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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이강현, 나한테 농담하지 마!”

멍하니 있던 고운란이 이내 화가 났는데도 이강현은 여전히 농담이나 하고 있다.

이번 계약의 의미가 뭔지 모르는거야?

이강현이 또 입을 열어 뭔가 설명하려 했지만 고운란이 바로 등을 지는 바람에 묵묵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운란아 네가 감당할 모든 것, 내가 대신 짊어질거야. 내일 저녁 연중기념연회에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게 해 줄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내가, 이강현이 다 준비해 줄거야!

다음 날 저녁 무렵, 고씨 가문은 서울의 4성급 호텔의 연회장을 예약하고 파티를 열었다. 호텔 입구의 아름다운 그림자가 담담한 초조함과 노기를 띠며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왜 아직 도착하지 않는거야? 오늘 제대로 차려입게 했다고 도망치는 건 아니겠지.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고씨 집안의 연중기념연회에서 매번 이강현은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다. 남을 헐뜯으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 오늘은 차려입게 했으니 좀 상황이 다를까…?

고운란이 자조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강현이에 대해서 이렇게나 환상을 품고 있다니.

“운란아, 오래 기다렸지?”

뛰어오며 웃는 얼굴로 말하는 이강현을 그녀가 차갑게 흘겨보며 말했다.

“왜 이제 오는거야? 그렇게 옷도 잘 입고 행동도 좀 고치라고 말했는데, 어째서 여전히 이 모양이지?”

“내가 옷이 별로 없잖아, 매년 이렇지 뭐, 괜찮아.”

이강현이 민망하다는 듯 코를 만지며 말한다.

그를 보며 미간이 비틀어져 불만스러운 안색을 비쳤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더 바랄 게 뭐가 있겠어? 어차피 이보다 더 비참한 건 없어, 이제 익숙하지. 게다가, 이 못난 사람이 좋은 옷을 입은들 뭐가 바뀌겠어.

그리고 오늘 밤, 고흥윤은 틀림없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됐어, 이따가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말하지 마. 또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알았지?”

차갑게 말하는 그녀에게 이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허 웃으며 어찌됐든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건들건들한 모습을 보고 한 대 걷어차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두 사람이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집안 운영과 관련된 핵심 인물들이 모두 도착했다. 연회장 안에 빈자리가 없이 꽉 들어찬 친척들. 이들은 고운란이 이강현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온통 조롱과 업신여김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쨌든 한 식구인 터. 다들 미적지근하게 표면적인 인사를 했다.

“운란이 왔니, 여기 앉아.”

“운란이는 어떻게 이렇게 항상 예쁘니.”

“빨리 앉아. 부모님이 벌써 도착하셨어.”

여러 친척들은 이강현을 투명인간처럼 무시하고 고운란과만 인사를 나누었다. 이런 상황에 마음속으로는 실의에 빠졌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습관처럼 되었기에, 조용히 고운란과 함께 구석에 앉았다.

고건민과 아내 최순은 이미 메인 테이블에 앉아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던 최순이 이강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욕설을 퍼부었다.

“뭘 가지고 오는 거야, 무슨 개 한마리를 데리고 오네? 아우, 재수 없어!”

괜히 일찍 와서 친척들에게 한바탕 암암리에 비웃음을 당한 최순은 매우 불쾌했다.

그저 고운란이 불량배에게 시집간 이 쓸데없는 일 때문에, 방금 한 무리의 사람들이 테이블에서 비웃은 것을 생각하자 마음이 미칠 것 같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강현은 구석에 앉아 있었지만 분명히 들리는 장모의 호통에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묵묵히 찬물을 마셨다.

사람이 가난하면 남에게 업신여김 당하기 마련이고, 물까지도 차갑게 대한다.

이때, 갑자기 조롱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경박하게 들려왔다.

“어허, 이강현이잖아, 쯧쯧, 여기 왜 앉아, 너 같은 서울 유명인은 메인 테이블에 앉아야지.”

고흥윤이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고 거들먹거리며 이강현을 향해 오만한 태도와 풍자적인 눈빛을 하며 걸어왔다. 동시에 옆에 있는 고운란을 보고도 비꼬았다.

“오늘이 가문의 중요한 연회인데 또 이 창피한 걸 가지고 오면 어르신께서 언짢으실 게 두렵지도 않은가봐?”

틈만 나면 이강현에게 모욕을 주고, 그때마다 겸사겸사 고운란도 같이 무시한다. 장손으로서 자신의 우월감을 찾고 싶은 거겠지. 어쩔 수 없어, 그냥 농담하는 거라고 생각해야지. 이강현은 안색이 침울하고 불쾌했지만 화를 참으며 그곳에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흥윤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약이 올라 직접 손을 들어 뺨을 톡톡 치며 도발했다.

“아이고, 나는 갈게. 너 정말 멍청이구나, 누가 때리는 욕하든 말든 상관없네?”

고운란은 옆에서 모욕을 당하는 걸 보고 매우 불편했다. 어쨌든, 이강현은 자신의 남편이니까.

“그만하세요!”

일어나서 직접 남편의 뺨에 닿은 고흥윤의 손을 쳐내고 앞에 선 고운란의 모습이 마치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새 같았다. 고흥윤은 냉소를 짓더니 다시 두어 번 욕하고서야 가버렸다.

줄곧 자신을 업신어겼던 고운란이 뜻밖에도 도와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고마워.”

“오해하지 마. 그냥 네가 나한테까지 창피줄까 봐 그런거야.”

차가운 대답을 날리는 고운란의 마음이 짜증으로 가득했다. 이따가 할아버지가 여쭤보시면 강성 그룹과의 협조는 어떻게 하지? 정말 사직해야 되나?

고운란은 지금 애초에 이강현의 말을 믿고 그 내기를 승낙한 걸 매우 후회하고 있다.

곧, 만찬이 시작된다.

고씨 어르신이 문쪽에서 지팡이를 짚고 아들의 부축을 받아 들어와 메인 테이블에 앉았을 때, 모두들 일어나서 어르신을 향해 소리쳤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좋아, 모두 다 왔겠지. 마음껏 들어.”

고씨 집안 주인 어르신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메인 테이블에는 장남과 셋째 아들네 집안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유독 고운란과 이강현만이 회사의 일부 직원들과 한 테이블에 모이도록 배치되었다. 고운란은 수치심에 입술만 깨물었다. 메인 테이블에 앉은 고흥윤이 어르신 곁에서 고운란을 향해 의기양양한 눈빛을 보냈다.

틀림없어, 이번 자리는 저 사람이 일부러 이렇게 배치한 거야. 시집 간 손녀가 가정의 핵심 인물이 되는 게 이렇게나 쉽지 않다니!

메인 테이블의 환성과 웃음소리와 엇갈리는 술잔, 반면 자신 주변에는 일반 직원들. 이런 차별대우는 그녀의 있던 입맛도 떨어지게 했고, 동시에 이강현이 더욱 싫어졌다. 모든 것이 이 쓰레기 때문이야!

“운란아, 저기 앉고 싶어?”

“그래, 나는 저기 앉고 싶은데 되겠니 그게? 가문을 운영하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나는 불량배한테나 시집갔는데 무슨 자격으로 저기 앉을 수 있겠어. 너만 아니었으면, 나와 우리 부모님이 고씨 집안에서 쫓겨났겠어? 이강현, 모든 게 네 잘못이야! 왜 이렇게 쓸모가 없어!”

짜증이 나서 말하던 고운란은 눈시울을 붉히고 이내 눈물을 흘렸다.

정말 싫다! 이 사람이 무기력함이!

고운란의 억울한 모습을 보면서 멍해진 이강현의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그는 과연 정말 불량배일까? 아니다.

이강현은 용문의 작은 도련님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재산을 장악할 수 있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작은 고씨 집안은 물론이고, 서울 전체의 명문가를 합쳐도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머니와 용문에서 쫓겨나 서울로 흘러 들어온 뒤 4년간 신분을 감춘 것은 용문의 암투를, 그 여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용문의 생활에 싫증이 난 탓도 있었다.

고운란을 사랑하는 이강현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잠시 침묵한 후, 그녀에게 말했다.

“운란아, 네가 원한다면 내가 저 테이블에 앉게 해 줄게, 고씨 가문 주인 자리도 내가 대신해서 가져올 수 있어.”

그녀는 의아하게 옆에 있는 이강현을 바라보다가 곧 차갑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너만 믿으라고?”

“네가 나를 믿기만 하면 내가 대신해서 그 자리 가져올 수 있어.”

진지하게 맑은 눈빛. 고운란은 순간 깨끗한 눈을 보고 황홀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강현이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순간, 하마터면 믿을 뻔했지만 현실이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만해. 네가 어떤 위치인지 몰라? 그런 능력이 있는데 오늘 여기에 앉았겠어?”

도대체 언제부터 큰소리를 쳤다고 그래?

화가 난 고운란은 젓가락을 탁자 위에 툭 치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만 보고 있던 이강현은 맹세했다.

운란아, 네 뜻대로 모두 되게 해줄게.

시간이 지난 후 고운란이 돌아왔을 때, 울었는지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분명 그녀는 지금 자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만찬이 절반 정도 진행됐을 때, 고흥윤이 일어나 한쪽 테이블의 시무룩한 고운란을 보고 이야기했다.

“너랑 강성 그룹의 계약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그쪽 도련님을 만났다고 들었는데, 말은 잘 됐나? 그럼 내가 한 마디 좀 할게. 자, 모두 잔을 들어 함께 고 본부장과 강성 그룹의 협력을 축하합시다!”

앉아있는 고운란이 화가 나 이를 악물었다. 저게 일부러! 일부러 치켜세우고 있잖아! 어떡하지? 협력 얘기도 안 했고, 강성 그룹 그 사람을…….

“왜 그래, 안색이 안 좋네? 설마,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단 말이야?”

고흥윤의 잔이 허공에 있다가 차갑게 탁자 위에 던져졌다.

“내가 잘못 기억한 게 아니라면, 그저께 본부장의 직위를 걸었던 걸로 아는데.”

마음이 급해진 고운란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고 어르신도 침착한 얼굴로 물었다.

“운란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계약은 따냈어?!”

“할아버지, 저는…….”

그녀가 일어서서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어 인정하려 하는 순간, 갑자기 옆에 있던 이강현이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고 부드럽게 한번 본 후 고흥윤과 어르신에게 말했다.

“강성 그룹의 계약은 운란이가 이미 따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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