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훈은 아기방에서 시윤과 대화했다. 심지어 도윤이 평소 어떤 장난감을 제일 좋아하는지와 같은 도윤에 관한 질문들만 했다.시윤도 엄마로서 아이의 얘기가 나오자 이내 자랑하는 듯 줄줄 일상을 공유했다.국내에서 최고로 꼽히는 심리상담사로써 석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윤과 대화할 매체를 찾았다.그렇게 대화를 나눈 지 반 시간이 지나자 시윤은 아기방 리클라이너에 기대 잠들었다.아기방 감시 카메라로 모든 과정을 지켜본 도준은 시윤이 잠든 걸 확인하자 그제야 다가왔다.“어때요?”“괜찮아요. 잠깐 최면을 건 것뿐이에요. 약 1시간 정도 잘 테니 밖에서 얘기해요.”시윤이 한참 동안 깨어나지 않을 거라는 석훈의 확답을 들었음에도 방금 전 돌발 상황을 겪은 도준은 멀리 떠나지 않고, 아기방이 보이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었다.“현재 사모님은 현실도피 증상이 보입니다. 본인이 속았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자꾸 도망치려 하고 있어요. 하지만 수많은 요소에 갇혀 모든 걸 억지로 하고 있어요.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딸이 되어야 하니까. 그날 먹지도 못할 음식을 꾸역꾸역 받아먹은 것도 마찬가지예요.”도준의 그윽한 눈에 그늘이 졌다.“그러니까 지금 어머님도 배척한다는 거예요?”석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요. 뜬금없이 자연분만을 제왕절개로 바꾸려고 한 것도 정신적으로 반항하는 거예요. 원래라면 자연분만으로 애를 낳고 이혼을 제안하려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엄마라는 책임감, 주위 친척 친구들 때문에 말을 못 꺼내고 억지로 역할극을 하고 있는 갈고 보시면 돼요.”기억을 되짚어보니 시윤은 아이를 낳고 깨어났을 때 도준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도윤의 울음에 대화가 중단되고, 수많은 검사가 이어지고, 아이를 돌보고, 또 친구와 친척들을 만나면서 점차 조용해졌다.‘그래서 그런 거였네.’도준은 시윤이 아이를 낳으면 모든 걸 내려놓고 현실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그녀는 오히려 저를 가둬버렸다.그 순간 시윤이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도윤의 엄마,
시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위는 온통 흰색이었다.이불도, 벽도 온통 하얗기만 했다.눈앞의 상황에 놀란 시윤은 이내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여기 어디야? 내 가족은? 내 아이는? 나 나갈래. 내보내 줘!”“...”유리 벽을 사이 두고 겁에 질린 시윤의 표정을 본 도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석훈이 그를 막아섰다.“이건 필요한 치료 과정입니다. 사모님은 사회적 관계와 정신적인 억압 때문에 병세가 생긴 거라 반드시 새로운 환경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다시 의식을 되찾고 원래 사태로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제 말 고깝게 듣지 마세요. 민 사장님이 들어가면 사모님 상태만 더 악화할 겁니다.”도준은 문고리를 꽉 잡았던 손을 스르르 풀더니 무기력하게 두리번대는 여자를 바라보며 감정을 삼켰다.“얼마나 걸려요?”“한 달 내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한 달이라는 말을 듣자 도준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한 달이나 저기 있어야 한다고요?”“보름 정도는 여기서 지내야 합니다. 나머지 보름은 상황에 따라 거의 회복한다면 가족을 만날 수 있어요. 병이 더 이상 악화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도 되고요.”석훈은 본인의 의술에 자신감을 보였다.“사실 다른 의사라면 적어도 석 달은 걸립니다. 이건 충분이 빠른 겁니다.”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 안에 쪼그리고 있는 여자를 빤히 응시했다. 심지어 감정을 억제하느라 목에는 핏줄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한 달만 고생하게 하고 병을 치료할 것인지, 아니면 바보가 되더라도 제 옆에 묶어둘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헐레벌떡 달려온 양현숙은 안에 있는 시윤을 본 순간 몸을 비틀거렸다.“왜 윤이 가둬요?”석훈은 이내 위로했다.“양 여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도 일종의 치료 수단입니다.”곧이어 석훈은 시윤의 병세를 간단히 설명했다. 연유를 들은 양현숙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이게 다 내 탓이야. 내가 일찍 발견
석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잘 있어요. 며칠 뒤 사모님 증세가 호전되면 만날 수 있어요.”시윤은 예전처럼 미친 듯이 도윤을 찾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시윤도 지금 상태로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이를 돌보는 건 더욱 불가능하다.이에 시윤은 한참 고민하더니 말을 꺼냈다.“제가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는 도윤이 안 볼 거예요. 아이 놀라면 안 되니까.”시윤의 말에 석훈은 미소를 지었다.“지금 상태가 날로 좋아지고 있어요. 이제 곧 가족과 만날 수 있을 거예요.”가족을 언급하자 시윤은 눈을 내리깔았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날 저녁, 시윤은 처음으로 멀쩡한 정신으로 병상에 누워 창 밖의 달을 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정신이 다시 돌아온 탓인지 애써 외면하던 것도 하나둘 밀려오기 시작했다.가족, 아이, 그리고 도준까지...한순간 진실을 회피하려 했을 뿐인데 이성을 잃게 될 거라고 시윤은 생각지도 못했다. 만약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면 아이를 다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위해서라도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 이혼하든 직면하든 빨리 나아져야 해.’정신이 돌아온 뒤로 시윤은 심리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하면서 상태가 점차 좋아졌다. 그도 그럴 게, 시윤의 산후 우울증의 원인은 대부분 호르몬 수치가 낮아지면서 생긴 거라 이제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데다 적극적으로 치료에 협조하니 회복 속도는 훨씬 빨라졌다.덕분에 입원한 지 보름 만에 시윤은 매일 그리워하던 도윤을 만났다.보름 안 본 사이 전보다 무거워진 도윤은 포도알 같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시윤을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또렷해져 전보다 더 예뻐진 아이를 보자 시윤은 순간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아가야, 엄마 기억나? 엄마 잊지 않았지?”시윤이 우는 모습을 보자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려던 도윤은 실패하자 입으로 뭐라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천진난만한 도윤의 모습에 시윤은 이내 웃음이 터져 조심스럽게 아이를 품에 안았다
석훈은 도준을 말없이 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무의식을 건드려 결정을 바꾸도록 유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위험이 따릅니다. 사모님은 전에 본인이 원하는 선택을 하지 못해 병을 앓았기에 또 간섭하면 심리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도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리 벽 안에서 도윤의 얼굴을 문지르며 미소 짓는 시윤을 응시했다. 도윤이 태어나고 나서 도준은 시윤이 이렇게 미소를 짓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솔직히 시윤이 왜 저를 그렇게 억압했는지 도준은 알고 있다. 아마 본인이 어떻게 하든 도준한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거다.도준은 이혼도 동의할 리 없고, 시윤이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것도 동의할 리 없으니, 혼인과 아이 모두 시윤에게는 속박이나 다름없었을 테니까....그 뒤 일주일 동안, 시윤의 치료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비록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매번 완전히 회복했다고 느낄 때마다 시윤은 불안 증세를 보이곤 했다.그렇게 여러 차례 테스트를 거친 석훈은 시윤을 보며 결과를 말했다.“시윤 씨의 몸이 지금 회복하는 걸 저항하고 있어요. 무의식적으로 이곳에서 나가면 보기 싫은 사람과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그 점이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하게 막고 있어요. 이건 저로서도 도와줄 수 없는 부분입니다.”시윤은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후볐다. 확실히 석훈의 말대로 일주일 뒤면 퇴원해도 된다는 말을 들은 뒤로 시윤은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누군가 아들을 꿈에서 납치해 필사적으로 찾아도 찾지 못하는 꿈은 거의 매일 반복됐다.시윤의 꿈을 얘기하자 석훈은 그걸 상세히 기록하며 건의했다.“가끔 어려움을 직면하지 못하는 건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지 그 자체를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니 되도록 민 사장님과 얘기 나눠보세요.”도준의 이름을 듣는 순간 시윤은 가슴이 따끔거려 답답해나기 시작했다.그러다 결국 꽉 그러쥔 손을 풀면서 더듬더듬 대답했다.“고려... 해볼게요.”벌써 거부감을 드러내는 시윤을 보자
어둠 때문에 가려진 도준의 억압 대신 저를 꼭 끌어안은 따뜻한 품과 힘 있는 팔이 고스란히 느껴져 시윤은 순간 코끝이 시큰거렸다. 결국 참지 못해 베갯잇으로 눈물을 훔치던 시윤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도준 씨예요? 그동안 도준 씨였어요?”시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도준은 시윤이 깨어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진정을 되찾을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동시에 시윤이 어떤 반응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싫어할지 아니면 아예 밀어낼지. 그런데 의외로 시윤은 그러는 대신 불쌍한 목소리로 그동안 왔던 사람이 그가 맞는지 물었다.도준은 시윤을 품에 꼭 안으며 대답했다.“응, 나야.”그 말을 듣는 순간 시윤은 더 심하게 울기 시작했다.예전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시윤을 제 쪽으로 돌려 위로해 주면서 다른 짓도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이것도 만족한다는 듯.조용한 병실 안에는 순간 여자의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도준은 시윤의 팔을 따라 어깨를 꼭 껴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왜 도윤이보다 더 울어? 됐어, 그만 울어, 여기가 싫으면 우리 집에 가자.”집이라는 단어를 듣자 애써 피하려던 기억이 밀려오면서 시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급기야 몸을 웅그리고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싫어요.”시윤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지만 병세가 점점 악화할까 봐 도준은 결국 시윤에게 혼자만의 공간을 마련해 주려고 허리를 문지르며 위로했다.“그래, 자기 말 들을게. 돌아가기 싫으면 여기 있어.”그 말을 들었음에도 시윤은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도준의 품에서 떨고 있었다.절대 저와 만나면 안 된다던 여자가 몸을 쪼그린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앙상한 팔로 본인을 감싸 안고 떨고 있는 걸 보자 도준은 끝내 손을 스르르 풀었다.“휴식 잘해.”시윤은 여전히 쪼그리고 있다가 병실 문이 닫히자 뻣뻣하게 등을 폈다.고개를 들고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보는 시윤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사실 시윤도 도준과 얘기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본인을
석훈은 시윤을 도와 몇 가지 테스트를 진행하고는 시윤의 요구대로 다음 날 아침 8시로 시간을 정하고 웃으며 말했다.“아직도 조금 더 지나야 민 사장님을 만나려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네요.”시윤은 눈을 내리깔았다.“우리 아들과 빨리 만나고 싶어요.”석훈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모성애의 잠재력은 늘 대단하긴 하죠. 심지어 가끔은 심리학과 과학의 범주를 뛰어넘을 때도 있으니까요.”“그럴지도 모르죠.”시윤은 창밖을 내다보며 대답했다.밖은 어느새 또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그동안 치료를 잘 받은 덕에 시윤은 소극적인 생각을 던져버리고 도윤을 제대로 마주했다. 물론 도윤이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든 간에, 본인과 피로 맺어진 천륜이기에 도윤을 사랑하고 낳은 걸 후회하지 않았다.때문에 도윤을 위해서든, 본인을 위해서든 시윤은 물러날 수 없었다.다음날.아침 7시 50분, 석훈은 시윤을 데리고 병원 아래의 공원으로 향했다.물론 아직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햇빛은 따스했다.석훈은 시윤과 나란히 벤치에 앉더니 넌지시 말을 건넸다.“여기는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비교적 편할 겁니다. 그리고 민 사장님과 대화할 때, 시윤 씨가 멈추라고 하면 저희가 개입해 바로 대화를 중단할 거고요.”다들 제 병이 발병될까 봐 걱정한다는 걸 알았기에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자 석훈은 시윤의 뒤쪽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석훈이 떠남과 동시에 낙엽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분명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몸 안의 모든 세포가 도준이 왔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늦겨울이 가고 초봄에 들어서 여전히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두꺼운 외투마저 남자의 압도하는 분위기를 억누르지는 못했고, 검은 눈동자는 이른 아침의 안개를 뚫고 주먹만 한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시윤의 볼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시윤은 옷소매 안의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러다
시윤은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고 믿지 않았다.“뭐라고요?”그러나 그때 도준이 이혼합의서를 내밀었다.“이거 이혼 합의서야. 난 이미 사인했어.”시윤은 [이혼합의서]라는 커다란 글자를 보고 나서야 눈앞의 사실이 진짜라는 걸 발견했다.‘도준 씨가 정말 나랑 이혼하려 하는 건가?’순간 마음이 허전하여 짐을 덜어낸 것 때문에 가벼워서인지, 아니면 괴로워서인지 알 수 없었다.“왜요?”시윤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도준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서리가 한 층 낀 것 같은 두 눈에서 진심이 무엇인지 좀처럼 보아낼 수 없었다.“자유를 준다는데 왜냐니? 바보야? 자기 이제 자유야.”도준은 시윤의 손에 있는 서류를 펼쳐 내용을 확인시켜 주었다.“봐 봐, 마음에 들어?”흰 종이에 찍힌 검은 글자를 확인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시윤은 안에 적힌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백제 그룹의 지분을 모두 자기한테 넘겨준다는 조항을 보자 시윤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전 도윤이만 원해요.”시윤은 도준이 거절할까 봐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그 말에 도준은 시윤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가볍게 대답했다.“다 자기 거야. 난 기르기 귀찮아.”그제야 시윤은 마음속 돌멩이가 사라진 듯 홀가분해졌다. 아이를 빼앗기는 악몽에 수없이 시달려 느꼈던 공포가 도준의 한마디에 순간 사라져 버렸다.시윤은 도준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도준 씨가 안 놓아줄 줄 알았어요.”“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그런데 왜...”서로 눈길이 마주친 순간 시윤은 도준의 눈동자 속에 비친 저를 발견했다. 그녀의 그림자는 마치 도준의 동공 깊숙히이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시윤이 멍하니 있을 때 도준이 또박또박 대답했다.“자기한테 선택권을 주려고. 앞으로 나랑 같이 있을지 말지는 자기가 선택해.”“...”이 순간, 도준은 자기가 갖고 있던 바둑알을 판에서 모두 치워 시윤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돌을 걷어내고 자진해서 패배자가 되었다.시윤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제 무릎
퇴원하기 전, 시윤은 병실로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 그러다 이혼 합의서가 적힌 봉투를 보자 귓가에 석훈의 말이 맴돌았다.시윤은 다시 한번 이혼 합의서를 꺼내 확인했지만 사인은 하지 않았다. 전에는 조건이 너무 터무니없어 사인할 수 없다고 본인을 설득했지만, 솔직한 심정은 사인하고 싶지 않았다.왜냐하면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으니까.아직 직접 확인해 봐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퇴원 당일 양현숙은 도윤을 품에 안은 채 시윤을 데리러 왔다. 도윤은 시윤을 보자마자 입으로 옹알이를 해대며 짧은 다리를 마구 굴렀다.도윤의 새하얀 손을 꼭 잡고 얼굴에 갖다 댄 순간, 시윤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미소가 피어올랐다.도윤이 태어난 뒤로 빌라는 예전처럼 정갈하지 않고 곳곳에 젖병과 장난감이 널려 있었고, 베란다에는 침대 시트와 소독한 옷들이 널려 있었다.양현숙은 슴슴하고 담백한 음식을 위주로 준비하고 몸에 좋은 보신탕까지 끓여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그러고는 시윤이 식사하는 걸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그걸 본 시윤은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고 난감한 듯 말했다.“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제가 퇴원한 게 아니라 출옥한 줄 알겠어요.”양현숙은 시윤의 농담에 피식 웃으며 이내 눈물을 닦았다.“너도 참. 그래도 네가 웃으니까 나도 한시름 놨다. 지난 1달 동안 네가 고생하는 것만 보면 엄마가 얼마나...”말을 채 잇지 못하고 또 울먹이는 양현숙을 보자 시윤은 얼른 위로했다.“괜찮아요, 다 지난 일이에요.”“그래, 다 지났어.”식사하는 동안 양현숙은 도준의 소식을 몇 번이고 물어보려 했지만 결국은 다시 목구멍으로 삼키기를 반복했다.그도 그럴 게, 말을 꺼냈다가 겨우 회복한 시윤을 또 자극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으니.사실 지금의 시윤은 양현숙이 생각한 것만큼 나약하지 않다. 하지만 저와 도준이 어떻게 될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시윤도 도준의 얘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시윤은 스스로 폭발 사고의 진실을 알아내고 나서 이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