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귀비가 이렇게 말하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얼른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 옥 상궁은?”호비가 말했다. “어떻게 그냥 두겠습니까? 지난밤에 바로 경성에서 쫓아냈지요.”“그럼, 옥 상궁이 다른 누구와 많이 왕래했는지 물어봤어? 이런 말을 누가 옥 상궁에게 한 건 아니었을까? 옥 상궁이란 사람이 내 기억으론 자네 조모가 붙여서 들여보낸 사람인데, 자네 조모는 세상 이치에 훤한 분이시라 그분이 가르친 사람이 그럴 리 없어.”호비는 당황스러웠다. “물어본 적 없어요. 신첩은 옥 상궁 본인이 망령되게 생각했다고 믿어서 옥 상궁을 쫓아버렸네요.”호비는 배를 부여잡고 은근히 통증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물었다. “마마 생각에 뭔가 미심쩍으십니까?”“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어. 지금 조정과 후궁이 다 안정된 것처럼 보이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거든. 누가 알아? 자네는 돌아가서 조신하게 있도록 해. 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전부 내보내고 한시도 곁에 둬서는 안 돼.” 황귀비가 타일렀다.“예, 알겠습니다. 신첩 지금 가서 바로 하겠습니다!” 호비는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배가 더욱 아파와서 배를 누르며 시녀에게 와서 부축하도록 했다.황귀비가 상황을 보고 물었다. “왜 그래? 불편해?”“복통이에요. 전에 약간 아파서 어의를 불렀는데 체했다고, 신첩이 식탐을 부렸다고 했어요.” 호비가 풀이 죽어 말했다.황귀비가 기가 차서 말했다. “입단속을 잘해야지. 찬 음식은 많이 먹지 말고, 지금 배가 아프니 급히 돌아가지 말고 일단 쉬었다가 가. 내가 어의에게 와서 자네 진맥해 주라고 할 테니.”호비는 심하게 통증이 느껴져서 경솔하게 간단하게 말을 끝마쳤다. “그럴까 봐요. 마마께 수고를 끼쳐 죄송해요!”한편 명원제는 오늘 일찍 태상황에게 문안하러 갔다.어제 정해진 일에 대해 확실히 태상황에게 한마디 보고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문안하고 부자가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데 주재상과 소요공도 아직 건곤전에 같이 있어 다 같
태상황이 명원제의 말을 다 듣고 차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천천히 담뱃대에 불을 붙이고 감도는 연기 틈으로 명원제를 보며 말했다. “황제가 이렇게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어 과인은 위로가 되고 또 황제의 생각이 맞아. 단지 두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황제가 그렇다니 더는 묻지 않겠네.”명원제가 말했다. “물어보세요!”명원제는 이것도 상당히 멀리 내다본 생각이라 여기고 태상황이 분명 동의할 거라고 생각해서 다른 건 고려해 보지도 않았다.태상황이 물었다. “십황자의 나이가 다섯째와 스무 살 정도 나서 형제의 감정이 깊지 않다고 했는데, 일단 황제의 말이 맞는다고 쳐도 황귀비도 아이를 뱄으니 만약 십일황자를 낳으면 그때는 또 어떤 준비할 거지? 호비의 복중에도 용종이 있는데 황자라고 한다면 그건 또 어떻게 대비할 건가?”“그건……” 명원제는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어 대답했다. “다섯째가 지금 황귀비 슬하로 적을 옮겼으니 황귀비가 황자를 낳으면 다섯째와 자연스럽게 가까울 것이고, 황자가 자라면 다섯째 형을 도와 정무를 볼 거라 그건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죠. 호비 복중의 아이는……짐도 당장 계획은 없지만 태어난 아이가 황자면 앞으로 다른 곳을 분봉하죠.”“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황귀비 마음에 황제가 편애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야 할 텐데!” 태상황의 이 말은 사실 기분이 나쁘다는 걸 내포하고 있었지만 명원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명원제가 덧붙여 말했다. “황귀비는 천성이 현숙한 여자로 품행이 고결해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좋아, 첫 번째 문제는 이렇게 해결하면 아무 문제도 없구나. 태상황이 소요공에게 담뱃대에 담뱃잎을 채워 넣게 하고 계속 물었다. “두번 째 문제는 호후의 재능으로 그 다섯 도시 치리를 담당하는 게 가장 최적이야. 호후를 택한 점은 찬성하는 바야. 호후가 좀 시건방지고 전에는 무공이 뛰어나다고 설쳤지만 한번 경각심을 심어준 뒤로 조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신하
진북후는 나라에 공을 세워 북방 영토를 정돈했지만, 그 정도 꼬물거림으로 대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삼대 거두와 아예 비교되지 않았다. 이번 전장의 상황은 생사가 몇 번이나 오가며 전투마다 치열하기에 그지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둘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명원제는 반쯤 농담, 반쯤 진심으로 말했다. “그럼, 어르신은 가실 의향이 있으신지요?”소요공이 흠칫 놀라 물었다. “폐하 진심이십니까?”명원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르신께서 가신다고 하시면 짐은 가능하다고 봅니다!”소요공은 웃으며 침묵하더니 같이 침묵을 고수하는 주재상을 힐끔 봤다.태상황이 웃음을 흘리며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소요공이 원하고 말고가 어딨어. 성지가 내리면 가는 거지. 가봐, 가서 짐 싸. 어차피 과인은 평생 고독하게 지내는 게 익숙하니까 어릴 때 친구가 곁에 있는 거 안 어울려. 황제의 막내를 위해 애쓰는 편이 중요하지. 평생 고생만 해왔는데 마지막 몇 년 더 고생하는 게 뭐라고. 북당을 위해 온몸 바치고 죽으면 그만이야. 말년치고는 충실한 셈 아닌가!”이 말에 명원제는 등골이 서늘해져서 얼른 사죄했다. “아바마마 오해하지 마세요. 짐은 그저 농담이었습니다. 어르신을 어찌 고향 땅을 등지고 그런 변방의 척박한 땅으로 가시라 하겠습니까? 짐도 모진 인간이 아닙니다. 어르신은 아바마마 곁에서 만년을 보내셔야지요!”태상황이 웃으며 담뱃대에 연이어 불을 붙이더니 이번엔 좀 오래 빨며 말했다. “황제가 농담하는지 과인도 알지. 소요공이 저 나이인데 변방 도시를 안정화시키러 보내는 건 각박하고 박정한 짓이지 암.”명원제는 태상황이 화가 난 걸 알았다. 웃고 있지만 미소가 냉담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잠시 소요공 얘기는 그만두고 말을 돌렸다. “아바마마께서는 다섯 도시를 하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짐이 이미 성지를 내려 호비도 감사 인사를 올렸사옵니다!”태상황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과인이 황제와 일일이 까발려서 분석해 보도록 하세.
명원제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더니 퍼뜩 ‘태상황이 자신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한 건 이미 뭔가 생각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었다.그래서 은근슬쩍 떠보았다. “아바마마, 어떻게 처리하면 가장 적당하겠습니까?”태상황이 담뱃대를 내려놓고 명원제에게 말했다. “어제 과인이 이미 생각한 게 5개 도시를 태자의 아들들에게 분봉하는 것으로 태손 말고 배 속에 아이도 받을 부분을 남겨두는 거야. 5개 도시에 호후와 셋째를 주둔시켜 서로 견제하고 끌어 주기도 하며 한쪽만 일방적으로 커지지 않게 하는 거야. 넷째는 계속 강북부에 주둔해서 조정의 눈이 되어 이 다섯 도시를 지켜본다면 우리 변경의 국토를 보다 잘 지켜낼 수 있어. 이게 제일 타당한 방안이지.”명원제가 놀라서 말했다. “아바마마, 그다지 타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황자에게도 분봉하지 않았는데 황손에게 먼저 분봉하는 예가 어딨습니까? 그리고 아바마마 말씀대로면 이 다섯 도시는 열째에게 분봉해도 통하는 얘기가 아닙니까? 똑같이 셋째를 먼저 파견해 호후를 잡도리해서 날뛰지 못하게 하면 뭐 문제될 게 있나요?”태상황이 바로 꾸짖으며 말했다. “그 차이를 방금 얘기했잖아. 만약 열째에게 나눠주면 호후는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려고 들어 셋째는 안중에도 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태자의 아들이란 같은 처지에 놓이면 야심이 생기기 쉽지 않아. 15년 후 아이가 자라 봉지로 가면 그들이 각각 도시를 하나씩 점할 것이고, 같은 배에서 난 형제가 서로를 지키고 도울 뿐 아니라 문제가 생기면 상의해 협력을 도모할 거야. 그들은 우리 북당을 위해 흔들림 없는 나라의 관문을 공고하게 구축할 거야. 다섯이 힘을 합하면 다섯보다 큰 법이거든. 네가 다섯 도시를 한 사람에게 분봉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다.”태상황의 이 말을 다 듣고 명원제는 마음으로 설복당했다. 확실히 자신이 세운 계획보다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하지만 문제가 바로 그 점이었다. 명원제는 이미 십황자에게 성지를 내렸는데 황제라는 사람이 어찌 자신이 내린 명을 이랬다저랬다
주재상이 소리쳐 막았지만, 명원제는 영 달갑지 않아서 사죄하고 싶지 않았다. 태상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뱃대를 들더니 옆에서 담뱃잎을 끌어와 안에 채워 넣었다. 이번 친정은 북쪽 사막의 모래바람이 거세서 개월 수로는 2달 남짓이었지만 얼굴과 손의 피부가 검게 그을리고 건조해졌다. 매일 직접 도검을 닦아서 손톱 끝에 칼에 생긴 거스러미가 무수하고 거스러미를 뜯어낸 작은 상처로 손가락 마디 두 개가 갈라져 있었는데 상처는 아물었지만 딱지가 남아서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 담배를 채우면서 손가락 마디 딱지가 담뱃대에 부딪혀 상처가 다시 벌어져 붉은 속살이 나왔다.태상황이 흘끔 보더니 두 손가락으로 담뱃대를 끼우고 바로 딱지를 뜯어버렸는데 딱지 가운데 약간의 피가 베어 나와 손가락 끝으로 눌렀다. 눈을 내리깔고 있으니 눈가의 주름이 더욱 서명해 보였다. 머리에 희끗희끗한 백발이 은빛으로 빛나고 몇 가닥 누렇게 마른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끼어 있었다. 처진 입꼬리 부근에는 자잘한 흉터가 있어 고개를 드니 그 흉터가 반사된 빛으로 사라져 보였다.태상황은 담배에 불을 붙여 뻑뻑 피우더니 산전수전 다 겪은 얼굴은 연기 뒤에 감춰져 있고 목소리만 조용히 들려왔다. “응, 그만 가봐!”명원제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채로 일어나 인사하고 나가는데, 마음이 여전히 욱하고 치받쳐 올라 그만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바마마께서는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열째의 이름은 우문규로 아바마마께서 직접 지어 주셨고 열째에게 두터운 기대를 품으셨습니다. 짐은 이미 태자라는 가장 좋은 지위를 다섯째에게 주었는데 아바마마께서는 다섯 도시까지 다섯째의 아들들에게 주신다면, 편애가 지나치다고 사람들이 뒤에서 숙덕거리게 될 것이고 도리어 태자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짐이 열째를 위해 향후 계획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지나침이 없습니다. 법도에 따라 짐은 사실 호비의 신분을 높여 귀비로 책봉할 수 있으나 아바마마께서 호비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짐이 그리하지 않은 것입니다. 호비를 서운하게 할
건곤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내의원 어의가 전부 소집되었고 태상황과 주재상이 같은 전에 모셔졌다. 이는 소요공이 고집한 것으로 소요공은 눈이 벌게져서 소리 질렀다. “내가 반드시 둘을 지킬 테니 하나도 내 시선에서 사라지게 하지 마라!”소요공이 그간 보여준 성격은 상당히 평화로워서 이렇게 미친 듯이 울부짖는 것은 역시 처음으로 건곤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정신이 쏙 빠졌다.희상궁이 상황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희상궁은 주방에서 오늘 탕을 준비하고 있다가 주재상과 태상황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심하게 당황해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건곤전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태상황과 주재상을 보고 희상궁의 두 다리는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전신에 경련이 일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어의가 다가와 진맥하더니 태상황은 격노해서 기혈이 치솟아 피를 토한 것이라고 했다. 원래 체질이 좋지 않은데 전투를 치르고 피곤이 쌓여 정신력과 기쁨으로 간신히 버티다가, 이제 분노와 절망으로 전신이 모래시계처럼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어의가 이마의 땀을 닦더니 중풍이 아닌지 걱정했으나 다행히 아니라고 했다.주재상의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했다.앞쪽 이마를 탁자 모서리에 부딪히며 이마가 함몰되었는데 피는 멈췄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숨소리도 미약하고, 조금 뒤에는 귀와 코에서도 피가 나서 어의가 얼른 지혈했으나 지혈한 뒤에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원판과 어의 몇 명은 명원제의 지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는데 명원제는 의자에 앉아 사람이 완전 넋이 나가 있었다. 공허한 시선으로 어의가 지시를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힘껏 의자 손잡이를 움켜쥐며 덜덜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태자비를 불러라, 어서!”빠른 말 한 필이 궁에서 달려 나가 목여태감이 직접 초왕부로 갔다. 다른 말 없이 태자비에게 약상자를 챙겨 바로 입궐하자고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만 했다.원경릉은 목여태감의 이런 당황한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잠시도 시간을
원경릉은 가슴이 철렁해 우문호의 부축을 받으며 얼른 다가갔다. 주재상의 이마가 함몰된 것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상황을 물어봤다. 부딪힌 뒤로 귀와 코에서 피가 났다는 말에 놀라서 주재상의 귀를 보니 안이 솜으로 막혀 있어 얼른 꺼냈다.“태자비 마마 겨우 지혈해 놓은 것입니다.” 어의가 서둘러 말했다.원경릉이 고개를 홱 돌려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귀에 출혈이 있는데 누가 지혈하라고 했느냐? 그러면 뇌압이 상승하게 되고……”원경릉은 하던 말을 멈췄다. 희상궁을 놀라게 할지 걱정돼서였다.하지만 희상궁은 이미 놀라서 허물어진 상태로 만약 가까스로 숨을 쉬고 있지 않으면 혼절했을 것이다.원경릉은 약상자를 열어 산소호흡기를 꺼내고 청진기로 심박을 쟀다. 심박이 상당히 미약해서 약상자에서 혈압계를 끄집어낸 뒤 주재상의 팔에 고정하고 재 보더니 원경릉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주재상은 혈압이 심각하게 낮고 쇼크 지수가 높았다. 얼른 수액을 걸고 다시 다른 검사를 진행했다.이런 일은 다른 사람들은 도울 수 없어 그저 비켜서 있었다. 방해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우문호는 아바마마도 한쪽에 앉아 계신 것을 봤으나 눈이 완전히 풀려서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 위로했다. “아바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원 선생이 있으니 황조부와 주재상은 괜찮을 겁니다.”명원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우문호를 흘깃 보고 정이 가득한 눈을 보고 깊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돌렸는데 목젖이 조금 울렸다.우문호는 묵묵히 태상황 곁에 앉아 태상황의 손을 잡았다. 비록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태상황이 피를 토하고 주재상이 부딪혀서 다쳤다는 건 건곤전에서 뭔가 다툼이 일어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분들이 누구랑 다툴 수가 있지? 아바마마와 태상황 폐하는 비록 가까이 앉아 계셨지만 심지어 눈도 맞추지 않았다.아바마마와 태상황 폐하께서 싸우셨나? 그럼, 주재상은 왜 부딪혔지? 우문호는 이번에 소요공을 봤다. 소요공은 건곤전 가운데 태사의에 앉아
계속 관찰하자는 한 마디를 들은 사람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언제나 살려 낼 거라는 안도감을 줬던 태자비이기에 희망적인 말 한마디 없는 것을 보니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았다.태상황은 순간 가슴에 피가 솟구쳐 올랐다. 평생 주대유와 함께 겪어온 일이 두성없이 떠올랐고 별이 총총하던 밤, 속삭이던 어린 대유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 난다. ‘평생 너랑 같이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할 거야.’어리고 학문이 뛰어나던 그 소년은 마침내 자신의 일생, 심지어는 목숨마저 북당을 위해 다 바쳤다.원경릉의 한 마디에 슬픔이 온몸을 타고 흘러 태상황은 혼신의 힘을 다해 한 맺힌 한 마디를 내뱉았다. “황제를 나가시라고 해라!”이 말은 사람들에게 원경릉의 한마디에 못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아무도 고개를 들어 명원제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목여태감이 조용히 다가가 전신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명원제를 부축해 일으켰다. 하지만 명원제는 헛발을 디디며 휘청거렸다..“아바마마!” 우문호가 얼른 달려가 목여태감과 같이 붙잡았다.명원제는 우문호가 붙잡는 것을 보고는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비통함, 망설임, 당황스러움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분노가 그 사이에 있었다.명원제는 우문호의 손을 쳐내고 걸어갔는데, 뒷모습은 매우 쓸쓸해보였다.우문호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소요공을 쳐다봤다. 일련의 사태를 소요공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나 지금은 거의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소요공은 반평생 용맹을 떨쳤지만 당장 지금은 뭘 해야 좋을지 몰랐다. “내가 그랬어, 먼저 죽는 편이 낫다고!”라는 말만 계속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도 무슨 예언 같은 건가? 그렇다면 하지 마. 싫어!’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세 늙은이의 마지막은 바람 앞의 등잔처럼 위태로웠다. 그들은 가질 것 다 가지고, 누릴 거 다 누린 뒤에 조용히 침대에 누워 사람들과 작별을 고한 뒤 남은 사람들의 아쉬움 속에 이 세상을 하직해야 했다. 절대 지금 이런 모습은 아니다.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