼 거 없잖아.”이준혁이 그 어떤 부정도 하지 않자 원지민은 곧바로 기회를 틈타 멋대로 결정을 내려버렸다.“그럼 그렇게 하자. 네가 내 부탁 하나 들어주는 거로 퉁치자고. 공개 안 해도 돼. 그냥 각자 부모님한테만 말하는 거로 하자.”말을 마치고 그녀는 도시락을 들고 두어 번 흔들어 보이며 한마디 거들었다.“이건 내가 가서 먹고 보여줄게.”사무실을 나서자 원지민의 얼굴에 어려 있던 순진함도 일순간에 깨끗하게 사라졌다.이렇게 몇 년 동안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이준혁이 그녀를 남자로 여기며 친구로 지냈던 시간이다. 그때야말로 그들이 가장 가까이 의지했을 때니까.원지민이 여자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 후, 이준혁은 즉시 그녀를 멀리했다.결국, 원지민은 상심을 품고 유학을 떠났지만 돌고 돌아보니 그녀는 여전히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그를 갖고 싶은 마음은 나날이 켜졌고 편집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