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송재이는 씩씩거리며 설영준의 회사로 향했다.그가 일하는 회사에 온 건 처음이었다.예전에는 별장을 지키면서 그가 오면 언제든 만족해 주어야 하는 그런 여자에 불과했다.비서 여진은 노크하고 대표이사 사무실로 들어갔다.테이블 뒤에 앉아 있는 설영준에게 송재이라는 여자가 찾아왔다고 보고했다.사실 여진도 심장이 벌렁거렸다.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설영준은 무시하기 일쑤였다.하지만 송재이는 당당했고 고작 몇 마디로 여진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여진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하고는 설영준에게 보고하러 들어갔다.머리를 숙이고 뭔가를 쓰고 있던 설영준은 바로 들여보내라고 했다.펜슬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와 함께 설영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들여보내세요.”뭔가 일찍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영준 씨.”송재이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설영준은 이미 소파에 앉아서 손에 든 서류를 보고 있었다.사실 송재이는 오늘 설영준에게 따지러 온 것이다.“지민건이 어제 우리 오케스트라로 찾아와서 울며불며 무릎까지 꿇었는데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영준 씨가 보냈어?”“꿇어 마땅한 거 아닌가?”설영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송재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내 화풀이를 위해서다?”설영준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송재이를 힐끔 쳐다보더니 테이블에 놓은 담배를 하나 꺼냈다.송재이는 원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설영준이 담배를 피우려 하자 임신한 게 떠올라 바로 언성을 높였다.“담배 피우지 마!”설영준이 멈칫했다.그는 종래로 그녀 앞에서 담배 피우는 걸로 눈치를 본 적이 없었다.전에는 그녀도 별로 불만이 없었고 이렇게 큰소리로 그와 얘기한 건 처음이었다.설영준은 코웃음을 치더니 눈을 찌푸렸다.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며 날카로워졌다.송재이는 갑자기 얼음물 샤워라도 한 듯 순간 모든 광기가 사그라들었다.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아까보다는 기세가 많이 누그러들었다.“지민건이 나더러 영준 씨 찾아와서 고소 철회하
그날 설씨 가문 저택의 발코니에서 설영준은 송재이를 ‘창녀’라고 했다.송재이는 이를 잊을 수 없었다. 이는 그녀에 대한 지독한 모욕이었다.매번 떠올릴 때마다 화가 나면서도 그런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설영준은 멈칫하더니 이내 송재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이 무엇을 하려는지 대략 알아챘다. 하지만 여기는 사무실이었다.“미쳤어? 우린 이미 헤어졌고, 영준 씨는 지금 약혼녀까지 있는 사람이야…”“그렇다고 너를 가지지 못하는 건 아니지.”설영준은 마치 귀가 먹은 것처럼 송재이를 안고 책상으로 향하더니 위에 놓여 있던 파일을 전부 바닥으로 쓸어내렸다.서류들이 이리저리 발 디딜 틈이 없이 바닥에 흩뿌려졌다.송재이의 마음도 그 종이처럼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도대체 어떤 사람을 좋아한 거야 나는?’원칙과 기준이 없는 사람이었다.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아무 부담 없이 그녀에게 이런 짓을 저지르려고 하고 있다.설영준은 송재이의 몸을 확 번졌다. 그 바람에 송재이의 아랫배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죽는 한이 있어도 협조하기 싫었지만 아랫배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온몸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남자가 여자를 가지려고 마음만 먹으면 여자의 체력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었다. 오늘은 피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송재이의 뇌리를 스쳤다.이를 악문 송재이는 설영준이 그녀가 입은 치마의 벨트를 풀려 할 때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설영준이 고개를 들어보니 송재이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범벅이었다. 송재이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영준 씨 짐승이에요?”그를 이렇게 속된 말로 욕한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하지만 설영준은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전에 그도 그녀에게 상처 되는 말을 했으니 이걸로 퉁치면 된다고 생각했다.송재이는 이렇게 욕하면서도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집스럽게 반항했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지금 매우 가까웠다.옅지만 익숙한 향기가 그의 코끝을 자극했다.청아하면서도 매혹적인 게 송재이 그 자체였다.순수하면서
설영준이 미간을 찌푸렸다.몸의 쾌감 덕분인지 그의 인내심은 평소보다 더 좋았다.그는 차분하게 그녀를 쳐다보며 설명했다.“저번에 도영이가 때려눕힌 그 학생 병원비 대준 거 돌려주는 거야.”송재이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어딘가 궁색해 보였다.그녀는 상황이 어쩌다 또 이렇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그녀는 또 일방적으로 당했다.혹시나 반항했다가 그를 자극하기라도 하면 애가 다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녀는 설영준의 품이 좋았고 그 품이 그립고 애틋한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송재이는 고개를 숙이고 용모를 단정히 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간질거렸다.그녀는 옆에 놓인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다가 걸음을 멈췄다.“설영준 대표님, 나는 이런 원칙이 없는 행위가 수치스러워. 이게 마지막이길 바라. 아니면 마음의 부담이 클 것 같아.”송재이가 이렇게 말했다.“나랑 사랑을 나누는 게 수치스러워?”설영준은 담배가 당기기 시작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아까 얻었던 쾌감은 금세 짜증으로 바뀌었다.“이렇게 몰래 사랑을 나누는 게 수치스럽지 않다고?”송재이가 고른 단어는 하나같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다 자기가 자초한 일이라 생각했다.이 말을 뒤로 송재이는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신은 하이힐이 바닥과 부딪히며 또각또각하는 소리가 났다.그리고 그 소리는 설영준의 귓가에서 점점 멀어졌다.그녀가 떠나고 나서도 공기 속엔 아직 그녀의 향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설영준은 의자를 돌려 바깥을 내다봤다.그렇게 혼자 사무실에 앉아 그 누구도 찾아오지 말기를 바랐다.…지민건이 공정 회사에 고소당한 일은 금세 그 판에서 소문났다.합의서를 손에 넣지 못한 지민건은 180억을 배상해야 했다.이 돈은 설영준과 같은 사람에겐 별문제 아니었지만 지민건과 같은 작은 사장에겐 생존이 걸린 큰 문제였다.한바탕 치르고 나니 지민건의 회사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랫동안 공들여 세운 회사가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것이다.지민건은
하지만 한 주간 미행해도 송재이의 하루 일과는 심플하기 그지없었다.오케스트라에 가지 않으면 가정교사로 일하는 집으로 가서 수업하는 게 전부였다.가끔 유은정, 문예슬과 나가서 밥 먹고 쇼핑하고 여자들끼리 모임을 가지는 것 외에 이상하다고 느낄만한 점이 없었다.문예슬은 귀국하자마자 집에서 운영하는 회사로 들어가 간단한 업무를 받아 진행하고 있다.위로 오빠가 2명 있는데 아버지가 남아 선호 사상이다 보니 말로는 문예슬에게 회사 업무를 배우라고 하지만 사실 업무적으로 그녀에게 바라는 게 별로 없었고 맨날 남자 친구를 찾을 것을 요구했다.문씨 집안 내외의 눈에 여자는 얼른 좋은 남자를 찾아 시집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문예슬도 찾고 싶긴 했지만 마땅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부모님은 늘 돈을 중히 여기다 보니 소개해 준 사람을 보면 돈은 많았지만 어디 내놓지 못할 그런 외모가 대부분이었다.설씨 집안 내외의 결혼기념일 파티에 다녀온 뒤로 문예슬은 설영준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당연히 전에도 설영준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문씨 집안의 지위는 최근 몇 년이 되어서야 경주시에서 점점 떠올랐다.이렇게 가까이서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정말 놀라웠다.마침 유은정이 문예슬에게 물었다.“그럼 넌 어떤 남자를 찾고 싶은데?”문예슬의 눈동자가 대뜸 반짝반짝 빛났다.“설영준 씨 같은 사람이면 바로 결혼하지.”옆에 앉은 송재이는 이 말에 하마터면 손에 든 젓가락이 파르르 떨렸다.하지만 문예슬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아쉽다는 듯 한탄했다.“나도 그냥 그 얼굴에 빠진 거지. 설준영 씨는 약혼녀가 있잖아. 주현아 씨는 참 팔자도 좋아.”송재이와 설영준이 한동안 만났다는 사실은 유은정만 알고 있었다.유은정은 몰래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고 있는 송재이를 힐끔 쳐다봤다. 송재이의 태연한 표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제 다 내려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박경은 매일 지민건에게 송재이의 행적을 보고했지만 다 보잘것없는 일상이었고 지민건도 이내 지
다음날, 지민건이 주현아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그 역시 많은 사람을 걸쳐 주현아의 연락처를 얻었다.주현아는 지민건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최근 그의 회사가 줄곧 곤경에 처해있고 파산할 날이 머지않다고 했다.주현아는 이런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제 막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지민건의 목소리가 들렸다.“현아 씨는 제 정보에 관심을 가질 텐데요. 현아 씨 약혼자랑 관련된 일이에요.”주현아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지민건은 돈이 없어 주현아더러 고급스러운 클럽에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VIP룸을 예약하라고 했다.‘약혼자와 관련이 있다’라는 상대의 그 한 마디가 주현아는 호기심을 확 사로잡았다.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지민건의 요구를 승낙한 후 약속 장소로 떠났다.주현아는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나갔다.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문을 열고 지민건과 약속한 룸으로 들어간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지민건 씨, 전화로 말한 제 약혼자와 관련된 일이란 게 대체 뭐죠?”지민건은 오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했던지라 옅은 미소를 지으며 크라프트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주현아는 애초에 설영준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란 자신이 없었다.그와 연관된 일이라면 유난히 예민해지고 조심스러울 따름이다.이제 막 크라프트 봉투를 열려던 찰나, 지민건이 다시 가져갔다.그는 마치 주현아를 놀리는 듯싶었다.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니 한꺼번에 통쾌하게 건네고 싶진 않았다.“이봐요!”“조건부터 말할게요. 200억 내놔요.”지민건은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다.그는 지금 배상금 180억을 물어야 하고 나머지 20억은 자신에게 주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이다.주현아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지민건 씨, 이 안에 뭐 금이라도 들어있나요? 부르는 게 값인가요?!”지민건은 눈썹을 치켰다.“어떤 여자가 당신 약혼자의 애를 임신했어요. 이제 곧 낳을 예정이래요!”“네?”“아직 설영준
송재이는 마치 긴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설씨 일가.그날 설도영은 또 강제로 피아노를 배우게 되자 한창 위층에서 심술을 부리며 한사코 내려오지 않았다.오서희는 설도영을 찾으러 올라갔고 텅 빈 거실에 송재이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따분하게 앉아있었고 창밖의 뜨거운 햇살이 집안에 스며들어 그녀의 몸을 비췄다. 순간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차올랐다.“실례지만 누구신지...”이때 문득 중저음의 감미로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정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말투였다.송재이는 어렴풋이 고개 들어 아래에서 위로 쭉 훑어보았더니 멀지 않은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잘생긴 얼굴에 기품이 차 넘치고 눈가에는 여자를 매혹시킬 고고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그 순간, 그녀는 마치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그 뒤로 뭔가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당황해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송재이입니다. 오서희 사모님께서 오늘부터 피아노 과외를 해달라고 부탁하셔서요...”그때 그녀는 살짝 겁에 질린 채 소녀의 천진난만함과 솔직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고 두 눈동자는 한없이 맑고 깨끗했다.그게 바로 송재이와 설영준의 첫 만남이다.나중에 설영준이 몹쓸 짓과 몹쓸 말을 수없이 해왔지만 첫 만남이 그토록 아름다웠던지라 그녀의 마음이 찢어지고 눈물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그 첫 만남으로 그녀는 평생을 지체했다.22살 되던 그해, 송재이는 사랑의 시련을 맞닥뜨렸다....송재이는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어렴풋이 눈을 떠보니 어두컴컴한 작은 방 안에 있었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이곳은 병원 병실이었다.문 앞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두 사람이 나란히 들어왔는데 뜻밖에도 주현아와 지민건이었다!‘저 둘이 왜 동시에 여기로 온 걸까?’송재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 앉으려 했는데 그제야 손에 수액을 맞고 있는 걸 발견했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
한편 이번 일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지민건은 소원대로 주현아와 약속한 금액의 수표를 받았다.300억이라!그는 그중 일부로 배상금을 물고 나머지는 남겨서 프로젝트에 임했다.비즈니스 업계의 모든 이가 그의 인생이 끝장일 거라고 여길 때, 뜻밖에도 지민건은 재기에 성공했다.다만 또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난 지민건은 전보다 훨씬 겸손해졌다.또한 매번 설영준과 동시에 참석해야 할 장소는 갖가지 이유를 둘러대며 회피했다.지민건은 설영준을 매우 증오한다.그러니까 주현아와 손을 맞잡고 그딴 짓을 계획했다!이젠 설영준의 아이를 유산 시켜 속으론 쾌재를 불렀지만 다시 그를 마주하자니 상대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숨 막히듯 마음이 찔리고 저도 몰래 비겁하게 머리를 숙이게 된다.그는 이렇게 심적으로 시달리는 게 너무 힘들어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해 다녔다....송재이는 아무런 조짐도 없이 아이를 유산 당했다.그녀는 심지어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다. 그녀 배 속의 아이는 설영준의 아이였으니까.게다가 이건 사생아였다!일단 경찰들이 개입하면 아이 아빠에게 연락할 게 뻔하다.그럼 한때 그녀가 임신한 사실과 이 아이를 낳고 싶었던 사실까지 전부 폭로되는 게 아닌가?설영준이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분노? 증오? 혹은 경주에서 그녀를 매장시켜 더는 이 바닥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닐까?송재이는 자세히 생각해봤지만 설영준은 기껏해야 그녀의 몸에 살짝 미련을 가질 뿐 단 한 번도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없고 아이를 낳는 건 더 말할 가치도 없었다.나중에 아이가 유산 당한 걸 알게 되면 아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드디어 아무 걱정 없이 그와 조건이 비슷한 약혼녀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될 테니까.그땐 주현아를 칭찬하기도 바쁠 테지!송재이는 생각할수록 절망감에 휩싸였다.그녀는 이토록 침울하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일주일을 보냈다.단장은 원래 오랫동안 병가를 낸 그녀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하지만 일주일 후 다시 오케스트라에 나타난 그녀의 모
송재이는 다시 매일 오케스트라에 가서 리허설을 했다.이날 송재이는 금방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마침 위층에서 담배를 피우고 내려오는 연지수와 마주쳤다.연지수가 물었다.“이제 곧 수석 공모를 앞두고 있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휴가를 내는 거죠? 너무 자신만만한 거예요 아니면 자포자기하는 거예요?”평소 같으면 송재이는 무조건 그녀와 말싸움을 벌일 테지만 요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유산의 아픔이 아직 마음에 남아있고 그리 쉽게 가셔지지 않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연지수도 저기압인 송재이를 눈치채더니 미간을 구겼다.“요즘 우리 오케스트라에서 투자를 유치하고 있던데 단장님이 이 일로 정신없이 보내고 있어요. 시간 내서 단장님 앞에서 잘 좀 표현해 봐요. 어쩌면 다음에 자본가들과의 식사 자리에 우리를 데리고 갈지도 모르잖아요. 만에 하나 횡재가 떨어져서 어느 부자의 눈에 들지도 모르잖아요...”“대체 무슨 만에 하나가 그렇게 많아요?”송재이는 지금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시큰둥하게 그녀에게 반박했다. 시선조차 안 준 채 그녀에게 쏘아붙였다.“부자의 눈에 들면 그다음은요? 몇백억 투자해서 수석 피아니스트로 만들어준대요? 오케스트라의 일인자가 된대요? 드라마 좀 그만 봐요!”전에는 항상 연지수가 이상야릇한 말투로 송재이에게 쏘아붙였지만 오늘은 처음 송재이가 이토록 공격적인 말투로 그녀에게 반박했다.연지수는 평상시에 말재주가 뛰어나더니 지금 이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송재이가 수상하다는 걸 느꼈다.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송재이는 옷을 다 갈아입고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서 자리를 떠났다.송재이는 문밖을 나서면서 카톡을 확인했다.민효연의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송 선생님, 오늘 과외하러 와주실 수 있나요? 연우가 선생님을 엄청 그리워해요.]송재이는 병원에 입원한 며칠 동안 오케스트라에 병가를 냈을 뿐만 아니라 민효연한테도 휴가를 냈다. 그때 민효연의 답장은 이랬다.[푹 쉬어요.]송재이는 민효연의 말 속에 또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