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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멍해진 고운란이 방문을 쾅 닫은 채 혼자 방에서 울고 있다.

이강현, 내가 어떻게 너를 믿을 수 있겠어?

거실에서 이 모습을 모두 목격한 최순이 이강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부엌 쪽으로 돌아섰다.

22일, 카이사르 호텔에 대한 소문은 점점 더 심해졌다.

매년 이맘때면 고 씨 집안은 증손녀의 생일을 미리 준비한다. 비록 고운란과 이강현이 늘 고흥윤을 비롯한 모두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존재지만, 고 씨 어르신의 증손녀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고 씨 집안이 유난히 조용하고 증손녀의 생일을 준비하는 기척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집안 어르신이 이미 그 증손녀에 대한 애정을 잃었다고 한다. 바로 이강현 그 쓸모없는 자식이 수차례 어르신에게 대들었기 때문이겠지.

게다가, 이번에는 카이사르 호텔의 소문도 피해갈 수 없다. 그 날 호텔을 빌린 부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신분조차 알려지지 않아 23일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커져가고 있다.

과연 누구일까?

고 씨 집안의 회사 내부, 친척과 회사 고위층 사람들이 하나같이 분개했다. 이강현과 고운란만 아니었으면 그들도 다른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친척들이 요 며칠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숨어있고, 어르신조차도 집에 몸을 숨기고 있다.

이전에는 집안 모두가 이맘때쯤 솔이의 생일을 대대적으로 준비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괘씸해! 고운란과 이강현만 아니었으면 우리 고 씨 집안이 이렇게 창피하지 않았을 텐데!”

“이강현은 정말 남자의 수치야. 죽어 마땅하지!”

“고운란도 그래, 그 여자 때문에 우리가 모두 다른 사람의 비난과 비웃음을 당하고 있잖아.”

고 씨 가문의 몇 사람이 모여 분분한 의견을 나누며 한스러움을 토로했다.

고흥윤은 오히려 담담하게 웃으며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웃어? 설마,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

집안 사람중 하나가 고흥윤에게 물었다.

“너희들, 생각이 짧네. 이 일은 커질수록 좋아.”

고흥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고청아가 한쪽에서 손톱을 정리하며 웃으며 말했다.

“너네 다 멍청하네. 일이 커질수록 창피한 건 고운란과 이강현이지. 이렇게 되면 고 씨 집안과 고운란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우리 집안 어르신은 체면을 중시하시지. 고운란처럼 가문 망신을 시킨 사람이 뭘 바라겠어? 강성 그룹과의 계약 내용이 진행되기만 하면 고운란도 금방 버려질 걸.”

다른 사람들도 이내 말 뜻을 이해하고 얼굴에 고소하다는 듯 웃음이 떠올랐다.

“그런 거였군, 하하, 역시 둘은 생각이 있었네!”

“내 말이! 역시 이 집안은 흥윤 형이 관리해야 해!”

고흥윤은 몇 번 만족한 듯 웃다가 갑자기 물었다.

“맞다, 너희들 카이사르 호텔에 갈거야? 그 신비주의 부자 만나러 가보자구. 듣자하니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예정이라던데. 300테이블이나 초대했대. 그 호텔 10개 층, 주변 호텔도 다 예약이 찼대. 모두 그 신비주의 부자를 보려고.”

“가지, 당연히! 공짜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기회인가! 모든 테이블 다 200만원짜리 고급 식사 코스라고 들었어.”

“정말요? 그럼 저도 갈래요!”

잇달아 너도나도 가겠다고 소리쳤다. 비록 고씨 어르신이 누구도 가지 못하게 명령을 내렸지만,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오늘 김미나는 마음이 매우 좋지 않다. 절반은 이전에 자신을 따라다니던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자신이 귀국하자 마자 김씨 집안에 와서 혼담을 꺼내고, 절반은 자신의 절친 고운란 때문이다. 며칠 동안 서울에서 떠들썩했던 카이사르 호텔의 일을 그녀도 들었다.

빌어먹을 이강현!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고운란도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고운란을 찾으러 가려고 한다. 틀림없이 지금 매우 괴로울 거야.

그때, 갑자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가 뜨더니, 한 번 끊기고 다시 울린다. 성질이 급하고 도도한 김미나는 받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뭐야? 나 대출도 안받고 집도 안살거야!! 뭘 이렇게 영업을 해대!”

“김미나?”

수화기 너머로 낯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쁜 얼굴을 찡그리며 루이비통 가방을 메고 팔짱을 낀 김미나가 차갑게 물었다.

“누구야? 또 나 따라다니는 놈이야? 우리 집 앞에서 줄이나 서.”

“나야, 이강현.”

그녀는 이름을 듣자마자 발작하듯이 욕설을 퍼부었다.

“이강현? 무슨 낯짝으로 나한테 전화하는 거지? 운란이가 너 때문에 며칠간 얼마나 비난을 받았는지 알아? 이 찌질한 놈! 멍청아!”

시원하게 10분가량 욕을 퍼부은 후에야 그녀는 한숨을 쉬며 차분하게 이어서 말했다.

“왜 전화했어? 혹시 나한테 마음이라도 있는거야? 이게 완전 찌질한 데다 변태까지! 운란이한테 바로 말할거야!”

수화기 너머에 선 이강현은 멍한 표정이었다. 김미나가 생각이 없다는 말은 들었는데, 진짜일 줄은…….

찌질이 취급을 당하더라도 고운란을 위해, 큰 뜻을 위해 참아본다.

“너 지금 오해하고 있어. 내 마음속에는 운란이밖에 없어. 너한테 전화한 건 도움을 청하려고 그런거야.”

“도움?”

차가운 표정으로 빨간색 페라리의 차문을 열고 검은색 스커트에 싸인 곧고 하얀 긴 다리를 밀어넣으며 김미나가 말했다.

“내가 왜 너를 도와줘야 돼?”

“운란이 일이야. 나를 돕는 게 운란이를 돕는 거야.”

“운란이?”

이강현의 말에 김미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망설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무슨 일인데?”

운란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내가 도와야지.

“내일 밤, 네가 운란이랑 내 딸 솔이를 데리고 카이사르 호텔에 가 줘. 비밀을 꼭 지켜야 해! 운란이에게 알리지 마.”

이강현은 고운란이 좋아하기를 바라며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내일 밤? 23일이잖아, 어머! 너 미쳤어? 내일 밤 카이사르 호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도 이런다고? 운란이를 도시 전체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어?!”

이놈은 짐승만도 못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행동을 하다니!

“23일은 내 딸의 생일이자 운란이가 엄마로서 수난을 당하는 하루야. 나는 그날을 영원히 잊지 않을거야. 운란이는 내가 일생을 다해 지켜줄 여자니까, 깜짝 선물을 주고싶어. 좀 도와줘.”

진지하게 말하는 이강현이 김미나를 감동시켰다.

김미나의 생일 역시 엄마가 수난을 당한 하루였다. 그녀는 아이를 낳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지만,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지금까지 아버지와 함께 자랐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이 없다.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를 미워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도 그녀에게 20여 년 동안 냉담했다.

“좋아,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운란이를 망신 당하게 한다면, 내가 제일 먼저 너를 없애버릴 거야!”

이를 악물고 통화를 끊은 김미나가 혼자 차에 앉아 운전대에 엎드려 울었다.

엄마, 보고싶어…….

드디어, 23일이 되었다.

서울 도시 전체가 흥분으로 가득하고, 언론도 일찍이 앞다투어 카이사르 호텔로 달려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녁 8시, 밤의 장막 아래, 휘황찬란하고 환하게 켜져 있는 카이사르 호텔의 등불.

부근의 거리들도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군중들이 넘쳐흘러 한동안 교통체증을 초래했다. 다들 오늘 밤 호텔에 와서 신비주의 부자를 보려는 것!

인근 호텔, 백화점 등도 사람으로 가득 찼고, 모두들 휴대폰을 들고 잔뜩 기대하는 장면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밤 카이사르 호텔은 거금을 들여 야외 크리스탈 궁전을 만들었다. 마치 활짝 핀 흰색 장미처럼, 그 빛나는 수정과 붉은 장미가 깔린 호텔 옥상에서 온 도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장면이 연출될 것이다. 저 사람의 아내와 딸은 얼마나 행복할까.

고 씨 집안 둘째네 집.

“미나야, 도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나 이따가 병원에 솔이 데리러 갈 거야.”

고운란은 등이 훤히 드러나는 검은색의 옷을 입고 치장하고 있다. 우아하고 매혹적인 그녀. 흡사 검은 백조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가볍게 훑어보며 김미나가 웃었다.

“묻지 말고 오기나 해. 어쨌든 내 말 들어. 내 친구가 너를 위해서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게 있는데,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서프라이즈? 친구? 누군데?”

고운란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엄마.”

바로 이 때 김씨네 가정부가 마스크를 쓴 채, 공주 치마를 입은 솔이를 안아서 건네주었다.

“응, 솔이야.”

고운란이 솔이를 받아서 안으며 더욱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김미나를 바라보았다.

“미나야,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왜 솔이까지 데려왔어? 그 친구가 내 딸도 보자고 한 거야?”

“아이고, 묻지 마. 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 가자.”

곧 김미나는 고운란과 호기심 가득한 솔이를 데리고 곧장 카이사르 호텔로 향했다. 지하주차장에 주차했기 때문에 고운란은 아직 자신이 카이사르 호텔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비로소 이곳이 깔끔하고 정리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입구에는 붉은 색 유니폼을 입은 두 여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고 아가씨, 따라오세요.”

“나를 안다고?”

그녀는 의아해하며 이상하다고 느꼈다.

“미나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영문도 모른 채 긴장한 상태로 묻는 고운란, 그리고 김미나는 옆에서 몰래 웃고 있었다. 얘가 왜 말을 안 하지?

몇 사람이 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김미나는 마음속으로 이 빌어먹을 이강현이 자신과 고운란을 실망시키지 않을 정도로 잘 준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갈수록, 온 하늘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사방이 완전히 투명한 엘리베이터는 마치 카이사르 호텔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구름 사다리처럼 보인다. 이곳은 지금, 휴대폰과 카메라를 들고 있는 수만 명의 인파로 들끓고 있다.

“나왔어! 나왔다고! 봐봐, 너무 예뻐!”

이제서야 고운란은 자신이 어디에 왔는지 깨닫고 얼굴이 충격으로 가득찼다. 입을 가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핑 돌며 그녀의 시선이 카이사르 호텔 곳곳으로, 온통 붐비는 사람들 속으로 향했다.

팡팡!

온 하늘에 펼쳐지는 오색찬란한 불꽃.

“미나야, 여기… 여기 카이사르 호텔이야? 우리가 잘못 온 거 아니야?”

고운란은 긴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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