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을 보기 전에 먼저 필기시험을 봐야 했다.필기시험은 그녀가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시험지를 바치고 연설아의 옆을 지나가던 그녀는 연설아가 아직도 시험지의 대부분 문제를 답하지 않은 걸 발견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조급한 기색이라곤 없이 방금 한 네일을 감상하고 있었다.심지안은 왠지 이번 면접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기시험 결과 그녀는 합격하지 못했고 거의 최저점을 맞았다.“말도 안 돼. 내가 이렇게 낮은 점수를 받았을 리가 없어!”심지안은 면접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시험지를 공개하고 틀린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시기 바랍니다.”중간에 앉은 면접관 연봉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면접관마다 합격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같은 건 하나 있어요. 과정이 어떻든 점수가 낮으면 불합격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 당장 보광 그룹에서 나가요. 다른 면접자들의 귀한 시간을 뺏지 말고요.”“전 단지 공정과 공평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다른 면접자들의 시간이 귀한 건 맞지만 저의 시간도 함부로 낭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심지안은 허리를 곧게 펴고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옆에 있던 면접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다들 그녀가 왜 이토록 과하게 흥분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연설아는 입이 귀에 걸린 채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다렸고 동영상을 촬영하여 심연아에게 보내려고 했다.심지안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연설아의 짓이라는 걸 알아챘다. 심지안을 내쫓은 면접관과 그녀에게 점수를 준 면접관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만약 면접관이 그녀가 받아들일 만 한 이유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줬더라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프랑스에서 2년을 살았고 프랑스어 C2 등급까지 땄다.보광 그룹에 인재가 많아 면접까지 통과하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최저점을 줬다는 건 그야말로 치욕스러운 일이었다.연설아가 중간에서 음모를 꾀하는
오늘 인사팀에 면접이 있다던 일이 떠올랐다. 정욱은 불합격한 면접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력서를 버리려는데 성연신이 그를 불렀다.“잠깐.”익숙한 이름을 들은 성연신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이력서를 보았다.상업 빌딩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단독 사무실, 인사팀 매니저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면접자들의 정보 자료를 대표 사무실의 비서 실장에게 건넸다.정욱은 자료를 받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인사팀 매니저는 까치발까지 하며 들여다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돌아섰다.“심지안 씨에 대해 좀 알아봐.”성연신이 싸늘한 얼굴로 분부했다.“네, 지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일 처리가 빠른 정욱은 십 분도 채 안 되어 심지안의 정보를 찾아냈다.“대표님, 심지안이라는 사람 정말 있더라고요. 그런데 1차에서 떨어졌어요.”성연신은 길고 말끔한 손가락으로 잔뜩 구겨졌던 이력서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이분 경력으로는 1차에서 떨어질 리가 없겠는데.”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정욱이 이력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프랑스어 C2 등급이면 필기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리가 없어요.”프랑스어 C2 등급을 딴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30대지만 심지안은 기껏해야 24살 정도 돼 보였다. 그녀처럼 젊고 유능한 인재야말로 보광 그룹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성연신은 손가락으로 리듬 있게 테이블을 톡톡 치며 뭔가 고뇌에 빠진 듯했다.‘이 세상에 정말 이런 우연이 있다고?’어떤 사람은 평생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데 그와 심지안은 안 지 나흘 만에 부부가 되었고 심지어 그녀가 보광 그룹에 면접까지 보러 왔다. 정말 아무런 목적도 없단 말인가?정욱은 성연신의 옆에서 수년간 일해왔지만 여전히 그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대표님, 한번 자세히 알아볼까요?”“응.”성연신은 깍지를 낀 손을 가슴 앞에 내려놓고는 잠깐 멈칫했다.“그리고 면접에 왜 불합격했는지도 알아봐.”...오후 4시, 정
하지만 프랑스어 C2 등급을 취득하고 게다가 젊고 스트레스 관리도 잘하는 사람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금 젊은이들은 쩍하면 일을 그만뒀고 내키는 대로 움직였다.‘대표님께서 인재를 아끼시는 거겠지?’연봉기는 해고 통보를 받던 그때 한창 사무실에서 유유자적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인사팀 매니저가 해고 통지서를 그의 앞에 내려놓는 순간 그는 한참 동안 넋을 놓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지금 장난해요? 내가 보광 그룹에서 15년이나 일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잘라도 돼요?”인사팀 매니저와 연봉기는 지금까지 줄곧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사팀 매니저가 우쭐거리며 말했다.“그건 내가 결정한 게 아니에요. 대표님의 뜻입니다.”대표라는 소리에 연봉기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졌다.“자르는 건 되지만 나한테 해고 이유와 배상을 줘야 할 겁니다.”“배상 같은 건 없어요.”인사팀 매니저가 웃으며 말했다.“이유가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많은 일에는 이유가 없죠. 예를 들어 오늘 연봉기 씨가 프랑스어 C2 등급인 면접자한테 아무 이유 없이 최저점을 준 것처럼 말이에요.”연봉기는 잠깐 멈칫하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그 계집애한테 든든한 배후가 있었으니 그렇게 나댔지.’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기 전 인사팀 매니저는 문득 뭔가 떠오른 척하며 말했다.“아 참, 조카분한테도 내일 회사로 출근할 필요 없다고 전해줘요.”연설아는 한창 내일 입사 첫날에 입을 옷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예쁜 옷들을 전부 꺼내 입고 거울에 비춰보았다. 이것저것 입어 보던 그때 연봉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작은아버지는 보광 그룹의 원로급인데 어떻게 해고당할 수 있어요? 나랑 걔는 그냥 보통 친구예요. 걔 집안도 아무 배경이 없다고요. 정말이에요, 작은아버지. 작은아버지한테 거짓말한 거 없어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여보세요? 작은아버지, 끊지 말아요!”연설아가 다급하게 뭐라 얘기하려 했지만 연봉기는 가차 없이 전
성연신이 일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땐 벌써 밤 9시가 다 되었다. 별장 안은 등도 켜지 않은 채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현관에서 슬리퍼로 갈아신고 심지안의 방 앞을 지나가던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문을 두드렸다. 심지안의 갈라진 목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다.“잠깐만요.”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틈 사이로 빛이 어렴풋하게 비쳤다. 잠시 후 심지안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평소 밝던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눈시울도 붉은 걸 보니 한참 동안 운 게 틀림없었다.성연신은 생기가 없는 심지안의 이런 모습이 싫었다. 마치 폭풍우를 맞은 꽃송이처럼 잔뜩 시들어있었다.“울었어요?”심지안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홱 돌렸다.“아니요.”“나 눈 안 멀었어요.”그와 말씨름할 기분이 아니었던 심지안이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무슨 일로 날 불렀어요?”성연신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덤덤하게 대답했다.“별일은 아니고 나 지금 밥 먹으려는데 지안 씨도 먹을래요?”그녀는 그가 예의상 물어본 줄로 생각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데 이 시간에 아주머니를 부른다고? 자본가의 돈을 벌기 참 쉽지 않네.’성연신은 아무런 표정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심지안도 방문을 닫고 어릴 적 엄마가 사준 곰 인형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곰 인형에 자신의 그리움을 털어놓다가 저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얼마 정도 잤을까, 갑자기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그녀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꼬르륵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심지안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주방.성연신은 잠옷 차림으로 잘게 썬 파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위에 뿌렸다. 계단 모퉁이에서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그녀를 본 성연신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심지안은 주걱으로 능숙하게 계란 후라이를 뒤집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요리할 줄도 알았어? 그냥 국수인 것 같은데 엄청
“경비원?”이 얘기는 비서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경비원마저 이 일과 연관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심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을 생각하니 억울한 감정이 또다시 밀려왔다. 그녀는 옷소매를 거두고 다친 상처를 그에게 보여주었다.“이것 봐요. 경비원이 긁어놓은 상처예요. 종아리에도 있어요.”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에 딱지가 앉은 상처가 두 군데 있었다. 마치 값비싼 예술품에 스크래치라도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보광 중신의 흉을 계속 듣던 성연신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 심지안은 억울했던 기분을 다 토해내고 나서야 성연신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그를 콕콕 찔렀다.“왜 그래요?”‘설마 보광 중신의 대표랑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아무것도 아니에요.”“네...”성연신이 고개를 내리뜨리며 감정을 거두었다.“일찍 자요. 설거지 잊지 말고요.”“알았어요.”심지안은 그가 밥을 했으니 자신이 설거지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심씨 저택, 밤이 깊어졌지만 여전히 불이 환히 밝혀있었다.심전웅이 의자에 앉아 반신반의하며 물었다.“누군가 지안이를 위해 나선 바람에 보광 중신의 면접관이 해고당한 게 확실해?”심연아가 그의 옆에 앉아 팔을 잡아당겼다.“정말이에요. 안 그러면 무슨 이유겠어요? 이 세상에 그런 우연이 있을 리가 없어요. 지안이가 오르지 말아야 할 나무에 오른 게 틀림없어요.”“고작 걔 주제에?”심전웅이 하찮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그 귀한 분들이 바보도 아니고.”딱 봐도 가족을 속이고 밖에 내연녀를 둔 상황인 게 틀림없었다. 어쨌거나 이런 일이 상류층에서는 그리 희한한 일이 아니니 말이다. 물론 심지안은 밖에서 몰래 만나는 내연녀일 것이고.“아빠, 지안이가 잘못된 길을 가게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내일 지안이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해요.”은옥매가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사회가 험악해서 귀한 분들의 돈도 쉽게 얻어쓰지 못해요. 다른 사람한테서 들었는데 어떤 한 젊은 내연
원래 경비원 대신 생김새가 단정한 젊은이로 바뀌었는데 전혀 사나워 보이지 않았다. 심지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녀가 길을 잃은 줄 알고 먼저 다가와 물었다.“아니에요, 아니에요.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면접 보러 왔어요.”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어제 면접 보러 왔을 때 경비원님을 본 적이 없는데 혹시 교대 근무인가요?”“저 어제까지 창고에서 일하다가 오늘 이쪽으로 발령받았어요.”“그럼 전에 이곳에서 일하던 경비원은요?”심지안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경비원은 화들짝 놀라더니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반응에 심지안은 모든 걸 알아챘고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해고당했나 보네.’처음에 그녀는 보광 그룹의 높은 연봉 때문에 지원했지만 지금 보니 관리 임원분들이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자기 사람이라도 감싸고 돌진 않으니 말이다.어제 소동이 있고 난 뒤 오늘 재면접을 보러 온 사람이 많지 않아 과정이 빨리 진행됐다.필기시험을 순조롭게 통과한 심지안은 곧장 면접 보러 갔다. 면접이 끝났을 때 벌써 오후가 되었다.“심지안 씨, 보광 중신의 면접에 참석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면접은 끝났고 면접 결과는 내일 메일로 통지할 겁니다.”“네, 감사합니다.”보광 그룹을 나선 심지안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이거야말로 대기업의 면접이지. 어제는 정말 개판이었어.’건물 사무실.성연신이 창가 앞에 서 있었다.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어 더욱 훤칠해 보였고 안에는 단정하게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검은 긴바지가 그의 곧고 기다란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고 앞머리 밑의 그윽한 두 눈에 쉽게 다가가지 못할 싸늘함이 담겨있었다.그는 건물 아래의 미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비서 실장이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셨다.“대표님, 심지안 씨 방금 면접 보고 가셨습니다. 인사팀에서 심지안 씨 조건이 괜찮다면서 내일 아침에 면접 합격 통지
심연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심연아의 도움으로 연설아는 연예 뉴스 기자와 연락이 닿았고 돈을 내고 댓글 아르바이트까지 구했다.그날 오후.심지안은 인터넷 동영상을 보며 요리를 배웠다. 성연신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주방에서 앞치마를 입고 영상에서 가르치는 대로 팬에 각종 양념을 넣는 심지안을 발견했다.“밥할 줄 모르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음식은 먹는 거지, 낭비하는 게 아니에요.”배달이든 괴상한 요리든 그는 두 번 다시 먹고 싶지 않았다.심지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더니 예쁜 얼굴로 히죽 웃었다.“낭비 안 해요. 이번에는 맛이 꽤 괜찮아요.”성연신은 그녀가 말한 맛이 꽤 괜찮다는 요리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그냥 혼자 먹어요. 배탈 나면 구급차 부르고요.”“내 체면 좀 살려줘요. 이번에는 진짜 지난번보다 훨씬 맛있어요.”“먹고 싶지 않아요.”성연신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내가 얘기했었잖아요. 돈 말고는 당신이 원하는 거 줄 수 없다고요.”심지안이 움직이던 두 손을 멈추었다.“알아요. 난 그냥 어제 연신 씨가 국수를 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하려는 것뿐이에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죠.”“마음대로 해요.”성연신은 아무런 표정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석양이 하늘을 벌겋게 물들였고 마지막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심지안의 얼굴을 밝게 비췄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흥, 안 먹겠으면 말아요. 나 혼자 먹을 테니까. 배고파 죽든 말든 상관 안 해요!”한 시간이나 고생한 끝에 그녀는 반찬 세 개와 찌개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심지안은 굳게 닫힌 2층 서재 문을 올려다보며 한참 생각하다가 결국 올라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밥이 다 됐는데 정말 안 먹을 거예요?”하지만 방안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자요? 신이 씨?”성연신은 이마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방문을 열고는 심지안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당황함과 어색함이 뒤섞인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당신이 한 밥 안
성연신은 그녀에게 밥해주는 아주머니가 없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위층에서 카드 한 장을 가져와 심지안에게 건넸다.“이건 내 카드인데 앞으로 필요한 생활비랑 쇼핑하고 싶을 때 이 카드로 긁어요.”심지안은 채소를 사는데 돈이 얼마 들지 않는다고 얘기하려다가 자신이 백수라는 생각에 거절하지 않고 카드를 받았다.“알았어요.”“장 보고 싶으면 오카마트로 가요. 거기 물건이 신선해요.”“그런데 수입 마트는 너무 비싸요. 작은 배추 한 포기도 몇만 원씩 하더라고요.”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시장에서 사면 엄청 싸요. 게다가 농장에서 당일에 딴 거라 싱싱해요.”“난 지금 분부하는 거예요, 상의하려는 게 아니라.”배가 부른 성연신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지안 씨 임무는 나를 도와서 집안 어른들을 해결하는 것이지, 현모양처 노릇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배역에 너무 몰입하지 말아요.”심지안은 그를 째려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수입 마트는 뭐 달라? 외국 물건이라면 다 좋은 줄 아나. 그거 먹으면 뭐 불로장생이라도 할 수 있어?’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난 그냥 연신 씨 돈을 아끼려고 그러는 거죠.”“난 돈이 부족하지 않으니까 아낄 필요 없어요.”성연신은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훑어보았다.“시간 나면 옷도 몇 벌 사요. 주말에 나랑 같이 할아버지 뵈러 가요.”심지안은 앞치마 밑의 치마를 보여주며 말했다.“지금 입고 있는 거 입으면 안 돼요? 그때 200만 원이나 주고 샀단 말이에요.”“중요한 자리에 갈 때 작년 디자인을 입으면 안 돼요.”심지안이 애써 웃는 척 말했다.“알았어요...”어차피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이고 돈도 그의 돈을 쓰기에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설거지를 마친 심지안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컴퓨터 화면에 딩동 하고 메일 알림이 떴다. 확인해보니 보광 중신에서 보낸 면접 합격 메일이었다. 드디어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심지안은 너무도 흥분되어 늦은 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