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1화

조사가 끝나 경찰서를 나오자 밖에서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강이한과 소은지가 보였다. 강이한은 유영을 발견하자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유영은 그를 무시하고 소은지에게 다가갔다.

뒤쫓아 온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데리러 왔어. 집에 가자.”

“집?”

유영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거긴 이제 내 집이 아니잖아.”

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며 차분하게 말했다.

죽음을 겪고 돌아온 뒤로 어떤 일에도 흥분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당시의 그녀는 넋이 나간 상태로 경찰서에 불려 와서 3일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소은지가 보석금을 낸 뒤에야 그녀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

“유영아!”

남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유영은 담담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와 높이 솟은 콧대, 그리고 강인한 턱선, 모든 게 그녀가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이 정도 외모와 재력을 갖춘 남자라면 결혼을 했더라도 들러붙는 여자가 많은 게 당연했다.

처음 그와 시작할 때 그녀도 그의 매력에 푹 빠졌으니까.

지금 이렇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 잘난 면상에 뜨거운 물을 끼얹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놔.”

아무런 온도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

강이한은 그녀가 아직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

유영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미련 없이 소은지를 향해 다가갔다.

강이한은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껴안아 주고 보듬어 주고 싶을 만큼 저렇게 작고 나약한데 그들 사이에 무언가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차에 오른 유영의 얼굴은 약간 초췌해 보였다. 안 그래도 날렵한 턱선이 더 가늘어져 있었다.

소은지는 따뜻한 음료수를 그녀에게 건넸다.

“뭐라도 좀 마셔.”

“고마워.”

유영은 음료수를 받아 힘껏 뚜껑을 비틀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리 줘. 내가 해줄게.”

유영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열 수 있어.”

어떻게 병 뚜껑 하나 못 따고 있지? 항상 이렇게 나약해 보였었나?

그녀는 작은 손으로 힘껏 병 뚜껑을 비틀었다.

예전에 강이한에게도 이런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와 만난 뒤로는 이런 일을 직접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유영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여자로 변해갔다.

소은지는 그녀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병 뚜껑을 딴 유영은 벌컥벌컥 음료수를 들이켰다.

반병을 비운 뒤에야 비로소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은지야.”

“응.”

“그 사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이 순간에도 그녀의 말투는 차분했다.

오랜 시간 세강의 사모님으로 살면서 이런 말투가 몸에 배긴 듯했다.

소은지는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힘들면 소리도 지르고 울기도 해. 아무도 널 뭐라고 하지 않아.”

남편이 바람이 났는데 이럴 때에 고상을 떨고 있어 봐야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다.

유영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장 아끼는 친구 앞에서 처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집에 데려다줘.”

“그 집에 또 가려고?”

소은지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유영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건 죽어도 싫지만 지금은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됐다.

네티즌들의 비난만 키울 뿐이었다.

강이한의 저택에 있으면 아무도 쉽게 그녀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소은지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집에 내 지분이 절반이나 있어. 안 돌아갈 이유가 없잖아.”

소은지는 멍하니 친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유영과 많이 달라진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가 아는 유영은 물욕이 없는 사람이었다.

강이한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녀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고아인 유영이 돈을 보고 강이한에게 들러붙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영을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돈을 위해 인생을 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강이한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천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유영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내 이혼 소송은 너한테 맡길게. 내가 가져가야 할 부분은 확실히 챙길 거야.”

“그래, 알았어.”

소은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게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응당 가져야 할 부분까지 포기하면서 자존심을 챙기는 건 현명하지 못한 짓이다.

Related chapters

Latest chapter

DMCA.com Protection Status