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유영은 소은지와 함께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소은지가 말했다.“살면서 이런 진수성찬은 처음 먹어 봐. 너희 외삼촌, 입맛도 꽤 까다로운가 봐?”입맛이 까다로운 주인을 모시고 사는 주방장만 만들어낼 수 있는 풍미였다.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외삼촌이 모든 면에서 좀 까다롭긴 하지.”매번 정국진과 함께 외식을 나갈 때면 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기 드물었다.“부럽다. 넌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잖아. 내가 너희 집에서 같이 살면 아마 한 달에 10킬로는 찔 것 같아.”소은지는 키가 컸지만 먹는 대로 살이 찌는 체질이었다.반면 유영은 체중 변화가 거의 없었다.그녀의 외모는 10년 전과 비교해도 전혀 달라진 게 없을 정도로 동안이었다.“그렇긴 하지만 나도 고민 정도는 있어. 잘 챙겨 먹느라고 해도 머리가 자꾸 빠져. 이러다 탈모 오는 거 아닌지 몰라.”아마 머리카락이 자꾸 빠지는 이유는 세강 일가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었다.“괜찮아. 넌 원래 머리숱이 많잖아. 좀 빠져도 돼.”소은지가 말했다.그렇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데 핸드폰이 울렸다.낯선 번호인 것을 확인한 유영이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영 씨, 맞죠?”수화기 너머로 유경원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목소리를 알아들은 유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무슨 일이시죠?”유영이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강이한과 살면서 그와 관련된 스캔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대놓고 집까지 찾아온 여자는 유경원이 유일했다.지난 생에서는 나타나지도 않았던 인물이었다.조민정에게 부탁해서 알아봤더니 진영숙이 왜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훌륭한 가정 환경에서 사랑 받고 자란 공주님, 그게 유경원이었다.“내일 이한 씨가 본가로 같이 가자고 할지 모르는데 가지 마세요.”온화한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지만 묘하게 신경이 거슬리는 말투였다.유영은 순간적으로 분노를 느꼈다.아직 공식적으로 이혼한 것도 아닌데 이젠 별별 사람들이 다
유경원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진영숙이 그녀를 그만큼 예뻐하지 않았으면 절대 그녀를 데리고 강이한이 사는 집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가고 싶으면 가도 돼요. 하지만 그러면 위자료는 한푼도 받아갈 생각하지 말아요.”협박 섞인 발언에 유영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이 여자가 왜 그렇게 칠순잔치에 집착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유경원뿐이 아니라 아마 한지음도 참석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것이다.어쨌든 세강의 안주인 자리를 바라보는 여자들은 강이한과 함께 참석하는 가족행사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최근 유영과 강이한의 이혼설이 도는 시점에 그와 함께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할머니의 칠순잔치에 참석한다면 은연 중에 가족들의 인정을 받은 거와 다름없었다.홍문동에서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유경원은 꽤 머리를 쓸 줄 아는 여자였다.하지만 내일 강이한은 어떻게든 유영을 끌고 칠순잔치에 참석하려고 할 것이다.“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요?”유영이 싸늘한 어투로 물었다.여자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건 아니고요. 그냥 그쪽이 이한 씨랑 이혼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제가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얘기였어요.”“하!”유영은 헛웃음만 나왔다.뻔뻔한 말을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는 인간은 처음이었다.더 이야기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걱정스럽게 그녀를 지켜보던 소은지가 물었다.“누구야?”“강이한 추종자.”유영은 결혼 상대로 너무 잘난 남자는 별로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소은지가 먹던 킹크랩을 내려놓고 말했다.“그 여자들은 너희가 이혼하기만 기다리고 있을걸?”“누가 아니래?”아직 이혼 절차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저렇게 안달을 내다니.한심하고 우스웠다.소은지가 물었다.“병원에 있는 걔는?”“누구든 상관없는데 걔는 안 되지.”유영은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진영숙이 그렇게까지 싫은 티를 냈으니 한지음도 지금쯤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그 시각, 강이한은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들을 둘러싼 여론은 계속되고 있었다.한지음을 비난하던 여론도 가세해서 유영을 공격하고 있었다.그녀가 한지음의 병실을 찾아간 사진이 뉴스 일면을 장식하면서 모든 여론은 한지음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이날 아침, 유영은 간단히 아침을 먹고 회사로 향했다. 기자회견장에서 경호원들과 경비팀이 질서 유지에 힘쓰고 있었다.기자들은 요즘 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 유영에게 해명을 바라는 입장이었지만 유영은 앞으로의 사업 방향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질문지까지 준비해서 온 기자들도 듣다 보니 그녀의 화려한 언변에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에게 알려진 유영은 호화저택에서 두문불출하는 전업부부에 바쁜 남편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으로 알려졌다.그래서 남편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그녀를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수단이 너무 잔혹해서 욕을 먹었다.하지만 지금 단상에서 조리정연하게 사업 기획을 발표하는 그녀를 보며 기자들은 그녀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원하던 답변은 못 들었지만 미래를 향한 그녀의 열정과 자신감에 찬 말투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앞으로 5년 동안 저는 부단히 노력하여 오로라 스튜디오를 전국 최강 디자인 작업실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사회에 외면당한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단체를 설립하여….”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마친 유영은 담담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갑자기 열린 기자회견이라 참석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연설을 다 들은 현장의 기자들은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그녀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 성과를 내겠다고 선언했으며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세강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오늘 연설의 모든 주체가 이유영 본인이었다.조민정은 단상으로 올라가서 공손한 자세로 유영을 에스코트했다.“아주 잘했어요.”그녀가 유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유영은 내려오면서 현장 분위기를 살폈다.일부 기자들이 그녀에게 몰려오고 있었다.“유 대표님, 간단한 인
그리고 기자들은 그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일부는 그녀가 찔려서 그런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계속 웃음만 짓고 있던 유영이 갑자기 깊은 슬픔에 잠기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했다.“저는 사건이 있던 날 오전에 친구랑 아침을 먹다가 그분을 처음 만났어요. 그리고 오후에 그분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고요.”현장이 갑자기 숙연해졌다.“남편은 줄곧 제가 그분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요했어요. 사실 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한지음 씨한테 뭘 잘못했는지. 그날 아침에도 저는 한지음 씨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거든요.”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현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항상 냉정하게 취재를 이어가던 기자들마저 들뜨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유 대표님 말씀은 남편분께서 대표님의 해명을 전혀 믿지 않고 한지음 씨의 말만 들었다는 말씀인가요?”“남편은 항상 저를 믿어주던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번 지음 씨 사건이 너무 잔혹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가 꼭 사과를 해야 그분의 기분이 풀릴 거라고 했어요. 아마 기분이 좋아지면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겠죠.”유영은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고 대답했다.오늘의 기자회견은 생방송으로 송출되고 있었다.플랫폼에서 회견을 시청하던 사람들 중에는 오늘 칠순잔치 때문에 다망한 본가 식구들을 제외하고도 병원에 있는 한지음 일당과 강이한도 있었다.아까 단상에서 조리 정연하게 자신의 목표를 말하던 아내에게 감탄한 순간에 갑자기 절언 발언이 나오자 그도 순간 당황했다.유영은 자신은 한지음에게 해를 가한 적이 없으며 단지 사건이 잔혹해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가해자로 지목한다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었다.“강 대표님은 어떻게 아내를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지?”“그러니까. 그러니까 상간녀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자기 와이프한테 하지도 않은 잘못을 사과하라고 강요한 거잖아?”현장의 기자들마저 이렇게 수군대고 있었다.현재 생방송을 보
두 시간이 넘는 기자회견에서 유영은 자신이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과 이상을 설명했다. 기자들이 민감한 질문을 던질 때, 유영이 초라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녀는 모든 잘못의 근원을 강이한과 한지음에게 돌리고 혼자 유유히 빠져나갔다.“넌 네 오빠랑 저 여자가 이혼하면 목표를 이룬 거겠지만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한지음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이제 그 사과마저 저 여자는 네 오빠가 강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어. 더 깊게 파고 들면 내가 여우짓을 해서 네 오빠를 그렇게 만든 거라고 얘기한 거나 다름없다고!”아마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한지음은 지금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다.유영이 이토록 완벽한 반격을 준비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전에는 그냥 나약하고 아무 힘도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고단수가 따로 없었다.강서희가 일그러진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여우 같은 년!”기나긴 악플과 택배 폭탄에 반쯤 미쳐버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여론을 뒤집을 줄은 몰랐다.이제 유영은 그들이 건드릴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갔다.그녀는 무능한 전업주부 이미지를 철저히 벗어던졌다. 예전에 사람들은 세강의 안주인은 능력도 없고 남편에게 기대어 사는 기생충으로 알았다.하지만 이제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냈다.기자들마저 그녀를 대표님으로 호칭하지 않았던가?이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확고히 자신의 영역을 다졌다.한지음의 두 눈은 증오로 가득했다.대체 뭐가 잘나서? 왜 이렇게 된 걸까?세강과 관련된 모두에게 커다란 엿을 선사한 유영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사무실로 돌아갔다.사무실 문을 여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수시로 그녀를 곁눈질하는 직원들도 있었다.그런데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불청객이 와 있었다.언제 온 건지, 강이한이 그녀의 자리에 앉아 담배까지 피우고 있었다.과거에 그는 담배를 즐겨 피우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언제 봐도 몸에서 담배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내가 당신한테 사과하라고 강요했어. 하지만 기자들한테 그걸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한지음 입장이 얼마나 곤란해질지 생각해 봤어? 대체 왜 한지음한테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쾅!유영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강이한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과격한 모습이었다.그녀의 주변으로 진한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강이한은 분노도 잊고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이한 씨,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한지음한테 뭘 했어? 내가 한지음 납치하는 거 당신이 봤어? 내가 그 여자 눈을 멀게 하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거 봤냐고?”강이한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당신이 말도 안 되는 죄명을 나한테 갖다 뒤집어씌운 거잖아!”“납치범들한테 돈을 준 건 당신이야. 당신 계좌에서 돈이 흘러나갔다고!”“하!”유영은 냉소를 지었다.남자는 그 증거를 아직까지 믿고 있었단 말인가?결국 쟁점은 그 은행 카드의 입금 기록으로 돌아왔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나가!”그와 이야기하는 매 순간이 지치고 괴로웠다.자리에서 일어선 강이한이 말했다.“이유영, 적당히 해. 오늘 같은 일은 다시없었으면 좋겠어.”“그럼 시비가 생길 일을 하지 말든가! 또 나한테 협박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그녀는 혼자서 모든 오물을 뒤집어쓰고도 가만히 있을 정도로 보살이 아니었다.강성건설과의 계약 때문에 처리가 늦어지긴 했지만 기자회견도 예정된 수순이었다.시간적 여유가 되면 자신에게 해코지했던 사람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안겨줄 생각이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자 유영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전에는 내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부터 명심해. 난 당한 만큼 갚아주는 사람이야.”온순하고 순종적인 현모양처?사랑이 사라진 지금 그런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사람마다 참을 수 있는 한계점이
강성건설과의 협약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오로라 스튜디오도 괜찮은 명성을 얻었다.아직도 강이한의 영향력은 유효하지만 앞으로 의뢰가 더 많아질 것이다.물론, 외삼촌의 개입으로도 받을 수 있는 의뢰는 충분했다.조민정이 일정을 확인하고 말했다.“오후에 고객 미팅이 있어요. 남안시에서 온 고객이에요.”남안시?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남안시까지 퍼진 걸까?“외삼촌과 친분이 있는 고객인가요?”그녀의 질문에 조민정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어제 입찰 때 공개한 설계 도면이 전국에 퍼진 것 같아요.”강이한에게 패배를 선사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화제성은 충분했다.그래서 많은 기업인들이 이 작은 스튜디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전에는 작은 작업실들이 생존하기 힘든 이유가 좋은 디자인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참, 문 비서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박 대표님이 점심을 같이 하고 싶어한다고 하셨어요.”“나야 좋죠.”안 그래도 박연준에게 밥 한번 살 생각이었다. 강이한이 그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렸다.그와 이혼하기 전에 조용히 살기는 그른 것 같았다.지금 강이한을 보고 있으면 막다른 골목에 갇히자 무분별하게 사람을 물어대는 개 같았다.“세강 노부인 칠순잔치 행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아침에 정국진이 한번 언급한 적 있었기에 조민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영은 당연히 가기 싫었다.하지만 강이한이 자신에게 했던 것과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걸어대던 진영숙, 그리고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오는 유경원을 생각하면 고민이 깊어졌다.한참 고민하던 유영이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저녁 일정은 다 비워두세요. 아직은 이혼하기 전이니까 얼굴이라도 비춰줘야 명분이 설 것 같네요.”절대 웃어른을 공경해서 가려는 모양새는 아니었다.조민정은 왠지 연회가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강이한도 잘한 건 없지만 유영 역시 받은 만큼 돌려주었다.둘이 연회에서 싸워대는 모습을 상상하니 조민정은 저도 모르게 머리가 지끈거렸다.“제가
하지만 배준석도 만만치 않았다.그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형,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형이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해서 이 자리를 만든 거거든?”그는 젊은 나이에 골든아워로 불릴 정도로 성공한 의사였다.강이한과는 전부터 알고 지낸 후배였는데 해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금을 들여 그를 국내로 부른 것이었다.한지음의 시력 때문에 부른 것인데 하필 식사 자리에서 유영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 천천히 먹고 저녁에 내가 술 살게.”“나 술 안 마시는 거 알잖아!”강이한이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배준석은 자유분방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자기관리가 똑 부러진 사람이었다. 의사의 길을 걷기로 한 뒤로 좋아하던 술까지 끊었다.강이한은 음침한 눈빛으로 후배를 노려보다가 결국 외투를 다시 의자에 던져놓았다.“그럼 화장실 좀 다녀올게.”“아니, 이 사람이 정말!”배준석이 뒤에서 불만을 토로했지만, 강이한은 무시하고 자리를 떠났다.그 시각 배연준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영은 어딘가에서 풍기는 찬 기운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하얀 셔츠에 정장 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강이한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겉으로 보기에도 그는 최근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그를 발견한 유영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눈치 빠른 박연준이 그녀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먼저 들어갈게요.”“네.”말을 마친 박연준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강이한을 지나치면서도 그에게 시선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매사에 진중한 박연준에 비해 강이한은 지금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박연준이 안으로 들어가자 유영을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빛도 더 차게 식었다. 조금 전 박연준과 함께 차에서 내리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둘이 무슨 일로 여기 온 거야?”전에 그와 같이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나빴는데 사적으로 둘이 만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