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인은 권하윤이 그 자리에서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물어봤다.“그때 내가 도준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당신도 거기 있었죠?”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얼굴이 뜨거워지고 있는 것도 무시한 채 태연한 척 말했다. “최 사장님께서 비밀을 지켜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전에 말했듯이, 나는 직업윤리를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최수인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돈이 필요하면 도준한테 주라고 하면 되지 않나? 이백억은 그에게 전혀 큰돈이 아니에요.”“설마 도준이 안 주는 건 아니겠죠?”하윤은 미소를 지었다.“민 사장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서요.”최수인이 입을 삐죽거리는 것은 분명히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는 하윤을 쳐다보더니 두 눈이 점점 커졌다.“그럼, 당신이 나한테 와요. 나는 도준보다 대범하니까!”“확실해요?”민도준의 여자를 뺏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최수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둘은 어차피 길게 만날 수 없으니까 어쨌든 내가 먼저 줄을 설게요.”하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귀에 거슬렸다.그녀는 남은 차를 다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만 가볼게요.”최수인은 흔들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접시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찻주전자를 들고 책상에 놓인 족자 상자를 훑었다.“당신도 참 신중하네요.”“연기하려면 반드시 진짜처럼 해야 해요.”하품을 하자 최수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그래요. 소식이 있으면 다시 연락할게요.”하윤이 일어나자마자 그가 한마디 더 했다.“만약 생각이 바뀌어 나한테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감사합니다. 생각해 볼게요.”그녀가 너무 자연스럽게 대답해서 최수인은 오히려 어리둥절했다.그녀가 떠난 뒤, 그는 감탄했다.“어쩐지 도준이 흥미를 느끼더라니, 확실히 재미있긴 해.
강수연의 비난 섞인 말을 권하윤은 변명 하나 없이 다 받아들였다.“어머님 말씀이 다 맞아요. 제가 요 며칠 승현 씨를 보살피는 것이 확실히 부족했어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머님께서 괜찮으시면 승현 씨에게 전화해서 집에 들어와서 살라고 해 주세요. 그러면 저도 그를 잘 돌볼 수 있을 것 같아요.”강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소리야, 승현이 여기서 안 살면 어디서 살아?”하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님 아직도 모르고 계세요? 며칠 동안 승현 씨는 민정 씨 집에서 잤어요.”“뭐야?”순간, 강민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러나 그녀는 곧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언니, 왜 헛소리를 하세요. 오빠가 언제 우리 집에서 잤어요?”“권하윤! 너 무슨 의도로 그런 소리를 한 거야?”“이모, 화내지 마세요. 새언니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강민정은 마치 정말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훌쩍거리며 말했다.하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바로 휴대전화에서 사진 몇 장을 찾아냈다.“아가씨, 기억력이 별로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이건 아가씨가 직접 SNS에 올린 거잖아요.”[오늘 오빠한테 저녁을 해줬는데 오빠가 손재주가 좋다고 칭찬해 줬어요.][천둥 칠까 봐 무서워요.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에요.]강민정의 SNS에는 둘의 다정한 모습이 거의 매일 올라와 있었다. 일부 사진은 둘이 지나치게 친밀해 보였다. 이를 보고 있던 강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하윤이 한 장 한 장 사진을 내밀자 강민정의 얼굴빛이 갈수록 하얗게 변했다.이 사진들은 모두 그녀가 일부러 하윤에게 보낸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강수연은 일그러진 얼굴로 분노했다.“민정아, 너와 승현은 비록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지만 이제 둘 다 어린아이가 아니야. 마땅히 거리를 두어야지. 이렇게 늘 오빠에게 달라붙어 있으면 되겠니?”“네? 저는…… 네…….”“잘못했어요, 이모.”강민정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에 잘못
르네시떼.“판매자는 뭐라 그래요?”최수인이 전화를 하고 오기 바쁘게 마스크를 쓰고 있던 강민정이 다급하게 캐물었다.그녀가 이렇게 다급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권하윤이 그녀와 민승현 사이를 꼰지르는 바람에 강수연의 꾸지람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꾸지람보다 더 두려운 건 강수연이 강씨 가문을 들먹인 거다.오랫동안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다시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는 뉘앙스의 말.몇 년 동안 남에게 얹혀살던 강민정은 본가를 입에 올리는 걸 매우 꺼려 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강수연 곁에서 자랐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본가로 돌아간다는 건 추방이나 다름없었다.더욱이 강민정은 불임이었던 그녀의 어머니가 혼인을 유지하기 위해 임신한 척 입양했던 아이였으니 따지고 보면 진짜 강씨 집안 사람도 아니었다.그 때문에 그녀는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민승현과 잠자리를 가졌다.그리고 순진하게도 민승현과는 피도 섞이지 않은 남남이니 그가 자기를 좋아하면 결혼하는 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렇다면 영원히 민씨 가문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그런데 점차 자기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걸 알아차렸다.체면을 가장 중요시하는 강수연은 강민정이 본인의 여동생이 가짜 임신으로 데려온 아이라는 걸 다른 사람이 알게 할 일은 없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민승현이라는 동아줄을 꼭 붙잡고 있는 거다.혹은 민도준이라는 동아줄을 잡거나.하지만 이 모든 건 지금의 일을 해결한 뒤에 생각할 것들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민씨 집안에서 본인의 입지를 다지는 거였다.때문에 그 그림을 “찾아오는 것”은 그녀에게 가장 좋은 기회였다.…….강민정이 다그치는 듯 쳐다보자 최수인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판매자는 직접 나타나는 걸 원치 않아요. 물건은 저한테 있으니 돈만 가져오면 바로 내어드리죠.”‘나타나지 않으려 한다니…….’그렇다는 건 강민정이 200억이라는 큰돈을 무조건 내놓아야 한다는 소리였다.르네시떼를 빠져나온
민승현이 떠나간 뒤 민도준은 또다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창가에 서있는 그의 눈에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민승현의 모습이 보였다.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민승현의 뒷모습을 보자 불현듯 예전에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권하윤이 자기와 관계를 가진 뒤로 민승현과 관계를 맺은 적 있는가라는 생각.그리고 언뜻 전에 민승현을 너무 사랑해서 지금 더 밉다고 하던 권하윤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권하윤은 그를 건드리면서까지 민승현한테 복수하려 했고.‘그러니까 나랑 바람피우면서 한편으로는 민승현과도 지지고 볶고 한다 이건가? 내가 조연이 된 거네.’민도준은 혀로 볼을 꾹 밀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는 광기가 언뜻 지나갔다.그리고 더 이상 고민도 하지 않고 차 키를 집어들더니 곧바로 아래층으로 나려 갔다.초인종이 울릴 때 권하윤은 와인을 마시며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그녀는 이 순간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솔직히 강민정을 벼랑 끝으로 내몰아 본색을 드러내게 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제 발로 함정에 빠질 줄은 몰랐다.따뜻한 물속에서 기분 좋은 생각을 하니 권하윤의 마음은 여느 때보다도 더 편안했다.하지만 그런 편안함은 다급한 초인종 소리에 깨져버렸다.민승현이 따지러 돌아왔나 하는 생각에 기쁜 심정이 모두 사라진 권하윤은 대충 가운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민승현, 너…….”하지만 문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녀는 경악했다.“도, 도준 씨가 여기엔 왜 왔어요?”할 말을 제대로 정리하기도 전에 그녀는 민도준의 손에 이끌린 채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집안으로 들어온 순간 뜨거운 열기로 벌겋게 달아오른 권하윤의 얼굴과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쇄골이 민도준의 눈에 들어왔다.민승현을 반기기 위해 권하윤이 일부러 이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의 미소는 더욱 섬뜩해졌다.권하윤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은 순간 어깨로 옮겨지더니 엄지로 그녀의 쇄골을 느긋하게 만져댔다.“나는 오면 안 되나?”권하윤은
권하윤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소파에 앉아 계세요. 제가 술 갖고 올게요.”민도준이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자 권하윤은 그제야 안심하고 위층으로 햔했다.술을 가지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당장 옷을 갈아입는 게 더 시급했다.샤워가운을 입고 민도준과 함께 있는다는 건 마치 늑대 앞에서 배를 까고 누워있는 토끼랑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하지만 가운을 벗고 갈아입을 옷을 손에 든 순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권하윤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다급히 옷으로 가슴을 가렸다.“왜 들어왔어요!”민도준은 노골적인 눈빛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누가 왔다고 알려주려고.”“누가 왔다고요?”권하윤은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정신없이 옷을 걸쳤다.그 모습을 대놓고 지켜보던 민도준은 더 이상 볼게 없어지자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분명 민승현이 돌아왔을 텐데. 큰일이네.’권하윤은 순간 조급해났다.하지만 그런 그녀와 달리 민도준은 아무 일 없는 듯 욕조 쪽으로 다가가 물을 손으로 휘젓더니 손가락 사이에 꽃잎을 끼운 채로 들어 올렸다.“둘이 같이 목욕이라도 하려고 했나 봐?”처음에 당황스러워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권하윤은 이미 진정을 되찾았다.그녀는 민승현과 다른 방을 사용해왔고 민승현도 그녀 방에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기에 민도준이 이 안에 숨어 있기만 한다면 발견될 리가 없었다.생각을 마친 권하윤은 시선을 민도준 쪽으로 돌렸다. 그가 입고 있던 검은 셔츠는 어느새 뜨거운 열기에 나른해졌는지 몸에 달라붙어 잘빠진 근육 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하지만 권하윤은 그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다급하게 다가가 상의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혹시 계속 여기 숨어있으면 안 돼요? 저 민승현 바로 돌려보낼게요. 약속할게요.”“음?”민도준은 손에 묻은 물방울을 툭툭 털어버렸다.“무슨 뜻이야? 나더러 상간 남처럼 욕실에 숨어 권하윤 씨 약혼남이 떠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가?”그가 말하면 말할수록 권하윤은 마음이 불편해졌다.민도준을 상
‘욕실에 사람이 숨어 있는데 당황하지 않을 리 있어?’권하윤은 감정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내가 뭘 또 당황했다고 그래? 너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거지.”민승현은 말없이 눈살을 찌푸린 채 권하윤을 쳐다봤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요즘 들어 나한테 매번 맞서더니 이렇게 쉽게 돈을 내놓는다고? 설마…….’권하윤은 켕기는 구석이 있기에 민승현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뭔가 들킨 건 아닌지 불안했다.심장은 점차 소리를 키우면서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너…….”민승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 권하윤을 바라봤다.그리고 그 시각 권하윤은 시선을 욕실에 고정한 채 머릿속으로는 들키게 되면 어떻게 상황을 수습할지 궁리했다.“너 설마 이 돈으로 나 협박하려는 거야?”그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그제야 평정심을 다시 되찾았다. 하지만 너무 말문이 막혀 마른침을 두어 번 삼킨 뒤에야 자기 목소리를 되찾았다.“내가 널 협박할 게 뭐가 있어?”시치미를 떼는 권하윤의 태도에 민승현은 코웃음을 쳤다.“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너랑 합방하자고 협박하려는 수작이겠지.”“…….”‘고작 십몇 분이면서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그게 몇십억 가치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어이없어하는 권하윤과 달리 두 사람이 아직 합방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들리는 순간 민도준의 눈에 있던 짜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윽고 욕실 문쪽을 향해 걸어가던 발걸음마저 멈췄다.‘하, 그러니까 두 사람 아직이라는 거네?’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그는 욕실 안을 빙 둘러봤다. 좁은 욕실 안 벽면에는 핑크색 수건이 걸쳐져 있었고 세면대에는 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세면도구만 있었다. 그것만 보면 이 공간은 이미 결혼한 여자의 욕실 같지 않았다.한편, 밖에서는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걱정 마. 난 너랑 너의 거기에 관심 없어. 돈 가졌으니 그만 가.”권하윤은 팔을 쭉 뻗은 채 카드를 민승현에게 쥐여주고는 더 이상 그와는 접촉하
권하윤은 갑자기 덮쳐오는 민승현의 동작에 놀라 고개를 돌리며 욕설을 퍼부었다.“민승현! 너 어디 아파? 발정 났으면 강민정 찾아가. 나 귀찮게 하지 말고!”민승현은 남성의 존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권하윤의 거절도 무시한 채 그녀를 침대에 눌렀다.권하윤이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버둥대고 있을 때, 욕실의 스크럽 유리로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그 모습을 본 권하윤은 민도준이 나오기라도 할까 봐 놀란 나머지 몸을 흠칫 떨었다.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문고리가 점점 돌아갔다. 마음이 조급해난 권하윤은 어디서 그런 힘이 뿜어 나왔는지 민승현의 아랫배를 힘껏 걷어찼다.“아!”외마디 비명이 들리더니 민승현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면서 고통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웅크렸다.권하윤은 가장 빠른 속도로 욕실 쪽으로 달려가 문과 등진 채로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그녀는 더 이상 민승현이 이상함을 눈치챌 거라는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내가 아무리 네 약혼녀라도 네가 날 강요할 수 없어!”민승현은 그제야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한번 대차게 걷어차이고 나니 흥미도 바로 식어버렸다. 오히려 권하윤을 바라보는 눈에는 분노가 담겼다.“너 딱 기다려!”집을 떠날 때도 민승현은 문을 일부러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그가 떠나는 순간 권하윤의 몸은 힘이 쭉 빠졌다.욕실 문이 그녀의 등 뒤에서 천천히 열리더니 힘찬 팔이 그녀의 비틀거리는 몸을 끌어안았다.“놀랐어?”권하윤은 버둥거리지 않았다. 이 순간 그녀의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아직도 민도준이 하마터면 민승현과 마주칠 뻔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오지 못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민승현이 본인 침실 문을 쾅쾅 거리며 닫은 뒤 떠나가는 소리고 나서야 권하윤은 방금 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다.그 시각 민도준은 아까와는 정반대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다정한 모습으로 그녀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그리고 새하얗게 질린 권하윤
본인 때문에 펄쩍 뛰는 권하윤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는지 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쓸었다.“급할 거 뭐 있어?”“제가 언제 급했다고 그래요?”매번 놀림만 당한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짜증이 올라왔다.“말 안 하겠으면 말고요.”권하윤은 삐지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그 순간 민도준의 긴 팔이 앞으로 쭉 뻗더니 그녀를 다시 자기 다리 위에 눌렀다.“안 그럴게. 내가 잘못했어, 응?”갑자기 변한 민도준의 태도에 권하윤은 오히려 불편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대체 뭔 일을 시키려고 이래요?”“간단해. 민승현과 자지 마, 만지게도 하지 마.”그 말에 놀란 권하윤은 흠칫 몸을 떨더니 고개를 돌렸다.“왜요?”“아무 이유 없어. 그냥 하지 말라면 하지 마.”“혹시 지금 질투해요?”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의 쪽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눈을 반짝거리며 귀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권하윤의 눈빛은 의외로 집요했다.분명 상대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약간의 기대가 차있었다.그런데 그때,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민도준은 고개만 숙이면 권하윤과 입술이 부딪힐 거리까지 가까이 붙었다.숨결이 서로 뒤엉키더니 남자의 나지막하고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말 들어.”권하윤은 대답을 피하는 민도준에게 불만이 생겼는지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민승현이 안 되면 다른 사람은요?”“나랑 만나는 동안 그 누구도 안 돼. 내가 질리면 그때 마음대로 해.”두 머리가 서로 맞닿아 한없이 다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민도준의 말은 야속하기만 했다.그 말을 들은 순간 두근거리던 권하윤의 마음은 이내 차갑게 식었다.솔직히 민도준이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권하윤은 민승현과 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밖에 있는 다른 남자와는 더더욱 그럴 일 없었고.하지만 권하윤은 방금 전 솔직히 해서는 안 될 기대를 했었다. 그의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