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경호원들은 그 말에 흔들릴 리가 없었고 설인아는 손이 빨개진 정도로 케이지를 내리쳤다.“그만해! 다치지 말라고! 오빠, 제발 나 좀 살려줘.”그러나 설인아가 아무리 소리질러도 설기웅은 이 배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케이지가 정말 물에 빠지려는 걸 본 그녀는 마침내 큰소리로 외쳤다.“설기웅한테 얘기해. 날 죽이면 설의종은 평생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아직도 화병으로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실은 내가 독을 먹여서 그렇게 된 거야. 풉, 그러게 누가 날 설의종 옆으로 데려가래? 맞아, 나 그 사람 죽이려고 일부러 다가갔어. 물론 설우현 때문에 안타깝게도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 독약은 한 방울도 치명적이어서 평생 혼수상태로 살아갈 거야.”그 말을 들은 몇몇 경호원들은 순간 표정이 바뀌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 설기웅과 통화를 하고 있었고 스피커폰으로 돌린 덕분에 설인아가 한 말들은 설기웅도 고스란히 듣게 되었다.한편 핸드폰 너머에 있던 설기웅은 취하고 싶은 마음에 독한 술 반병이나 마셨지만 그럴수록 정신이 더욱 또렷해졌다.독약을 어떻게 성혜인의 목에 부었는지, 어떻게 그녀의 뺨을 때렸는지 잊으려고 할수록 생생하게 기억났다.기억의 파편들은 뇌리에 아른거려 점점 더 그의 숨을 조여왔다.게다가 설인아가 한 말을 듣자 마지막 연민의 감정까지 철저하게 사려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핸드폰을 움켜쥔 채 스산함을 내뿜었다.“뭐라고?”경호원은 서둘러 핸드폰을 설인아 앞에 놓았다.설인아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어차피 설기웅이 죽이려고 작정한 마당에 무슨 짓을 하든 혐오할 게 분명하니 그저 자신의 생명이라도 지키고 싶을 뿐이다.“설기웅, 내 말 못 들었냐? 사실대로 말할게. 내가 미스터리한 조직에서 독약을 받았어. 아마 설의종은 평생 깨어나지 못할 거야. 머리가 있다면 생각 좀 해봐. 갑작스런 충격으로 쓰러진 거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누워있겠냐? 해독제가 어디에 있는지 나만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날 죽이는 순간 설의종은 평생 식물인간
설기웅은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설우현에게 설인아가 했던 말들은 전했다.아니나 다를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설우현은 당장이라도 총을 들고 설인아를 찾아가 죽이고 싶었다.그와 달리 설기웅은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어떠한 조직이라고 했어. 반 대표가 알 수도 있으니까 네가 직접 물어봐봐.”설기웅은 이제 성혜인뿐만 아니라 반승제도 볼 자신이 없었다.그저 쥐구멍이라도 숨어들고 싶었지만 혼수상태의 아버지를 떠올린 순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장남으로서 이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다.하지만 그날 밤 봤던 사진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사진 속의 여자가 나미선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 어딘가 불안했다.만약 그 여자가 나미선이 아니라면 나하늘일 수밖에 없다.설의종은 의식을 찾지 못했을 때도 줄곧 ‘하늘’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어머니를 사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걸까? 이때까지 나하늘이라는 분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는 거네...’설기웅은 공허했다. 나미선의 아이로서 그는 이것이 좋은 소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나미선은 자격을 갖춘 어머니라고 할 수 없었다. 비록 설의종의 앞에서는 굽신거리며 존재감이 강하지 않았지만 덕분에 집안 내부는 늘 질서정연하게 관리되었다.설기웅은 한숨을 내쉬며 설우현에게 계속 설명했다.“해독제 있는지도 알아봐 줘. 약을 탄 게 맞는지도 확인해 보고.”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설우현은 곧장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반승제는 주방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성혜인에 입에 맞는 임산부 특식을 준비하기 위해 친히 셰프를 집으로 초대했다.그는 셰프가 어떻게 요리하는지 지켜보면서 입으로 임산부들이 금기시하는 음식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때마침 핸드폰이 울렸고 반승제는 둘만의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은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하지만 성혜인과 함께 떠날 날이 점점 다가오니 반드시 설씨 가문의 일을 처리해야만 한다.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핸드폰 너머로 설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설
설의종의 흐릿한 두 눈은 그제야 의식을 찾은 듯 또렷해졌으나 그것도 잠깐일 뿐 여전히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답답함에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선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성혜인의 말투는 한결 더 단호해졌다.“제가 반드시 해독제를 구해올게요. 설기웅 씨가 없으니 설씨 가문의 물건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질 거예요. 오빠는 설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믿을만한 사람이니까 여기를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아요.”맞는 말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곳을 누군가는 지켜야만 한다.설우현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끗했으나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주춤했고 곧이어 경호원 한 명이 급히 올라와서 보고했다. “도련님, 그분들이 찾아왔습니다.”설우현이 혐오로 가득 찬 눈빛으로 돌변한 순간 누군가 무례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 사람은 설의종과 매우 닮아있었는데 설의종만큼의 아우라는 전혀 없었다.그는 설의종의 사촌 동생이다. 엄격한 가문 전통을 갖고 있는 설씨 가문은 가문 내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모든 후계자를 정해놓는다.그 말인즉 설의종은 후계자로 선정된 행운아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탈락했다.당시 사촌 동생 설태진은 여러 번 사고를 치는 바람에 설씨 가문에서 소외되었다. 그런데 설의종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나타나다니.정장 차림의 설태진은 침대에 누워있는 백발의 설의종을 보고선 깜짝 놀라더니 괴로운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형님 왜 이래? 너희들은 이렇게 큰일이 있으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연락 한번 안하는 거니?”설태진의 시선은 설의종에게 향했고, 곧이어 얼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웃음이 가득했다.“우현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설마 기웅이 그 자식이랑 싸웠어? 너희 형제 때문에 형님이 쓰러진 거야?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는 알고 있니? 네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이제 수련이 끝났으니까, 네가 오늘 밤에 직접 찾아뵙고 얘기해. 자초지종은 내가 얘기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어떻
설태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다가 앞을 가로막는 그 여자가 뛰어난 미모를 갖고 있는 걸 보고선 순간 흥미를 느꼈다.“우현아, 새로 사귄 여자 친구니? 얼른 꺼지라고 해. 설씨 가문이 제멋대로 드나들어도 되는 곳인 줄 아나 봐?”성혜인은 설씨 가문이 결코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설태진이라는 인간이 이렇게 역겨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서류 두 장을 꺼냈다.“이번에 새로 임명된 대표입니다. 그말은 제가 다시 돌려주죠. 여긴 그쪽이 제멋대로 행패를 부려도 되는 곳이 아닙니다.”웃음기를 띄고 있던 설태진은 서류에 적힌 글자가 무엇인지 똑똑히 확인하고선 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기분이 오락가락하며 심장이 마구 날뛰었다.“형제 쌍으로 미쳤구나? 설씨 가문의 주식을 감히 외부인에게 넘겨? 네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넌 끝장이야.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설마 기웅이를 부추겨서 주식 전부를 양도하게 만든 거야? 그것도 외부인에게? 미쳐도 정도껏 미쳐야지!”성혜인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옆에 있던 경호원을 보며 말했다.“밖으로 끌어내요.”경호원들은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봤으나 설씨 가문에서 수년간 일한 노하우로 단번에 상황을 판단한 후 눈치 있게 행동했다.설우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들은 설태진을 양쪽에서 잡고 밖으로 끌고 갔다.설태진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한참 동안 멍을 때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어딜 감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설의종도 나한테 굽신거리는데 네 까짓게 뭔데 이렇게 나대는 거지?”성혜인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꺼져요.”분명히 말투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설태진은 그녀의 눈에서 살기를 보았다.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동시에 경호원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밀려났다.‘뭐 하는 X이지? 포스와 분위기는 설의종이랑 너무 닮았는데?’방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설우현은 한숨을 돌린 뒤 눈시울을 붉히며 설의종의 곁으로 다
“저도 같이 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설우현과 반승제는 동시에 성혜인의 손목을 잡았다.“안돼.”설씨 가문에서 자라온 설우현은 누구보다도 집안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설의종이 쓰러진 것도 모자라 주식 전부가 다른 사람에게 넘겼으니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욕을 먹는 게 확실하다. 진실을 알지 못한 두 어르신의 눈에 비친 성혜인은 그저 외부인에 불과하니까. 두 어르신은 설태진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호락호락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단지 설태진이 워낙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라 상대적으로 허술할 뿐 그들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설우현은 심호흡하며 입을 열었다.“일단 승제 씨랑 같이 돌아가. 당분간은 설씨 가문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비록 두 분 모두 현명하시고 합리적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아버지가 몇 년 동안 널 찾아다녔어. 아들인 나도 최근에서야 알았는데 두 분을 아마 절대 모르실 거야. 이런 상황에 대뜸 주식 양도가 적힌 서류를 들고 나타나는 건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죄를 뒤짚어 쓰는 격이 되는 거야.”성혜인은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설기웅과 설우현은 오늘 밤에 어떻게 될까? 그들은 사람들의 빈정거림을 피할 수 있을까?설우현은 그녀를 반승제 쪽으로 밀었다.“너한테 아직 더 중요한 일이 남았잖아. 난 아버지 얼른 의식을 되찾았으면 좋겠어. 해독제를 구하는 건 너한테 맡길게. 혜인아, 미안하다. 우리가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여서.”반승제는 성혜인을 이끌고 차에 올라탔으나 걱정 가득한 그 모습에 손 하나를 그녀의 배에 얹었다.“널 혼자 플로리아에 두고 가는 것도 걱정되지만, 그 자리에 네가 가는 게 더 걱정돼. 임신했는데 몸 생각해야지. 이제 그만하고 가자.”성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배를 만지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반승제가 막 운전하려고 할 때 성혜인의 핸드폰이 마침 울렸고 낯선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우현이랑 같이 오거라. 직접 보고 싶구나.]추측할 필요도 없다. 이건 틀림없이
설경필은 고개를 들어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옆에 있는 반승제에게 시선을 옮겼고, 순간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귀신이라도 본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마침 옆에 있던 안문희도 고개를 들었고 그녀 역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그동안에 쌓아왔던 노련함으로 재빨리 감정을 추슬렀다.설경필이 입을 열었다.“네가 혜인이니?”그래도 무안하지 않게 먼저 말을 건네는 그의 모습에 성혜인도 꼬리를 내리고 온화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할아버지. 할머니.”설씨 가문은 겉보기에 가풍이 매우 좋았다. 비록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식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집안의 연장자가 입을 열기 전까지 그 어떤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설태진도 그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성혜인을 째려볼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두 어르신의 아우라는 모두를 숨 막히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설경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그는 조금도 늙어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또래보다 열살은 젊어 보인다. “설씨 가문을 의종이한테 넘길 때, 후계자는 주식을 포함한 그 어떤 일까지 처리할 권한이 있다고 말했었지.”설태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저 계집애가 무슨 자격으로 그걸 넘겨받죠?”“닥쳐!”안문희의 목소리다.위엄 넘치는 강력한 호통에 설태진은 지레 겁을 먹고 몸을 덜덜 떨었다.성혜인은 그제야 설씨 가문에는 내부 분열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설우현의 말을 깨달았다.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들은 설우현을 자기 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망나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에 비해 설기웅은 최적화된 후계자였다.가문을 이끄는 사람의 권위는 절대 침범해서는 안 된다.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설태진은 괘씸한지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감히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곧이어 설경필이 말을 이었다.“혜인아, 넌 이제 설
홀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분위기가 엄숙했다.설경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의종이랑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구나.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가러라. 결과 나오면 너랑 저 사람...”그는 반승제를 모르는 사람처럼 잠깐 주춤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결과 나오면 알려줄 테니까 남자 친구랑 하룻밤 자고 가도 괜찮을 것 같구나.”성혜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할아버지께 신세 좀 지겠습니다.”안문희는 저도 모르게 반승제의 얼굴에 시선이 향했으나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경필은 걸음을 옮기며 집사에게 신신당부했다.“혜인이랑 남자 친구분 위층까지 모셔가. 다른 사람들이랑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고.”마침 성혜인은 자리에 있는 이 사람들한테서 벗어날 핑계가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20여 명이 넘는 가족들은 설경필이 자리를 뜬 순간 미쳐 날뛸 게 분명 했으니까.성혜인은 반승제 손을 꼭 붙잡은 채 집사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도착했다.“이쪽에서 지내면 됩니다.”문을 열어보니 방안은 아주 널찍했다.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곳이라 해도 돈을 흥청망청 쓰는 지하 격투장의 모습이 눈에 익었는지 그 어떤 감정 기복도 없었다.문이 닫히자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cctv가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눈살을 찌푸렸다.“왜 두 분을 보면 이렇게 찝찝한 느낌이 드는 거죠?”성혜인은 세상만사를 다 겪었을 사람들이 반승제의 얼굴을 본 순간 충격받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반승제는 자기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두 사람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고 반승제는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표정이 어두웠다.이런 신분과 지위를 갖고 여자 친구의 가족들에게 미움받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만약 궁합이 안 맞는다고 밝혀지면 성혜인은 누구와 결혼하게 될까?성혜인은 반승제의 걱정을 눈치챈 듯 손을 들어 그의 팔목을 잡았다.“궁합이 안 맞더라도 우린 함께할 거예요.”그녀
이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두 노인과 갈등을 일으키지 말라는 충고였다. 고개를 끄덕인 성혜인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집사를 발견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설우현이 집사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걸까?손을 들어 미간을 문지르는 설우현의 모습에서 걱정 어린 마음이 엿보였다.“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섭지 않아. 나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내본 적이 없지만 그분들은 아랫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분들이 아니야. 그분들은 그저 불교를 너무 믿어서 그래. 그렇지 않으면 예전에 설씨 가문을 떠나 바로 작은 섬으로 가지 않았을 거야.”설우현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문 앞으로 걸어가 한마디를 건넸다.“타협점이 있다면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야.”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타협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우현은 두 노인이 있는 서재로 걸어갔다. 설경필은 책상에 앉아 붓으로 먹물을 찍어 종이에 글을 쓰고 있었다. 반면에 그의 부인 안문희는 옆에 서서 먹을 갈며 가끔 몇 초간 머뭇거렸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결국에는 한숨만 내쉬었다. 설경핀은 몇 글자를 쓰고 나서 입을 열었다.“아들이 걱정돼서 그래?”설의종은 그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후계자였는데,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으니 아무리 강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태연할 수 없었다.“아들이 아니면 누구를 걱정하겠어요. 의종은 가장 믿음직스러운 자식인데.”설경필은 손에 든 붓을 내려놓고 몇 초간 생각에 잠겼다.“그 아이는 반승제라고 했던가. 정보를 보니 괜찮아 보이던데 문제는 지금 수배 중이니, 수배가 풀리기 전까지는 도망자일 뿐이란 말이지. 게다가 당신도 알고...”두 사람 모두 말을 하지 않았다. 안문희는 손에 든 염주를 세면서 중얼중얼 염불을 외웠다.서재 문을 두드린 설우현은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할아버지, 할머니.”설경필은 고개도 들지 않았고 안문희는 여전히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서재에는 먹물 냄새가 진동했다.“성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